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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현대중공업 열사투쟁 평가

:: 2005-07-11   조회: 2215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4월 7일, 검찰의 주선으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교섭을 통한 합의로 56일간의 힘겹고 지난했던 투쟁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힘있는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 아닌 합의안은 종이조각에 불과했고, 여전히 조합원들의 중공업 출입은 허용되지 않고 있으며 경비대의 감시와 폭력 역시 계속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예상했던 대로 이를 이행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당연히도 합의안을 이행시키기 위한, 아니 열사의 염원대로 하청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한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열사투쟁 전이나 열사투쟁 중과 다름없이 가열차게 계속되고 있다.

이중의 적?!
2003년 8월 30일 설립한 현대중공업 하청노조는 그간 공개적으로 현장투쟁을 벌였던 조합원들이 대부분 업체폐업 등으로 해고되어 현장 밖으로 밀려나 있던 상황으로 매일의 출투와 현장진입 투쟁을 비롯한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투쟁을 벌여가고 있었다. 하청노조는 모든 비정규직 노조가 그러하듯 설립부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악랄하고 빈틈없는 노무관리로 악명 높은 거대자본현대중공업을 상대로 한 싸움인 것이다. 공개적인 모임을 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지사였고 노조의 '노'자만 나와도 움츠러드는 현장분위기에 조직화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적은 현대중공업 뿐만이 아니었다. 현대중공업에서의 10년 무쟁의를 가능하게 했던 지금의 현중 어용노조 역시 투쟁해야 할 적이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한 달에 한 명 꼴로 산재사망사고가 일어나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산재사고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올해만 해도 해가 바뀌자마자 보름동안 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음에도 현중노조는 사측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 한때는 민주노조 운동의 선봉에 섰던 현중노조였고 지금의 탁학수 집행부 또한 그 투쟁의 한가운데 있던 활동가였지만 지금은 현대자본의 거센 공격에 굴복하여 자본의 하수인으로 변질되어 온 것이다. 현중노조는 이번 투쟁의 전 과정을 통해서도 어용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열사의 분신 직후 구성된 지역대책위에 대해 "각 노동단체 등에서 박일수씨의 분신자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짙다"는 내용의 기자회견까지 하며 대책위를 탈퇴하고 독자행동을 하겠다고 하더니 이후 "열사로 인정할 수 없다", "퇴직자로 현대중공업과 관련이 없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등 사측과 똑 같은 내용의 음해를 가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유가족인 열사의 딸을 고모를 이용해 유인하여 납치하려는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박일수 열사가 분신하던 날 산재로 죽은 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나 열사투쟁 중인 3월 9일 사측의 산재은폐를 폭로하며 크레인에 목을 매 자살한 고 류재순 씨의 문제 역시 자기 조합원의 문제임에도 조용히 수습하고 넘어 갈  뿐이었다.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은 이렇듯 현대 자본의 살인적인 노무관리와 노조의 동조를 통한 이중적 현장통제에 10여 년을 억눌려 숨죽인 채 살아왔다. 이는 하청만이 아닌 정규직노동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현장의 정규직 활동가들조차 실천력과 내용을 잃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하청노조의 건설을 통해 현장 활동가들을 재결집시키고 현장을 복원시켜야 한다는 입장이 제기되었고, 노조민주화가 먼저라는 이견도 있었으나 결국 하청노조의 건설로 이어진다. 즉 하청노조는 시작부터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노조민주화와 현장복원이라는 목적을 가지게 되었고 정규직 활동가들과 함께 논의를 하고 노조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 노조 건설 시기 역시 정규직노조의 선거시기에 맞추어 졌다. 그러나 현장활동가들의 활동력은 여전히 현장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는 수준이 못되었고 하청노조 역시 대중조직화에는 실패하여, 지난 2003년 가을의 대의원 선거는 200여명이 넘는 대의원 중 단 4명만이 당선되는 결과로 끝이 났고 목적했던 노조민주화와 현장복원은 일단의 실패로 끝이 난다. 정규직 활동가들은 열사투쟁 과정에서도 분과동지회를 중심으로 현장대책위를 구성하여 투쟁을 지원하지만 류재순씨의 자살문제나 투쟁 말기 대의원들이 빈소난입을 위해 낸 반차에 대해 조합비로 보상해주기로 한 문제 등 정작 주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남의 투쟁일 수 없는 투쟁이었음에도 보조적인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정규직노조의 선거 직전 노조를 띄우고 현장투쟁을 벌였던 하청노조 동지들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큰 희생을 치뤄야만 했다. 현대중공업은 조금이라도 활동이 있는 업체는 바로 폐업이라는 방식으로 조합원들을 해고시켰고 심지어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동원해 폭행을 가하도록 하기도 했다. 현장에 가해지는 탄압도 날로 심해져서 투쟁에 직접적인 결합을 하지 않았더라도 조합원임이 드러나거나 조금이라도 수상하게 여겨지는 노동자들은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버틸 수 없게 만들어 아침 출투 때 하청노조에서 배포하는 유인물을 받아보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할 정도였다.
하청노조 동지들은 현장 밖으로 밀려난 것은 물론 현장의 대중을 만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계속 연락을 하고 관심을 갖는 조합원들이 상당수 존재하긴 했으나  모두 차마 공개적인 활동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비공개 조합원이었다. 그러나 정규직활동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하청노조는 매일 출투를 하며 유인물을 배포하고 비공개조합원 모임을 운영하며 꾸준한 활동을 전개한다.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박일수 열사는 분신이라는 길을 택했다. 막강한 자본의 탄압과 대응, 어용노조의 방관, 얼어붙은 현장, 등등의 조건들이 열사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길로 몰아넣은 것이다.
박일수 열사는 생전에 하청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부당하게 착취받는 현실에 분노하여 한마음회라는 하청노동자들의 모임을 운영하며 서로의 분노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일하던 업체인 인터기업이 잔업, 특근수당이나 퇴직금 등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것에 대해 체불임금 소송을 걸고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현장에서의 투쟁을 벌여왔다. 그러다 지난 해 결국 업체에서 해고가 되었고, 정규직 노조를 만나는 등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았으나 결국 답을 찾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현대중공업의 극심한 노동착취의 현실과 부패한 현중노조의 실상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남기고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였다.
열사의 분신은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현장복원을 통한 노조 민주화라는 과제를 지닌 하청투쟁의 연장선상일 수밖에 없었고 하청노조와 정규직활동가들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중조직화의 기회였다. 현장의 숨죽인 노동자들이 투쟁의 대열로 결집하고 자신의 문제를 위해 스스로 투쟁하도록 하는 계획들이 제출되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울산지역본부와 현대자동차노조 등을 비롯한 지역의 대공장 정규직노조로 구성된 대책위는 투쟁을 바라보는 관점부터가 달랐다. 열사투쟁을 단순히 비정규직 처우개선문제로 바라보고 있었고 투쟁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벌어졌기 때문에 수습해야 할 문제로 볼 뿐이었다.
이는 이후 대책위의 교섭결정에 대해 항의하는 하청노조 동지들에게 한 이헌구 대책위원장의 "내가 하청문제 꼭 해결해 주겠다고 했지 않습니까" 라는 말속에서도 확인이 된다. 동력이 없음을 이유로 투쟁을 회피하기도 하였지만 선거를 앞둔 현대자본과의 교섭을 통해 어느 정도는 해결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책위의 투쟁에 대한 '관점' 없음으로 인해 설정된 목적의 차이는 이후 투쟁 내내 대책위로 하여금 교섭에 매달리도록 만든다. 사태의 수습만이 목적이고 이는 열사에 대한 보상과 일정정도의 처우개선을 따내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대책위로서는 되지도 않을 투쟁을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교섭을 성사시키면 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책위 내에서 하청노조는 투쟁의 주체이기보다는 대책위의 일 구성원에 불과했고 대중동력도 갖추지 못한 신생노조인 하청노조의 발언권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얼어붙은 현장에 투쟁의 불씨를 뿌리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투쟁을 전국화하여 연대를 조직하고 투쟁의 주체로서 바로서기 위해서 하청노조의 지프크레인 고공농성은 불가피하였다.

목숨을 건 크레인 농성
열사의 분신 후 이틀후인 2월 16일 월요일 인터기업의 노동자들은 즉자적으로 작업거부에 돌입했다. 그러나 전원 해고까지 각오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투쟁은 인터기업 사장의 회유로 하루만에 중단되었다. 회유의 내용은 2월내로 체불임금에 대한 보상으로 150만원을 지급하고 고용보장을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는 이후 2월 말 조합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강제로 쓰게 하고 이를 받아들인 노동자에 한해 150만원이 지급되는 것으로 지켜(?)졌다. 이는 열사투쟁이 계속 진행 중이었기에 내주었던 당근이었다. 동시에 투쟁의 전선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족쇄이기도 했다.
그리고 2월 17일 오전, 열사의 시신을 검찰의 부검요구에 내주고서야 받아낸 대가인 빈소를 중공업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길 수 있게 된 그 날, 하청노조는 크레인 고공농성을 결행한다. 목숨을 건 결의와 무관하게 현중 자본은 경비를 동원하여 다섯시간만에 크레인에 오른 세 동지를 무참히 끌어내린다. 이 과정에 서 무자비한 폭행을 비롯한 인권유린이 자행된 것은 물론이다. 이 전 과정을 지켜보던 경찰은 경비에 의한 폭행으로 중상을 입은 동지까지도 치료는커녕 곧바로 경비들로부터 넘겨받은 그대로 연행해 갔을 뿐이었다.
폭력은 현대중공업의 울타리 안에서만 자행된 것은 아니었다. 크레인 농성투쟁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지역의 연대단위 동지들에게도 현중 경비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다. 한 동지는 실명위기에까지 처할 정도였다. 현대 자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법천지의 현대공화국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크레인 고공농성은 처참할 정도로 순식간에 끝나버렸지만 이 투쟁의 주체는 명실상부 하청노조임을 전국에 각인시키는 성과를 남겼고 현장의 숨죽이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적어도 이번만큼은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투쟁의지를 보여주었다.

공개조합원, 인간선언!!
크레인 농성이후 하청노조는 이 성과를 이어 대책위를 견인하고 현장을 조직하기 위한 별다른 계획을 제출하지 못한 채 안타까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투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연 것은 두 하청노동자들의 공개조합원 선언이었다. 노조를 만들고 현장투쟁을 하다 업체가 폐업되어 해고가 된 조합원들을 제외하고, 그 외 수많은 하청노조의 조합원들은 현대중공업의 악랄한 현장탄압에 자신이 조합원임을 숨긴 채 박일수 열사의 빈소에도 가보지 못하고 집회 때도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합원임이 드러나면 곧바로 해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용기, 조광한 두 조합원의 공개조합원 선언은 그만큼 큰 결의를 필요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고 얼어붙은 현장에 투쟁의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는 중요한 고리가 될 값진 것이었다. 악랄하고 빈틈없는 현대중공업의 탄압에 현장투쟁은 쉽지 않았고 얼마 후 출근을 저지당하면서 이 동지들조차 현장에서 밀려났지만, 출근이 가로막히기 전 두 동지는 중공업 내의 식당에서 중식선동을 하며 조합원 가입원서를 돌리는 등 현장에서의 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날의 중식선동은 경비들이 가입원서를 탈취하는 등 물리력을 가하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뜻밖에도 몇몇 하청노동자들이 즉석에서 가입을 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두 동지는 오토바이 시위와 산재 실태조사 등을 진행하며 끈질긴 활동을 하였다.

무법천지의 현대공화국, 그리고 어용노조의 공격
박일수 열사의 분신과 하청노조의 크레인 고공농성투쟁, 공개조합원들의 활동 등 투쟁이 이어지자 현대중공업 자본은 크레인에 오른 하청노조 조합원들을 경비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하며 끌어내린 것을 시작으로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점점 더 악랄하게 탄압을 가하였다. '현중사랑' 등을 비롯한 사내의 매체를 통해 열사를 음해하고 사내 외의 온갖 사조직을 동원하여 투쟁을 왜곡하는 악선전을 일삼았다. 강제로 작업자들을 가입시켜 현중사랑 자원봉사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발대식까지 하는 쇼를 벌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인터기업 노동자들을 사칭한 유인물을 배포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경비대를 동원하여 하청노조 조합원 개개인을 24시간 미행, 감시하고 출투 때마다 시비를 걸고 폭행을 일삼더니 급기야 2월 28일 영남 노동자대회 때는 헬멧을 쓰고 쇠파이프를 들게 하여 어린아이까지 있던 천막 농성장을 침탈하고 폭력을 가하였다. 언제나 보고만 있거나 오히려 사측의 편을 들던 경찰조차 말릴 정도였지만 경비들은 경찰을 밀치며 폭력을 행사하였다. 울산은 말 그대로 무법천지의 현대공화국인 것이다.
현중노조 역시 사측과 똑 같은 행태로 어용이라는 수식어를 여지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한술 더 떠 유가족을 납치하려는 시도를 하는가 하면 200여명의 대의원들이 떼지어 몰려와  열사의 시신과 유가족이 있는 빈소를 몇 번씩이나 침탈하여 선전물을 찢고 폭력을 휘두르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였다.

대책위의 교섭결정
이런 와중에서도 대책위는 일관되게 교섭기조를 유지한다.
투쟁 초반이었던 2월 23일 이수호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신임 집행부가 울산을 방문하여 사측과 현중노조를 만난 후 대책위에 현중노조를 포함하지 않는 교섭은 없다는 사측의 입장을 전달한다. 현중노조의 입장 역시 열사라는 표현을 빼면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다. 현중노조의 계속되는 도발과 빈소침탈에도 불구하고 대책위는 3월 2일 이것을 안건으로 논의를 하였고 이 자리에서는 현중노조의 사과와 열사인정이 없는 한 받을 수 없다는 대책위원들의 대부분의 의견에 따라 안이 부결된다. 그런데 다음주인 3월 8일 계속되는 현중노조 대의원들의 빈소침탈 등으로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위는 안건을 다시 상정하였고 이번에는 현중노조를 포함한 교섭을 받기로 결정한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이 논의는 사전논의도 전혀 없이 진행되어 하청노조는 물론 대책위의 주요 집행간부들조차 알지 못했고, 헌신적으로 투쟁에 결합하고 있던 지역의 비정규노조를 비롯한 대책위에 결합하지 못한 단위들은 (대책위는 지역본부와 금속연맹, 금속노조 그리고 지역의 조합원 천명 이상사업장 위원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논의에 참여할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결정을 날치기 통과했던 논의과정상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교섭을 통한 문제 해결이 최우선 과제였던 대책위로서는 현중노조를 받아들여야 교섭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책위는 대신 현중노조 제명을 금속연맹에 촉구하겠다는 결정으로 면죄부를 쓰려한다.
이 과정에서 필사적인 반대를 하며 대책위를 비판하고 항의방문을 한 하청노조에 대해 대책위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며 대책위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분열을 조장하는 반조직적 행위를 하는 과격분자로 낙인찍는다. 지역의 활동가들조차 이런 논리에 말려들어 투쟁의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기보다는 하청노조 동지들의 태도를 문제삼으며 본질을 왜곡하는데 일조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며 하청노조는 지역에서 고립되어 갔고 대책위에 끌려다니며 무기력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하청노조의 무기력한 상태는 크레인 농성 이후 현장조직화 등의 노조차원의 별다른 투쟁계획을 내지 못한 채 계속되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하청노조는 대책위의 교섭결정 등 주요한 시기마다 대책위를 비판하고 항의방문 등을 조직하는 대응을 하지만 언제나 한 발 늦은 뒤의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노조 내부에서조차 설득력을 잃기도 했다.
한편 3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 때는 대책위가 질서유지대를 구성하여 전하문에서는 전경이나 경비대를 대신하여 문 앞을 가로막아 같은 노동자끼리 대치하게 만들고, 정문에서는 정문을 가로막은 전경차에 분노한 동지들을 대책위원이 가로막으며 몸싸움까지 벌이는 풍경이 벌어진다. 이 또한 예상되었던 상황이었으나 하청노조는 조직적인 투쟁준비를 하지 못하고 투쟁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동지들에게 패배감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이날 집회가 끝난 이후 전경차에, 그리고 대책위원들에게 이중으로 앞을 가로막혔던 집회참가자들은 결국 대책위 항의방문을 진행하며 정리집회를 대신한다.

열사정신계승 선봉대
지역의 비정규노조들과 현중 정규직활동가들은 투쟁에 대한 결합력과 무관하게 동력이 없다는 이유로 대책위에 결합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대책위의 구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투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는 지도력에 대한 비판은 좀더 적극적으로 투쟁에 결합해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단위의 구성을 필요로 하였다. 하청노조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현장에서의 투쟁을 준비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미 선거국면으로 접어들어 버린 전국적 흐름에 다시금 열사투쟁을 알려내고 확산시키기 위해, 3월 18일 전국에 열사정신계승 투쟁선봉대를 제안한다. 때마침 부산에서는 자체적으로 실천단을 구성하여 1인시위 등의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고 대구에서도 선봉대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울산지역에서도 선봉대가 구성되어 3월 27일 영호남 노동자대회 때 행진 도중 독자적인 투쟁을 벌여낸다. 그러나 전국적으로도 투쟁은 이미 선거와 탄핵이라는 급류에 휩쓸려버려 대구, 부산 이외의 지역은 독립적인 선봉대를 구성하기는 힘든 상황이었고, 대책위와 독자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울산지역에서는 각 단위별로 조직적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몇몇 동지들의 개별적 결합으로 선봉대가 구성되었다. 때문에 선봉대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 담보되지 않았고 결국 27일 집회에서는 본래의 의미를 부각시키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기습연행과 잠정합의안
27일 영호남노동자대회 직후인 다음날 새벽, 경찰은 빈소에 난입하여 자고 있던 하청노조 위원장과 조합원 1인, 이헌구 대책위원장을 기습 연행해 간다. 이들은 그간의 투쟁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있던 상태였다. 긴급하게 소집된 대책위는 30, 31일 잔업거부와 4월 1일 부분파업을 결정한다. 하청노조도 즉시 정문앞 노숙농성을 시작하고 다음날부터는 위원장 직무대행이 된 사무국장의 단식농성이 시작된다. 경찰의 만행으로 투쟁은 다시 불이 붙는 듯 했으나 현자노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부분파업은 현자의 결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여 3월 31일 대책위 회의에서 결국 철회되고 간부파업으로 전화하면서 투쟁은 기울어들고 만다. 주말의 집중집회조차 다음주로 연기되면서 한 주가 지나가고 집중집회가 예정되어 있던 4월 7일 전날인 4월 6일 검찰의 중재로 갑작스러운 교섭이 진행되어 잠정합의안이 나왔다. 합의안의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하청노조 인정과 조합활동 보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실행을 위한 구체적 내용은 없이 애매한 문구로 포장된 공문구일 뿐이었다.
하청노조의 반대에도 잠정합의안은 통과되었고 하청노조는 대책위의 해산이후 투쟁을 계속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만다.

끝나지 않은 투쟁
4월 9일 장례식을 끝으로 박일수 열사투쟁은 완전히 끝을 내린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사측의 임금삭감 시도에 분노한 소지공 노동자들의 모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다시 새로운 투쟁의 국면이 시작된다. 중공업은 중공업 내 다른 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고 있던 소지공의 임금체계를 기존의 일급제에서 월급제로 바꿔 임금삭감을 시도하고 있었다. 고임금이라고는 하지만 일의 강도와 노동시간을 고려하면 결코 많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목숨을 걸고 일을 해야 하는 중공업 노동자 전체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소지공들은 한차례 투쟁을 시도했지만 사측의 방해공작과 미처 자리잡지 못한 조직력으로 실패를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박일수 열사투쟁에 힘입어 이번에는 기필코 승리하리라는 결의로 4월 10일 모임을 성사시켜 집단적으로 노조에 가입하고, 업체별 대표를 뽑고, 투쟁방향 등을 논의하였다. 열사투쟁이 끝난 이후로도 사측은 경비대를 동원한 24시간 감시와 미행 등의 탄압을 계속하였고 소지공노동자들에게는 개별적인 회유와 노조탈퇴 종용 등의 탄압이 가해졌지만 굽힘없이 지금까지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복직판결을 받은 사무국장 동지의 복직과 5월 27일 최초로 중공업 내에서 중식집회의 성공적 개최로 투쟁은 점차 활기를 띠고 있으며 같은 날 27일부터 하청노조는 또다시 합의안 이행과 소지공 투쟁 승리를 위한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열사투쟁은 종이조각 뿐인 합의안으로 끝났지만 열사정신 만큼은 계승되어 또다시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일수 열사투쟁이 남긴 과제
박일수 열사는 하청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과 현중 정규직노조의 부패한 실상을 여실히 폭로함과 동시에 몇 가지 과제를 남겼다.

첫번째는 말로만이 아닌 실천으로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이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열사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압축되어 드러났던 투쟁이었고 기존의 운동 질서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질되어온 민주노조의 모습은 이번 투쟁에서는 현중노조라는 이름으로 대표되었지만 단지 한 노조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한통계약직 투쟁 등의 숱한 비정규직 투쟁에서, 그리고 지난해 이어졌던 열사투쟁 과정에서 투쟁을 방관하거나 회피하고 관료적인 모습을 보이는 상층지도부의 모습을 목도해왔다. 이번 투쟁에서 역시 민주노총은 전국집회 하나를 잡는 것도 어려워하더니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되자마자 매주 수요일 파업을 결의한다. 서울에서의 집회 또한 비정규노조연대회의에서 3월 17일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가 있는 계동 사옥 앞에서 집회를 연 이후에야 그 후의 집회를 주관하며 때늦은 대응을 한다. 또한 투쟁을 전국화 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를 방기하고 지도부들은 각 현장을 순회하며 선거를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금속연맹 역시 지난해의 열사투쟁의 과정에서는 투쟁을 지원하고 조직하는 노력을 어느 정도 해왔으나 이번 투쟁에서는 울산지역본부에 투쟁을 내맡긴 채 투쟁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현중노조와의 관계 때문이었을지, 비정규직 투쟁이기 때문이었을지, 연맹 역시 선거로 여념이 없기 때문이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노동운동의 메카라 불리는 울산지역의 대공장 중심의 관성적인 운동풍토는 대책위를 통해 보아왔던 대로 더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번번이 비판만 해왔을 뿐 다음순간에는 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서 밟아오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정치로의 진입에 성공한 지금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사후 평가로만 그치지 말고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강고한 실천으로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두번째는 더 이상 비정규직 문제를 시혜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사투쟁을 계기로 부각된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를 포함한 비정규직 문제는 이제는 누구나 심각하다고 이야기하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를 통한 노동착취와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삶의 불안정화라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접근이기보다는, 적은 임금으로 힘들게 일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수준 일 뿐이다. 비정규직을 위해 모든 것을 해줄 것처럼 이야기하는 정부도 무슨 일만 터지면 대책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실상 나온 안을 보면 겉만 번지르르할 뿐 실내용은 없거나 더 개악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지난 해 근로복지공단 비정규노조의 이용석 열사투쟁의 결과 만들어진 이번 공공부문 비정규대책만 보더라도 그렇다. 더이상 이렇게 "먹고 떨어져라" 는 식으로 제시되는 떡고물에 현혹되어 투쟁을 방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운동 진영 내에서도 만찬가지이다. 최근 몇몇 사례에서 정규직노조들은 정규직노조 임단협 시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시켜 부분 정규직화나 비정규직의 처우개선 등의 성과를 얻은 바 있다. 이 자체로서도 어떤 면에서는 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비정규직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비주체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규직노조는 대중의 인식이 안되어 있어 (비정규직 문제는 남의 문제라는)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다고 하소연하기도 하고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큰소리치기도 한다. 이 역시 비정규직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어용노조에도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회피할 빌미를 주고 있다. 비정규직은커녕 자기조합원의 자살도 은폐하기 급급했던 현중노조도 어쨌거나 "하청노동자들의 권익과 복지의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유인물 귀퉁이에 항상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를 상담 받는다는 문구를 보란 듯이 적어놓고 있는 것이다.
즉 비정규직 문제의 올바른 해결과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역시 투쟁의 한 주체로서 인정하고 스스로 싸울 수 있도록 지지, 지원함과 동시에 비정규직 문제가 전체노동자들의 총체적인 문제임을 인정하고 함께 연대하여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박일수 열사투쟁은 많은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고 뭔가 해결되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과제로 남겼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투쟁하라고 외쳤던 열사의 뜻을 살아남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울산에서는 열사의 뜻을 이어받은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투쟁이 또다시 고립되지 않도록, 비정규직 투쟁의 또 다른 뼈아픈 교훈으로 남지 않도록 하자. 열사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또 다른 열사가 나오지 않게 하자!!
조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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