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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서 지역에서 철폐연대 동지들은

 

노무사에서 변호사로 다시 시작. 그 출발선에서 인사드립니다

문은영 (‘법률사무소 노동과삶’ 변호사, 철폐연대 회원)

 

안녕하세요. 문은영 노무사 아니, 변호사입니다.^^ 아직 제 이름 뒤에 ‘변호사’라는 직함이 붙는 것이 어색하기만 한 진짜 초짜 변호사입니다. 올해 4월, 제7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현재 ‘법률사무소 노동과삶’에서 실무수습 중에 있습니다.

제가 2009년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후 철폐연대 법률위원회 회원으로 잠시 활동(로스쿨 진학으로 활동을 쉬게 되었지요.)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수험생활과 출산, 육아를 병행한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니 제가 얼마나 무모한 도전을 했는지, 그것 때문에 제 스스로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다시 반성하게 되었습니다.ㅠ.ㅠ 수험생활 중간에 후회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돌아갈 수 없었고 예상보다(?) 수험생활이 빨리 끝나서 그나마 천만다행, 해피엔딩으로 입학한 지 4년 만에 마무리를 했습니다.

 

4년차 노무사, 로스쿨 도전, 출산, 육아 그리고 수험생활

 

제가 도대체 왜 로스쿨을 가서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그 고생을 사서했을까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데 제가 딱 그랬습니다. 알면 못했을 겁니다. 일을 잘하고 싶은 저의 욕심과 앞으로 닥칠 일을 예상하지 않고 일을 벌이는 무모함 때문이었습니다.

 

노무사로 일한 지 4년째 되던 해, 노무사로서 일을 어느 정도 익히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할 무렵, 로스쿨 진학이란 새로운 도전을 했습니다. 어떤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 시기의 제 자신을 돌아보면, 실무적으로는 사건을 좀 할 줄 알아서 잘하고 싶은 욕심은 커지는데 동시에 법률에 대한 이해와 해석 능력은 부족해서 일을 하는데 급격히 자신감을 잃던, 소위 말하는 슬럼프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반올림 지원 노무사를 하면서 담당했던 희귀질환 산재사건과 삼성에버랜드 노동조합(현 금속노조 삼성지회) 부당징계 및 부당노동행위 사건이 근로복지공단, 산재재심사위원회, 노동위원회에서 대부분 인정받지 못하면서 제 자신에 대한 능력의 한계와 함께 제도의 벽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계속 법으로 먹고 살려면 더 늦기 전에 법률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 소송단계까지 가서 끝까지 법적으로 다퉈서 해결해보고 싶은 오기, 의뢰인에 대한 책임감 등 여러 가지 생각과 함께 그 당시 슬럼프의 돌파구로 택한 것이 로스쿨 진학이었습니다.

 

당시 결혼 3년차였고 아이가 없던 시절, 주말부부로 몇 년간 지내야 하고 학비며 수험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 남편은 ‘네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라며 별 반대 없이 지원해주었습니다(물론 그 다음 있을 어려움을 역시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 나이 서른일곱 살, 그런데 대학원에 입학한 해에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습니다. 임신한 상태에서 공부는 제대로 못한 채 로스쿨 1학년을 겨우 마치고 겨울에 딸을 출산했습니다. 남은 2년의 수험생활을 보내기 위해 1년은 아이를 키우고 다시 복학하기로 하고 출산 후 1년간은 육아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출산, 육아를 경험하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아이는 너무 예쁘나 쪽잠을 자면서 모유수유를 하고 잠시도 나만의 시간이 없이 아이에게 매달려야 하는 육아는 정말 정말 정말 많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많은 엄마, 아빠 들이 이렇게 어렵게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왔고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도 놀랍고 대단해보였습니다. 저는 남편과 육아와 가사 일을 같이 했기 때문에 첫돌까지 그 힘든 시기를 어렵지 않게 보낼 수 있었고 집안일에 서툰 제가 아이 이유식도 직접 만들고 아이 천기저귀도 빨면서 제법 육아내공이 조금 쌓이락말락하자 어느새 1년이 지나 복학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아이와 어떻게 떨어져 살지 걱정되었지만 무모하게 시작한 수험생활을 어쨌든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꽉 물고 복학했지요.

 

로스쿨 2학년부터 3학년, 변호사시험 마칠 때가지 그 2년의 세월은 정말 숨가쁘게 돌아갔습니다. 제가 복학해서 춘천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댁 형님(남편의 형수)이 아이 육아를 맡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제가 춘천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하는 동안 서울에서는 아이 아빠가 아침에 아이와 함께 형님네 아이를 데려다 놓고 아침 먹고 출근하면 형님이 기저귀 찬 아이를 먹이고 씻겨서 어린이집 보내고, 아이가 어린이집 끝나면 데려와서 돌봐주시고, 아이 아빠는 퇴근하여 저녁 먹고 아이를 데려와서 씻기고 재우고 했습니다. 저는 주말에 서울에 가서 육아를 해야 해서 주중에는 쉬지 않고 공부를 하고, 그런 생활을 2년간 반복했습니다(로스쿨 3학년 때는 거의 격주나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두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한테는 안 좋은 건 알지만 아이가 자고 있는 월요일 새벽에 나오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끔 일요일에 학교에 가야할 때 딸아이한테 엄마 학교 다녀온다고 인사하면 엄마 가지 말라고 엉엉 울면서 매달리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두고 나와서 춘천 가는 기차 안에서 내내 울면서 학교를 갔던 기억이 생생하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울컥합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변호사가 뭐라고 이러고 있나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후회도 하고 그만두고 싶은 맘도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흔들릴 때마다 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믿어준 가족들이 있어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2년 동안 공부하는 엄마랑 떨어져서 지낸 딸이 정말 대견하게 잘 버텨주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줘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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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당일, 딸에게 학사모를 씌워주었네요. 입학할 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졸업할 때 이만큼 자랐네요. 건강하게 자라준 딸 덕분에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출처: 필자]

 

로스쿨 3학년. 변호사시험 모의고사로 대체되는 졸업시험과 변호사 본시험 때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제가 공부한다고 쉴 틈 없이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는 남편, 힘든 내색 안 하시고 친자식처럼 조카를 돌봐주시는 형님, 엄마 시험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딸을 생각하며 ‘졸업시험도 무사히 통과하고 변시도 한 번에 통과해야 한다, 재시는 없다’는 각오를 했지만 공부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1학년은 임신기간이라고 느슨하게 보내고 1년간 육아를 하면서 휴학한 뒤 리셋된 상태에서 복학하였고, 매주 주말이면 육아를 위해 서울을 왔다갔다하면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공부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특히 민사법이 흔들리면서 모의고사 시험점수를 보니 진짜 이러다가 시험에 떨어질 수 있겠다 싶어 그 스트레스는 엄청났습니다.

나이를 속일 수 없었습니다. 마흔이 되니 하루에 열다섯 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이었습니다. 기출문제를 풀어보면 논점을 반도 못 찾았고, 모르는 논점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서술형 답안지를 시간 내 작성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첫 모의고사를 보고 나서 통과를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학교 운동장에서 엉엉 울면서 남편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나이 마흔 살에 시험 못 봤다고 엉엉 우는 바보가 될 줄 몰랐죠.ㅠ.ㅠ 다행히 커트라인 간신히 넘겨서 첫 졸업시험에 통과했습니다. 그래도 본시험에 통과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점수 때문에 본시험에 떨어질까봐, 그러면 다들 너무 힘들어질까봐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다시 1년 동안 시험공부를 하는 것은 저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저 말고 가족들이 힘들 것을 생각하면 정말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으니까요.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결국 변호사시험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밥을 먹기 힘들 정도로 위염이 악화되어 금쪽같은 시간에 병원을 두 번이나 다녀올 정도였습니다. 시험은 무사히 치렀지만 그 때 상한 위가 지금도 조금만 무리하면 쉽게 탈이 나곤 합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에는 심리적 압박이 너무 컸지만 이런 부담감 덕분에 시험 준비가 너무도 부족한 제가 간신히 합격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 공부하면서 정말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전 평균적인 지능에 무언가를 익히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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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당일. 공부했던 법학관 앞에서 딸과 함께! [출처: 필자]

 

변호사가 되어 다시 선 출발선, 현장에서 뵙겠습니다.

 

수험생활은 누구에게나 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의 이야기라서 제 이야기도 새로울 것 없고 재미는 더더욱 없습니다. 저의 경우는 수험기간에 출산과 육아를 병행해서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한 경우라 무모함까지 더해졌죠.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해서 취득한 변호사 자격증이라서 그런지, 정말 ‘의미 있게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이제 변호사로서 다시 출발선에 선 저는, 나이 사십 대, 한 가정을 이룬, 딸아이 엄마이다 보니 기존에 하던 여러 노동사건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육아와 가사노동, 경력단절 등 여성들의 노동현실과 관련된 문제에도 관심이 많이 갑니다. 그리고 미투로 대변되는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의 문제, 우리 딸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해 작은 무엇이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이쪽 분야도 하나씩 알아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로스쿨에 도전해야겠다고 했을 때 부족했다고 생각했던 점, 법률적 이해와 해석이 그때보다 나아진 것 같긴 한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작 제게 부족하고 필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과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과 오기였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은 노력을 하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찌어찌하여 취득한 변호사 자격증, 좀 더 다양한 기능이 추가된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기까지 그 매뉴얼을 익히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움직이는 현장에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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