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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폐연대 책 만들기’의 즐거움

안명희 (철폐연대 비상임집행위원)

 

 

1 [출처 필자].jpg

 

 

5월 집행위원회가 있던 날, 상임/비상임 집행위원 동지들은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어김없이 책상 위에 늘어놓은 10개의 표지 시안을 검토했고, 마음에 드는 2개의 표지에 스티커를 붙였다. 이날 집행위원 동지들이 저마다 뽑은 표지 시안 중에 과연 어떤 것이 책의 표지로 확정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인쇄가 들어가기 직전까지 출판사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최고의 표지를 뽑기 위해 애를 쓸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완벽하진 않아도 철폐연대의 책이 어떤 모양새를 띠고 서점에 깔릴지를 그려볼 수 있었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지 한참이라 책을 쓴 동지들조차도 가물가물해진 터였는데, 제목을 정하고 표지 시안을 검토하면서 새삼 책에 대한 기대도 생겼다. 특히나 이 책 작업에 함께하지 않았던 동지들과도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나누었다는 게 좋았는데, 어쩜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날 집행위원회에 참석했던 동지들 모두가 철폐연대의 다음 책인 ‘노동 교과서’의 집필자들이었으니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지난 2011년,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에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인권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주는 ‘세계인권선언’처럼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보자고 한 것이다. 이 사회의 가치 기준은 자본의 이윤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여야 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가져야 할 권리는 무엇인지, 그 권리는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정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현장에서 거리에서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필요한지를 이야기했다. 전문가 몇 사람이 모여 책상 앞에서 뚝딱 몇몇 개의 조항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고된 일터에서 투쟁하는 거리에서 노동자들이 몸으로 느끼고 절절하게 말해왔던 것들을 담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래 걸리더라도 아래에서부터 권리조항을 만들어가자고 한 것이다. 사회적 광장을 열기 위해 매주 금요일 서울 도심에서 촛불문화제를 개최했고, ‘불만집담회’나 ‘비정규직 노동자 소리질러’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2년이 흘러 2013년, 마침내 비정규직 사회헌장은 만들어졌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오늘 우리는 더 이상 침해될 수 없는 노동자의 권리를 선언한다.

더 많은 착취를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없애려는 자본의 욕망을 부추기는 비정규직 체제로 인해 모든 노동자는 불행하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차별과 고용 불안으로 고통받는 노동자, 해고되어서 이전의 관계로부터 강제로 단절되어버린 노동자, 일자리를 구하면서 불안정한 노동을 반복하는 노동자,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빼앗겨버린 이주노동자, 그리고 영세한 자본 구조 때문에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영세사업장 노동자, 이 모든 불안정 노동자들의 삶은 점차로 힘들어진다. 정규직이라고 하더라도 불안정한 노동이 확산되는 현실에서는 계속 해고 위협과 노동조건의 하락 압박,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경쟁으로 인해서 마찬가지로 불안하고 힘들다.

경쟁으로 관계는 파괴되고, 차별로 노동자의 자부심은 무너지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인간 존엄성이 훼손된다. 이런 현실을 변화시키려고 나서는 순간 ‘계약 해지’라는 이름으로 해고되고 생존의 위협에 시달린다.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하거나 침묵한다. 이런 침묵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무너져갔다.

비정규직 체제 안에서 우리가 노동자의 권리를 선언하는 것은 이윤보다 소중한 노동의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일하는 이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선언함으로써, 큰 힘을 갖고 있지만 침묵과 순응으로 비정규직 체제를 용인해왔던 우리의 비겁을 벗어버리고자 한다. 자신만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서며 정작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오히려 침묵을 강요하는 이들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노동자의 권리는 스스로의 투쟁으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자의 길을 연 전태일 열사의 정신과, 죽음의 길 끝에서도 비정규직 철폐의 의지를 놓지 않았던 비정규직 열사들의 의지를 따르겠다는 선언이다.

오늘 우리가 선언하는 안정된 노동의 권리, 자신의 노동조건을 스스로 지키고 만들어나갈 권리,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유지하고 공동체의 삶을 누릴 권리는 노동자 모두의 권리이며 함부로 침해당할 수 없는 권리이다. 비록 비정규직 체제로 인해 갈라지고 때로는 반목하기도 하지만 모든 노동자는 권리를 향한 도정에서 단결하고 연대할 수 있음을 안다. 일하는 모든 이들이 연대할 수 있다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단지 일부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는 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가 존중되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노동하며, 자율적인 노동과 타인과의 협력을 만드는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1. 안정된 고용은 노동자의 권리이다. 해고에 대한 두려움이 삶을 파괴한다. 계속 일하기를 원한다면 누구라도 계약 해지당하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

2. 차별은 노동자의 존엄을 파괴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직무나 고용 형태, 성별과 국적, 연령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되며, 특정한 성과 연령의 노동자를 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아서도 안 된다.

3. 비정규직 일자리라는 이유로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일의 자율성을 빼앗아 시키는 대로만 일하게 하거나 ‘보조 업무’라고 불리는 일만 하게 하거나 다른 이들의 일을 함부로 떠넘겨서도 안 된다.

4. 진짜 사용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노동자를 고용해서 이윤을 얻으려는 자는 노동자를 직접고용 해야 하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이들은 사용자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5. 권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 모두가 노동자들이다. 특수고용 노동자, 문화예술 노동자, 가사 노동자, 실업자와 구직자, 해고자 모두 노동자로서 자주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할 권리가 있다.

6. 누구나 생활할 만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최저임금이 생활할 만한 임금으로 인상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넘어서는 임금을 받아야 한다.

7. 노동시간에 대한 권리가 있어야 한다. 적정한 휴가와 휴식시간을 누리고,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회사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서 살 수는 없다.

8. 노동자는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가 있다. 유해하고 위험한 업무는 안전장치를 해야 하며, 그 자리에 비정규직을 투입하면 안 된다.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 노동자는 언제라도 작업을 중지할 수 있어야 한다.

9. 건강을 위협할 정도의 장시간 노동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죽음을 부르는 야간 노동과 24시간 노동, 강제 잔업과 특근은 없어져야 한다.

10. 공간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노동자는 업무에 필요한 공간이 있어야 하고, 쉴 공간도 있어야 하며, 밥 먹을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 공간에서 노조 활동도 할 수 있어야 한다.

11. 호칭은 그 노동자에 대한 존중을 보여준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이름을 부르거나 반말을 하거나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된다.

12. 노동자는 노동권에 대해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업무나 고용 등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받고 기업의 노동 통제 구조에 개입하고 바꿀 권리가 있다.

13. 근로기준법과 사회보험은 노동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권리이다. 근로기준법이나 사회보험 적용에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 실업을 당했을 때 실업부조도 제공되어야 한다.

14. 일자리를 구하고자 할 때 공적인 고용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민간 파견업체에 돈을 내지 않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고용안정센터 등 공적인 고용서비스를 확충해야 한다.

15. 고의가 아닌 모든 손실 비용은 사용자가 책임져야 한다. 과적벌금, 손해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함부로 떠넘겨서는 안 된다. 대납 제도도 없어져야 한다.

16. 노동자는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이 제공되어야 한다.

17. 비정규직도 스스로를 대표할 권리가 있다. 노동조건의 향상을 요구하고 권리를 이야기하고 교섭하는 모든 권한은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에게 있다.

18. 노동자들은 위계와 경쟁을 거부하고,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과 단결하고 투쟁하고 연대하고 정치적으로 나설 권리가 있다. 이것은 어떤 이유로도 제한되거나 형사처벌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

2013년 11~12월, 많은 이들이 함께 만든 비정규직 사회헌장을 알려내기 위해 18개의 조항과 관련된 현장의 상황 및 투쟁, 해설을 <참세상>에 펼쳐보였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비정규직 사회헌장을 알고 이를 기준 삼아 노동자의 권리를 말할 수 있도록 기획연재된 글을 책으로 엮어내자고 했다.

2015년, 철폐연대와 비없세 활동가 여섯이 모여 책 만들기를 위한 기획팀을 꾸렸다. 먼저 <참세상> 연재글을 검토했는데, 그대로 엮어 책으로 내기엔 부족한 게 많았다. 당장 원고량이 너무도 부족했다. 소책자를 만들 정도의 분량을 가지고 단행본으로 만들어낼 순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기획해야만 했다.

책의 방향을 설정하고, 글의 구조에 대해 고민했다. 한참의 논의 끝에 사회헌장 조항을 순서대로 나열하지 않고 4개의 장으로 재구성하기로 했다. 1장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2조/8조/9조/10조/11조), 2장에서는 정규직한테는 허락되지만 비정규직한테는 허락되지 않는 권리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1조/3조/13조/17조). 3장에서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려면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4조/5조/14조/15조), 4장에서는 노동자의 삶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아직 법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권리에 대해서 살피기로 했다(6조/7조/12조/16조/18조). 그리고 각 조항마다 현장글과 해설글, 이렇게 각각 2개의 글을 넣기로 했다.

얼추 기획이 끝나자 ‘오월의봄’과 출판계약을 맺었다. 본격적으로 원고를 만들기 위해 현장글을 써줄 동지들을 찾아 원고를 청탁했고, 해설글은 기획팀 여섯이서 나눠 쓰기로 했다. 처음엔 1년이면 충분하겠거니 했는데, 해가 넘어가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박근혜 정권에서 문재인 정권으로 넘어갔다. 출판사에 넘긴 초고를 수정/보충하는 데 또 한참이 걸렸다.

2018년, 비정규직 사회헌장을 만든 것도 사회적으로 널릴 알릴 목적으로 책을 만들자고 한 것도 모두의 기억 속에 사그라져갈 무렵, ‘드디어’ 곧 출간이다. 《모든 노동에 바칩니다 :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이 바로 책 제목이다. 너무도 오래 걸려 이제야 짜~잔 하고 등장하는 게 좀 멋쩍기도 하지만, 오래오래 묵은 숙제를 비로소 끝낸 것 같아 진짜진짜 홀가분한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철폐연대의 다음 책, 그다음 책 만들기

비정규직 사회헌장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난 다음, 2017년 5월 집행위원회 회의 때 ‘노동 교과서’ 만들기에 대한 기획안을 제출했다. 기획의도와 대상독자에 대한 검토가 있었고, 준비팀을 꾸려 사전논의를 시작해보자고 결정했다. 이후 준비팀에서 사전논의한 것을 바탕으로 집행위에서 깊게 논의하기를 몇 차례, 전체 목차와 집필자를 확정 지었다. 계획은 올해 안에 집필을 끝내고 내년에 출간하자는 것인데, 어찌될지 잘 모르겠다. 그저 중간에 어영부영 시간 보내다 포기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내 진짜 소망은 오래 걸리더라도 꾸준하게 철폐연대의 책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서점의 책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노동책이 많지가 않다. 책이 사람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데 얼마간의 영향을 끼친다면, 노동을 잘 알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철폐연대의 내용과 활동은 지금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대중에 알려져야 하고, 그 같은 일을 하는 데 책도 어느 정도는 역할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또 하나, 책 팔아서 얼마나 돈 될까마는, 책 잘 만들어 많이 팔아서 철폐연대 재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만 원짜리 책 한 권 팔면 천 원이 철폐연대로 들어온다. 출판계약 할 때 첫째가 꼭 인세를 받자는 거였다. 이번에 나오는 비정규직 사회헌장 책이 베스트셀러까진 안 되더라도 웬만큼은 팔려서 철폐연대의 살림에도 철폐연대의 책을 내준 출판사의 살림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 동지들에게 바란다. “우리 꼭 제 돈 주고 철폐연대 책 사서 읽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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