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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바닥 일기

 

비정규직 서산시, 그리고 동희오토 노동자들의 이야기

 

심인호 • 전국금속노동조합 충남지부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지회장

 

 

 

완성차 최초의 ‘100% 비정규직 공장’과 비정규직 서산시

 

2005년 동희오토에 입사하고 나서야 비정규직의 현실을 체감했다. 전에 부천 오정동의 영세한 공장에서 일을 할 때까지만 해도 비정규직은 특수한 경우였다. 물론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는 했지만, 벼룩시장 구인란이나 전봇대에 붙어 있는 사원 모집 전단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부천 산업단지 대부분의 공장에서 이주노동자, 고등학교 취업생, 병역특례 인원이 많았지만 그 고용형태는 대개 정규직이었다. 파견업체를 통한 고용은 병가, 출산 휴가 등의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되었다. 그런데 동희오토, 그리고 충남 서산시는 2005년 당시에도 비정규직 천지였다. 지역 대부분의 공장들이 현대그룹의 계열사나 그 납품업체였지만 사내하청, 소사장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이런 고용형태가 당연한 것으로 둔갑된 현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2004년 1월, 모닝 1호차가 생산되고 나서 몇 개 업체에서의 자발적인 잔업거부 등 현장투쟁이 이어졌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각성된 노동자들은 2005년 봄, 민주노총 산하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자 페이퍼 노조를 통한 불법노조 공세, 계약해지, 징계해고, 업체 폐업을 통한 칼바람이 자행되었다. 이에 맞서 2008년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과 2009년 동희오토 공장과 지역에서의 투쟁이 이어졌다. 결국 ‘진짜 사장을 찾아서’ 동희오토 해고노동자들은 2010년 현대기아차그룹 서울 양재동 본사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투쟁을 이어나가던 7인의 전원 복직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활동은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과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현장 조직화 → 지역에서의 활동 → 원청에 대한 책임 묻기

 

2005년부터 이어진 민주노조의 조합원들은 사측에 의해 2009년 초 전원 해고되었다. 현장에서 민주노조의 싹을 아예 잘라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의 핵심 목표는 “현장 조직화를 통한 복직”이었다. 이미 2008년부터 해고된 동지들이 공장 안팎에서 투쟁을 하고 있었고, 우리들에 대한 지지는 여전했다. 매일 출근투쟁을 하고, 야간에 몰래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식당 선전전을 진행했다. 중식시간에는 대형 스피커와 앰프, 발전기를 메고 공장 뒷산에 올라서 선무방송도 진행했다.

 

물론, 지역에서의 다양한 활동도 병행했다. 지역 일간지에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유인물을 배포하고, 서산 시내에서 선전전과 문화제도 지속했다. 그러는 동안 동희오토 현장에서는 시급이 오르고 연말 성과급이 지급되고, 소수이긴 해도 인원충원이 진행되었다. 일정 정도의 유화책이 시작되었고, 해고자들의 공장 밖 투쟁이 1년 넘게 지속되면서 서서히 현장과 해고자들의 분리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은 조금씩 ‘현장에서 지역으로’ 문제의식을 확장시키게 된다. 동희오토 현장에서의 영향력 감소 및 거리감 증대라는 투쟁의 하강국면이 전술 수정의 출발이 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활동을 통해 우리들의 고민이 확장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들은 ①출근 선전전 등 현장과의 연결고리를 철저하게 유지하는 것 ②지역 전체 비정규직의 문제로, 지역의 힘으로 동희오토를 압박해 들어가는 것 ③복직을 통한 현장 조직화를 결정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동희오토와 서산시의 비정규직 문제는 충남지역 전체의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그 성과로 서산시와 일정 정도 합의를 하고, 우리는 드디어 현대기아차그룹 본사로 향하게 된다.

 

동희오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나의 노동력을 통해서 이윤을 가져가는 이가 원청이라는 것 말이다. 그렇지만 현대기아차그룹에게, 아니 동희오토 원청에게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시만 해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우리가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고, 더욱이 우리들의 복직을 위해서라도 현대기아차 본사를 타격하는 것은 절실했다.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해 동희오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제 사용자는 현대기아차그룹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했다. 하청업체와 동희오토는 아무런 실질적 권한이 없음을, 결국 ‘진짜사장’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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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7.12.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그룹 본사 앞에서 “진짜사장 정몽구 회장이 교섭에 나서라!”는 요구를 걸고 농성 중인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의 모습.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동희오토 복직 후의 활동과 고민들

 

동희오토에 복직하면서 우리는 많은 고민을 했다. 과연 동희오토 현장에서 민주노조를 굳건히 세우고, 그 힘으로 지역 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해낼 수 있을지 말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투쟁했던 7명은 일단 복직을 하고, 이후의 개인적인 전망은 열어 놓기로 했다. 그러나 복직을 한 후, 현장은 만만치가 않았다. 아니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그 넓은 공장에 흩어진 우리들을 옥죄어 왔다. 우리가 3년 넘도록 공장 밖에서 복직 투쟁을 지속하는 동안, 사측은 공장 안을 물샐틈없이 조직해 놓았던 것이다.

 

현장은 중국동포 이주 노동자들로 가득했고, 그분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당연했다. 당시 중국동포 이주노동자들은 영주권을 따는 것이 절실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업체 사장의 추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해고 전에는 조립공장에서 일했는데, 복직을 하면서부터 차체 공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업체에서는 지역 건달 비슷한 청년들을 몇몇 미리 박아 놓고 여러 사태를 대비해 놓기도 했다. 내가 일하는 공정의 주변에는 중국동포 동료들 밖에 없었고, 그들을 통한 감시와 퇴근 후에는 원하청 관리자들의 미행이 2년 동안 지속되었다. 동희오토 전체적으로는 구사대 역할을 하는 ‘자사모’(자동차를 사랑하는 모임)를 만들어서 업체 핵심들을 관리하고 있었고, 절대 다수노조인 어용노조를 통해 현장을 통제했다.

 

현장 노동자들은 우리들과 이야기만 해도 면담을 통해 협박을 받았다. 내 경우에는 밖에서 식사를 같이 한 중국동포 동료가 협박에 못 이겨 일주일 후 퇴사하는 것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와 주먹다짐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당하면서, 현장 조직화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어용노조의 임단협 기간이나 현안 문제가 있을 때, 현장에서 출퇴근 선전전 등을 꾸준히 전개했다. 그러다가 같이 일하던 조립공장의 중국동포 동료가 뇌출혈로 쓰려졌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뇌의 절반을 잘라 내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이 사건을 대응하면서 우리들은 노동안전의 문제가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고, 실제로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여러 활동을 전개하면서, 우리들은 현장만이 아니라 지역에서의 활동을 병행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현장에서의 조직화가 요원하다는 이유로 남아 있는 선택지가 지역 활동이었다는 맥락은 전혀 아니다. 이러저러한 연고로 묶인 지역의 특성이 있고,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다. 현장에서 만남조차 쉽지 않은 조건에서 그런 네트워크를 통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직서열로 묶여 있고 자동차 산업단지로 묶여 있는 서산의 조건에서 공단 전체를 바라보고 우리 현장의 문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행서모를 통한 지역 운동의 모색

 

노동안전, 지역정치와 환경문제 등의 다양한 전망을 가지고 서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과 이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에서 만난 몇몇 동지들과 <행복한 서산을 꿈꾸는 노동자 모임>(이하 ‘행서모)’을 결성했다. 이제 동희오토 현장은 나와 사무장 둘뿐이었지만, 지역에서 활동 중인 동지들과 함께 다양한 고민과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행서모는 지역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문제들에서 전망을 찾아보려 했다. 그래서 지역 통근버스가 정차하는 주요 길목에 유인물이나 현수막을 게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선전전을 전개했다.

 

몇몇 동지는 지역 여성모임을 조직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3.8여성의 날 행사를 서산 지역에서 꾸준히 진행했다. 그리고 노동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지들은 충남서북부 노동건강인권센터 ‘새움터’를 만들어 왕성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작년에는 지역의 현대 파워텍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하는 일이 있었고, 지역과 함께 투쟁해서 복직을 이루어 냈다. 그 동지들과 행서모 회원들은 현재 ‘세종충남 희망노동조합’ 설립의 주축으로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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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11. ‘동희오토 총고용 보장 지부교섭단 선전전’ 모습. [출처: 금속노조 충남지부]

 

동희오토에서도 작년에 코로나19로 인한 물량감소를 핑계 삼아 무급휴직이 시도되었고, 몇 개 업체에서 해고가 자행되었다.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와 지역의 투쟁으로 무급휴직은 막아냈지만, 해고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해고된 분들 중에서 15명이 우리 지회와 연결이 되었고, 그분들과 함께 ‘불법파견 소송’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 지회 2명과 함께 총 17명이 불파 소송에 들어간 이유는 해고노동자들의 복직과 함께 현장에서의 조직화를 다시 한번 시도하기 위함이다. 법률적인 문제로 원청 사용자성 문제가 제한될 것이라는 우려를 익히 알고 있지만, 지회는 이번 불파 소송을 현장 재결집의 계기로 바라보며 접근하고 있다. 현장의 조건상 1차 판결을 바라보면서 다양한 준비를 할 것이고, 현장을 돌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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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1. <환경파괴시설백지화연대>가 주최한 ‘서산시민 총궐기 대회’에 참가한 필자와 지역 활동가들 모습. [출처: ‘행복한 서산을 꿈꾸는 노동자 모임’ 페이스북 페이지]

 

지역운동은 여전히 암중모색 중

 

행서모 활동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다양한 워킹그룹을 만들어서 관심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고, 이를 행서모 전체 회의를 통해서 교류하는 열린 조직으로 활동 중이다. 회의 진행도 회원 각자가 돌아가면서 분담하고, 각자의 재능과 관심을 부담 없이 나누고자 한다. 물론 회원 확장이 좀처럼 되지 않는 문제가 있고, 지금까지의 활동이 몇몇 분야로 고착화되는 경향 또한 고민스럽다. 올해 하반기 정도에는 진지한 토론을 통해 이후 전망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지역에 행서모가 존재함으로써 서산지역의 활동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서산에서는 세월호와 박근혜 퇴진 투쟁이 상당히 활력 있게 진행되었다. 중소도시라는 규모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중요 국면에서는 나름대로 내실 있게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행서모가 지역 운동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자부한다.

 

김용균 투쟁이 지역에서 힘차게 진행된 것도 지역 노동조합과 민주노총 세종충남본부의 끈기 있는 활동과 더불어 행서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지역 사안이 있을 때, 발 빠르게 지역 전체로 상황과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즉각적인 활동 제안들이 행서모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행서모가 활동을 시작하고 몇 년 지나서는 이런 고민도 생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활동을 하고 싶어도 조금 버거울 경우 매번 행서모에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한편 고민스럽기도 하지만, 부쩍 성장한 행서모의 역량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전히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올바른 지역 운동의 방향이 무엇일지 아직까지 모호하고, 핵심적인 고민으로 삼고 있는 서산지역의 비정규직 문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흐지부지된 것 역시 적지 않다. 여러 동지들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풀어낼 문제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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