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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질라라비

서울대병원의 ‘제대로 된 정규직화’, 그곳엔 투쟁의 역사가 있다

이향춘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서울지부 부지부장, 철폐연대 회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일 노동절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노동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이어서 비정규직 비율이 85.6%나 되는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하여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발언이며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과거에도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이 도리어 고용불안과 비정규직을 확대했기 때문에 현장에 어떻게 적용될지 불안했다. 정부는 7월 20일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추진계획”을 ‘관계부처 합동’ 이름으로 발표했다. ‘국민의 생명‧안전과 밀접한 상시‧지속적 업무(연중 9개월 이상 지속)는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발표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구체적으로 정규직 전환 시점과 방법에 대해 질문을 쏟아내며 기대와 우려를 보이는 등 현장은 매우 술렁거렸다.

 

그들의 기회와 공정

그러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구체적인 실상이 드러나면서 희망고문이 되었다. 예산증액은 없으니 각자 알아서 하고, 무기계약직도 정규직이라고 인정하고, 제한 경쟁을 통한 공채 등을 명시했다. 그러자 인천공항공사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시 ‘공정 경쟁, 공개 채용’ 조건을 내세웠다. ‘정의, 공정, 기회의 평등’이라는 단어가 현대판 신분제를 굳건하게 지키려는 자들의 원칙이 되고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공사 정직원이 되려면 7년 간 상시‧지속적으로 문제없이 일한 경력보다 ‘시험’이라는 절차를 밟으라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조의 요구인 채용 시 부적격자만 걸러내는 절차는 ‘정의롭지 않은 요구’이고 ‘무임승차’라고 했다. 지난 8월 전교조의 ‘기간제 교원 정규직화 반대’ 결정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일부 공공기관 정규직은 SNS에, 사내 게시판에, 심지어는 ‘노동조합 탈퇴’ 협박으로 노동조합 집행부에 정규직화 반대를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노조 집행부가 불신임으로 날아가고 사측은 정부 정책이라 흉내라도 내려는데 교섭이 진행 안 되는 어이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1-2점 차이로 공채에 떨어지고 좁은 바늘구멍을 만들어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 대해서, ‘공포’와 ‘궁핍’ 속에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그동안 침묵했던 자들이 ‘정의’와 ‘평등’을 너무 쉽게 뱉어내고 있다.

 

자본과 정부는 이러한 노-노 갈등을 꽃놀이패 삼아 여유를 부리고, 보수언론은 갈등을 재빠르게 극대화 시켰다. 노동시장화 정책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리된 노동자들 사이에서, 오래된 차별과 갈등은 송곳이 되어 드러났고 자본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혐오하며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단결과 연대, 투쟁이라는 노동운동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노동자는 하나’라며 함께 외치던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현장에서 블랙홀이 되어 무색해졌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덕담을 주고받아야 하는 세밑, 2017년 12월은 노동자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잔혹하고 매서운 겨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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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8. 1차 파업출정식 [출처: 의료연대서울지부]

 

서울대병원노동조합 정규직화 투쟁 과정

서울대병원노동조합은 2017년 한 차례의 경고파업과 무기한 파업에 돌입한 지 이틀 만에 비정규직 581명 중 무기계약직 298명을 12월 31일까지 정규직으로 먼저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기간제 노동자 283명 중 정부 가이드라인 발표 당시 6개월 이상 근무자는 2017년 내에 무기계약직 전환, 6개월 미만자는 일정한 절차(공개채용이 아닌 내부 절차)를 거쳐 2018년 1/4분기 내에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2019년 1/4분기까지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간접고용 비정규직은 필수업무를 수행하는 경우 정규직으로 고용승계 하되, 정규직 전환방식은 노사전문가회의를 구성하여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서울대병원노동조합은 ‘탈락자 없는 비정규직의 전원 정규직화’를 목표로 파업투쟁을 했지만 온전하게 쟁취하지는 못했다. 6개월 미만 근무자는 일정한 절차를 거치게 되어 소수의 탈락자는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비정규직 제로화’를 내세웠지만 많은 예외조항을 두며 사측이 빠져 나갈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열어두어 합의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정규직 전환에 대한 다른 공공기관의 모범적인 합의는커녕 ‘제한 경쟁’, ‘정규직과 동일한 공채 방식’의 노사합의안들이 번번이 서울대병원노동조합의 투쟁을 발목 잡았다. 무엇보다도 타 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들의 거센 저항과 반대가 수시로 언론에 노출되면서 사측은 노골적으로 노동계를 폄하하고 비아냥거렸다.

잘못된 합의를 해서 다른 사업장에 악영향을 주고 정규직 전환 기준을 제대로 세우지 못할까봐 서울대병원파업대책본부는 며칠 동안 서로 날 선 토론을 했다. ‘단 한 명의 해고자가 발생하지 않는 전원 정규직화 쟁취 원칙에서 내부 공채를 통한 일부 탈락자의 발생은 불가피하다, 분만과 병가·휴직 대체 비상시업무 기간제 노동자가 최근 입사한 상시업무 비정규직보다 실제로는 장기간 근무했기에 오히려 그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업무에 부적격한 비정규직을 거르지 않고 공채도 없이 무조건 채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 정서도 반영해야 한다, 탈락자가 생길 수 있는 합의를 하는 것은 민주노조의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에 차라리 비정규직 관련한 합의를 아예 하지 말자’ 등 매우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병원은 노사합의가 되지 않으면 연말에 일방적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이미 발표한 상태였다. 대량의 해고자가 발생하는 끔찍한 연말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박근혜 낙하산이자 적폐인 서창석 병원장 퇴진 투쟁으로 임단협이 늦어지면서 12월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부서별 간담회와 비정규직 대상 간담회, 전 조합원 간담회를 여러 차례 진행하며 정부 정책의 허구성과 왜곡된 사실을 알려내면서, 조합원들과 토론하며 함께 투쟁을 만들어 갔다. 이전부터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을 해온 과정이 있었기에 조합원들이 정규직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과 시간은 필요했고 촉박했다. 그래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불안정한 노동은 누구나 알고 있었기에 매서운 찬바람과 추위를 뚫고 대학로로, 여의도로, 청와대로 거리를 돌며 정규직화 쟁취를 요구하고 파업투쟁을 했다.

다른 공공부문 노동조합처럼 서울대병원 정규직 노동자들도 처음에는 반발이 있었다. 안정된 직장과 연봉을 위해 고시촌에 청춘을 반납하고,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든 취업 과정을 거친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그럼에도 무노동 무임금을 감당하면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한 파업까지 할 수 있었던 힘은 지나온 15년의 투쟁 경험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함께 만들어가야 가능한 투쟁

서울대병원은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를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활동과 투쟁을 통해 실천해 왔다. 처음에는 직접고용·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3년, 서울대병원이 무료간병인 소개소를 일방적으로 폐쇄하여 특수고용 노동자인 간병노동자를 최초로 조직했고, 고용승계 투쟁을 8개월 동안이나 했다. 병원은 사용자성을 부정하며 교섭은커녕 간병노동자의 병원 출입을 막았고, 권리 쟁취를 위한 기본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폭력으로 맞섰다. 정규직 노조가 투쟁할 때는 간부와 조합원 들이 다치지 않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면서 대응했는데, 간병노동자에게는 180도 다르게 대응했다. 병원의 이중적인 태도는 이후 청소노동자, 시설노동자 등 비정규직 투쟁 시에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국가인권위위원회와 노동부 점거 등 투쟁은 외부로까지 확대되었지만 병원의 버티기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끝도 보이지 않았다. 조합비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며 싸웠지만, 정규직에 비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장기투쟁으로 이어지자 정규직 조합원들의 불만은 컸다. 또한 현장에서 간병노동자와 업무적으로 부딪히던 사례까지 토로하면서 탈퇴하겠다고 노동조합을 찾아 온 조합원도 있었다. 욕도 먹고 항의도 받았지만 간부들은 현장 곳곳을 다니면서 부서별 간담회, 연대집회 조직을 하며 설득하고 이해를 구했다. 처음엔 불만을 가지던 조합원들이 점차적으로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권 불인정에 대해 문제라고 인식하면서 함께 분노하며 연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간병노동자들은 긴 투쟁을 끝내고 현장으로 돌아왔고 이후 돌봄노동자 조직의 근간이 되었다.

 

2007년 정부는 소위 ‘비정규직 보호법’을 발표하며 2년 이내에 언제든지 해고가 가능한 길을 열어 놓았고 비정규직의 고용은 더욱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계약이 종료되어도 무리 없이 계약을 연장하던 서울대병원도 3개월, 6개월, 심지어는 1개월 단위로 계약을 하는가 하면 그 과정에서 평가를 하며 부적격자라는 이유로, 계약 만료를 이유로 재계약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해고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많은 비정규직이 해고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정규직 임금 인상을 양보하여 비정규직 채용을 늘리자는 일부 노동계와 사회단체의 입장도 있었지만, 그런 방식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과도한 임금과 복지 때문에 비정규직이 확대되었다는 자본과 정부의 입장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서울대병원노동조합은 별도직군이 아닌 온전한 정규직, 차별 없는 비정규직 처우를 위해서 파업투쟁으로 정면 돌파했다. ‘비정규노동자모임’을 통해 이랜드-뉴코아 동지들의 투쟁과 정부와 병원의 동향을 알려내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밀스럽게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시작했고 투쟁의 의지를 모아갔다. 그 중 일부는 해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파업에 참석하는가 하면 병원이 파업기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체인력으로 투입하려고 하자 이를 거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장투쟁도 있었다. 결국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가 아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하는 투쟁으로 400여 명이 온전히 정규직이 됐다. ‘중규직’이나 ‘별도직군’이 아닌 온전한 정규직화, 2년 미만 비정규직도 본인 의사에 반해 계약해지를 할 수 없으며 단체협약도 적용받을 수 있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서울대병원노동조합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비정규직 대책위원회’를 통해 현장 곳곳에 있는 비정규직들의 처우와 실태를 조사했다. 수개월, 수년 동안 소식지 발행과 현장 순회를 통해 간접고용인 시설‧식당‧청소노동자를 조직하며 지역지부인 의료연대서울지부를 만들었다. 노동조합비를 일원화했고, 대의원대회와 조합원 행사를 함께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원‧하청 공동투쟁을 통해 서울대병원을 압박하여 업체변경 시 고용 및 단체협약 승계를 명문화했고 현장의 크고 작은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다. 이후 네 차례 더 서울대병원 직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합의도 했다. 이렇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만들어 온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다른 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놓고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등의 일들이 서울대병원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직종과 나이, 학력이 그 어느 사업장보다 매우 광범위한 곳이 병원 사업장이다. 또한 수십 개의 직종이 협업을 해야만 환자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소노동자는 깨끗한 환경으로 감염을 예방하고, 시설노동자가 전기와 난방을 제대로 작동시켜야 혈액과 의약품의 적정 온도가 유지되고 환자에게 공급되는 산소와 기계가 잘 돌아갈 수 있다. 간병노동자가 24시간 환자를 돌봐주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나마 맘 편하게 직장을 다닐 수 있다. 각자의 업무가 다를 수는 있지만 업무의 중요도가 저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게 노동조합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많은 노동조합이 그동안 비정규직 정규직화 및 차별 철폐를 외쳤지만 집행부와 현장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소통하며 투쟁해 왔는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설득하고 토론하고 함께하고자 하는 노력을 과연 얼마만큼 해왔고 정규직화 쟁취를 위해 현장 조합원들과 무엇을 준비해왔는지 성찰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해보지 않은 투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두려움, 답답함이 현장 조합원들을 지금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벌써부터 연세·고려·홍익대는 인상된 최저임금 시급(7,530원)을 주기 아까워 비용 절감을 위해 청소노동자들 자리를 ‘알바’로 대체하고, ‘부의 상징’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민들은 월 3,570원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경비원 94명 전원을 해고했다.

서울대병원도 1,000여 명의 간접고용 노동자가 있다. 직접고용 노동자들의 투쟁도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투쟁은 더 험난할 수 있다. 자본과 정권이 어떤 프레임으로 노동자들을 갈라치기 하며 공격해올까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런 저런 예외조항을 두고 노-노 갈등을 유발하여 또다시 노동계를 시험대에 올려 놓을 수도 있다. 노동자 내부가 더 갈라져 바닥만 볼 것인지, 바닥을 치고 올라올 것인지, 노동자를 위한(?) 정부의 퍼포먼스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말 것인지 여부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달려 있다. 그 어려운 일을 또다시 거뜬히 해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정부와 자본은 우리가 힘들고 지쳐 있다고 해서 투쟁의 과제를 결코 뒤로 미루거나 유보하지 않는다. 조합원들은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행동한다. 끊임없이 현장을 다니며 함께하자고 하면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길에 나선다. 서울대병원노동조합은 지금까지 30년을 그렇게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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