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6일 비정규직 부곡분회의 파업 돌입 → 6월 19일 사무전문지부와 식품분회 파업 동참 → 7월 3일 주력대오인 판매지부와 간접고용(불법파견) 조합원들의 합세 → 10명 구속, 간부 해고, 50억 손해배상청구, 공권력과 용역 깡패, 관리자들에 의한 집단폭력, 파탄지경에 이른 생계고에도 굴하지 않는 끈질긴 투쟁 → 2001년 3월 7일 파업 265일만에 노사 합의 타결.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결하여 비타협적이고 끈질긴 연대투쟁 속에서 끝내 작지만 의미있는 승리를 일궈낸 이랜드 노조 파업투쟁 265일은 한계상황을 감내하며 투쟁한 이랜드 조합원들과 이랜드 파업투쟁에 함께 연대한 수많은 동지들의 헌신과 열정이 빚어낸 가슴벅찬 승리의 기록이다. 파업 기간 내내 많은 시행착오와 한계, 고통과 아쉬움들이 있었음에도 이랜드 파업투쟁을 승리한 투쟁으로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누구도 가지 못했던 전인미답의 길을 참으로 버겁게 개척해 낸 파업 초보자인 우리 조합원들과 단위 사업장과 직종, 소속을 비롯한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구속까지 불사하며 투쟁에 결합했던 연대 동지들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비정규직 철폐" 구호 아래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중심 요구로 내건 이랜드 노조의 파업은 실업자가 넘쳐나고 비정규직이 날로 양산되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참담한 현실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업장 내에서나마 소수 노조지만 우리 자신의 힘으로 바꿔내보자는, 버겁지만 질 수 없는 싸움이었기에 9개월간의 장기화와 악전고투는 어쩌면 당연했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 조합원들은 노동자는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몸으로 값비싸게 배웠다. 그리고 말로만, 구호로만 선언하고 주장하는 노동자가 아닌, 투쟁의 선봉에 서서 실천하는 노동자가 진짜 노동자이며 현재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돌파구를 열어 갈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미흡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2000년 파업투쟁의 가장 큰 성과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중심에 서서 단결투쟁, 연대투쟁, 결사투쟁의 기치 아래 민주투사로 단련된 이랜드 파업투쟁 노동자들 자신이었다.
2. 파업 전 이랜드 그룹의 구조조정 전략과 노조의 투쟁
2000년 이랜드 노조의 장기파업투쟁은 발빠른 구조조정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이랜드 자본의 공격에 맞서 불가피하게 전개된 투쟁이었다. 80년 보세가게로 출발해 이후 15년간 급성장을 계속한 이랜드 그룹은 수십 개의 중저가 의류 브랜드를 중심으로 아울렛 등 할인업체와 식품사업부, 호텔, 건설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덩치를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방만한 다각화 전략이 IMF로 위기를 맞자 98년 당시 정규직 중심의 4000여 노동자 중 절반인 2000여명을 은폐된 형태(자진사직)로 정리해고하고 99년 이후 유통과 물류를 중심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구조조정을 연이어 단행하였다. 그리고 97년부터 3년간 임금동결, 성과급·연봉제 도입 등을 통해 현장 노동자들을 무력화시키고 이윤 착취를 극대화해 나갔다. 이러한 현장 노동자의 일자리와 임금 등 노동기본권을 박탈하면서 이랜드 자본은 IMF 이후 부도 위기를 극복하고 커다란 이윤을 남기게 되었다.
이랜드 노조는 93년 그룹단일노조로 결성되어 당시 1500여명의 정규직 노동자 중 800여명이 노조에 가입하였으나 이랜드 자본의 조직적인 부당노동행위 끝에 1년 사이 400여명의 조합원이 탈퇴하였다. 이러한 파행적 노사관계 속에서 노조 말살을 노골화하는 이랜드 자본에 맞서 노조는 4년간 100일 철야농성 및 단식투쟁 등을 위시한 다양한 선도투쟁으로 노조를 사수해냈으나, 현장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투쟁으로까지는 확산시키지 못한 채 조직률은 계속 하락하였고 사무전문직 중심 노조로서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랜드 자본은 97년 3월 전임자 7명 중 6명에 대한 일방적인 현장복귀 명령을 시작으로 노조 와해를 시도하였고 이에 맞서 노조는 57일간의 파업투쟁을 전개하여 단체협약을 쟁취하고 임금인상 및 계약직 조합원 정규직화, 무노동무임금 철폐 등 완승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아울렛이 조직되었고 이후 아울렛은 이랜드 노조의 주력이 되었다. 하지만 노조는 소수노조의 한계 속에서 사무전문직 중심으로 진행된 98년 정리해고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3. 비정규직 부곡분회의 결성과 파업 돌입
노조가 99년 10월부터 비정규직 분회 결성을 염두에 두고 비밀리에 조합원 가입자 수를 늘리면서 예비 간부 후보와 조합원들에 대한 교육을 전임자들이 진행해오던 중, 이랜드 자본은 구조조정 전략 속에서 점차로 확충되어 온 불법파견 노동자들(이때 이미 부곡물류센터 근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과 함께 부곡물류센터에서 근무하던 직영 비정규직 노동자 전원(비공개 조합원 포함)을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도급 업체로 2000년 3월 1일부로 이전하려 하였고, 이에 대해 현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 거의 전원(50여명)이 노조로 가입하게 되고 2000년 3월 6일 분회 결성식을 갖게 되었다.
부곡분회는 72만원으로의 임금인상 요구를 중심으로 회사와 별도의 실무교섭을 갖게 되었지만, 회사는 비정규직화가 당연하다는 주장 속에서 교섭에 무성의하게 임했다. 결국 교섭은 결렬되었고 노조는 곧바로 쟁의조정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거쳐 파업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조는 2000년 6월 27일 고심 끝에 임시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도급, 용역, 파견 노동자도 조합가입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규약을 개정하여 당시 지역노조에 가입해 있던 부곡물류센터 근무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였다. 노조가 직접채용 요구 쟁취의 어려움을 예상하면서도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된 주요 근거는 기본적인 노동자 단결의 원칙을 지키고자 한 지도부의 의지와 같은 현장에서 동고동락한 부곡분회 조합원들의 동지애가 가장 컸지만, 또 하나의 주요한 근거로는 이미 (주)이랜드가 부곡물류센터 근무 도급 노동자에 대한 노동조합의 불법파견 고발로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 시정권고를 이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회사는 7월 1일부로 도급업체와 계약을 해지하여 도급 노동자 전원을 일방적으로 부당해고하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고 이러한 회사의 탄압에 맞서 이랜드노조에 가입한 불법파견근로 조합원들은 2000년 7월 3일 판매지부 조합원들과 때를 함께 하여 파업에 동참하였다.
4. 투쟁의 성과와 승리의 요인
이랜드 노조의 투쟁은 우선 정규직 노조가 주체가 되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안정 요구를 전면에 내걸고 간접고용된(법적으로 사용자가 다른) 노동자들까지 규약 개정을 통해 포괄하여 직접채용 요구와 정규직화 요구를 쟁취한 최초의 사례였다. 불법파견으로 판정된 조합원 전원(파업 중 퇴사자 제외)이 직접채용되었고 2년 이상 근무한 기존 부곡분회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정규직화되었으며 더 나아가 부곡분회가 있는 물류센터의 아웃소싱시에는 노조와 합의해야 한다는 고용안정 요구까지 쟁취해냈다.
이랜드 노조의 비정규직 철폐 투쟁은 애초부터 단위사업장의 틀을 뛰어넘는 투쟁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동자 단결투쟁의 대의와 원칙을 지켜나가려는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이랜드 투쟁 요구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의미는 사장되었을 것이다. 이랜드 투쟁 지도부도 처음에는 이러한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의미를 정확하고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하물며 조합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던 상황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가열찬 투쟁을 통해 하나로 어우러지고 동지애를 키워나가면서 '노동자는 하나'라는 자각 속에서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이 이랜드 투쟁 승리의 첫 번째 요인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헌신적으로 투쟁에 결합한 연대분회(핵심 연대동지들의 별칭)의 노력은 조합원들에게 이랜드 투쟁의 의미를 실천으로 보여주는 참교육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 파업을 경험하는 조합원들을 구속과 수배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책임지고 이끈 현장 집행간부들의 각고의 노력 또한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이랜드 투쟁 265일은 연대투쟁의 기록이었다. 투쟁사업장이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라도 달려간다는 자세로 투쟁 현장으로부터 연대를 조직해 나갔고 각급 상급단체와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투쟁 지원과 연대 요청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합원들 스스로가 연대 조직을 위해 발로 뛰었고 그 성과는 12. 8. 전산실 점거 투쟁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연대 투쟁이 조직되지 않았다면 이랜드 투쟁은 중도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특히 한통계약직 동지들과의 연대투쟁은 일회적이고 단속적인 품앗이 연대투쟁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과를 낳기도 하였다. 합의 타결된 이후에도 이랜드 조합원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한통계약직 동지들과 전국 순회투쟁에 결합하여 연대투쟁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또한 이랜드 투쟁은 소수노조라는 조직력의 한계로 거의 파업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본의 핵심 거점을 강도높게 직접 타격하는 투쟁 전술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사용주를 압박하여 조직력의 열세를 일정 부분 만회하면서 성과를 쟁취하였다. 이러한 강도 높은 타격투쟁은 최대한의 연대 대오 조직과 사회여론화 투쟁을 병행하면서 이랜드 투쟁에 대한 지지 여론을 조성하는 것과 궤를 함께 하면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정규직 철폐 투쟁 요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단결하여 비타협적 투쟁을 공세적으로 전개함으로써만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랜드 투쟁은 잘 보여주었다.
5. 투쟁의 한계
노조 핵심 집행부의 파업 준비 미비와 비정규직 철폐투쟁에 대한 불명확한 투쟁상과 목표로 인한 혼선은 중요한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준비 미비는 지도력에 대한 불신을 가져 온 핵심적인 요인이 되었으며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투쟁 전망 수립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파업투쟁을 둘러싼 제반 조건이 힘들었던 만큼 파업투쟁 준비도 치밀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질 못했고 파업투쟁 과정에서 미비점을 개선하고 보완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000년 파업투쟁은 총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총과 공권력까지 염두에 둔 투쟁·교섭 전략을 수립해야 했는데 이는 상당 부분 역부족이었다.
결국 노조가 최초로 맞부딪힌 공권력 문제나 파업 장기화는 모든 파업대오의 집단적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했다. 향후에는 어떤 투쟁이든지 사전 철저한 준비와 점검, 그리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염두에 둔 대응책 마련이 절실히 요구된다.
파업 초기 물류 부서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가 성과 없이 무산되었고 파업에 동참한 아울렛 시흥분회 비정규직 조합원들도 투쟁대오를 이탈한 후 퇴사하는가 하면, 파업 기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조합에 가입시키고 조직적으로 하루 파업까지 동참시킨 식품분회 단시간 근무(메이트) 조합원들도 퇴사함으로써 부곡분회 외의 타 사업장에서의 비정규직 조직 확대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상시적인 고용 불안정과 근속의 어려움, 그리고 이랜드 자본의 방해 책동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무산된 것이지만, 노조가 부곡분회 조직화의 경험을 거울 삼아 파업 기간 중 보다 더 치밀하고 신중하게 중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조직하지 못한 문제점도 있었다.
이랜드 투쟁은 처음부터 간접고용 노동자 직접채용 요구를 포괄하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핵심 요구로 하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이라는, 총자본과 총노동의 이해가 맞물려 있는 투쟁이었기 때문에 투쟁 양상이 격화되면서 단위 사업장의 틀을 뛰어넘는 투쟁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연맹을 주축으로 하는 상급단체의 투쟁 지도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맹 지도부는 현실적으로 실질적인 투쟁 구심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과 의지가 부족했다. 그리고 민주노총 또한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차별철폐를 핵심요구로 가지고 있었지만 연맹이 주축이 되어 민주노총 차원의 투쟁으로 견인 발전시키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는 한계를 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랜드 투쟁 과정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는 폭넓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이러한 연대투쟁의 성과를 집중시켜 승리하는 투쟁으로 지도해 나가야 할 연맹과 민주노총은 도리어 연대의 구심이 되지 못하고 측면 지원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리고 이랜드 투쟁을 지원하는 여러 지역과 단위의 지원대책위가 많은 성과를 내왔음에도 이랜드 자본과 공권력에 대해 보다 더 효과적이고 집중적인 대응을 조직해내기 위해 각 지대위를 단일한 틀로 통합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무엇보다 구속되고 투신하고 연행되는 상황에서도 비정규직 철폐투쟁 승리를 위해 몸을 던졌던 많은 동지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랜드 투쟁이 수많은 동지들의 노고를 자양분으로 하여 침체된 노동운동 진영에 작으나마 단결, 연대, 결사투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주었던만큼 이후 전체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유의미한 사례로 계속 남을 수 있도록 분투하리라는 다짐을 새삼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