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905] 해고자, 무기계약직, 그리고 10년 만의 일반직 / 윤해숙

by 철폐연대 posted May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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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운동을 생각한다

 

해고자, 무기계약직, 그리고 10년 만의 일반직

윤해숙 (KBS계약직협회)

 

KBS는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둔 2009년, 정규직 전환을 회피하기 위하여 420여 명의 연봉계약직에게 퇴사 또는 자회사로 전적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응하지 않은 이들은 일괄적으로 해고했습니다. 회사는 ‘단순 계약해지’라고 주장했지만, 평균 5년, 길게는 10여 년 이상 계약을 당연 연장하며 근무해왔고, 이후에도 상시‧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업무였습니다. 사측은 누적 적자로 인한 경영상의 부담을 이유로 들었으나 이 문제가 당시 평균연봉 2,080만 원을 받던 연봉계약직들의 자회사 이관이나 해고로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은 확실했고, 더구나 2009년 KBS는 700억 원이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이병순 당시 KBS 사장이 자신의 연임을 위해 이명박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해고 방침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시도된 탈법적인 ‘대량 해고’였습니다. 그 해 KBS는 ‘일자리가 희망이다’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해고 통보에 어쩔 수 없이 자회사로 간 사람도 있고, 아예 회사를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100여 명의 해고된, 또는 해고예정이었던 계약직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외치며 ‘전국언론노조 KBS계약직지부’를 결성해 복직 투쟁과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민주노총과 언론노조, 철폐연대, 비정규노동센터, 사회단체, 학생단체들……. 많은 동지들의 도움으로 회사 안팎에서 우리의 억울함을 외치고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니 회사가 협상을 제안해 왔습니다. 절반 정도를 복직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총회를 열어 조합원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회사가 복직 대상자로 제안한 조합원들이 합의를 거부했습니다. 다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요. 협상을 거부하고 계속 싸웠습니다. 회사는 다시 이전보다 많은 인원의 복직을 제안했습니다. 총회를 열었습니다. 이번엔 복직 대상이 아닌 조합원들이 합의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안에서 같이 싸워 달라고……. 그렇게 2010년 1차 합의가 진행되어 일부가 먼저 복직했고, 이후 이끌어 낸 2차 합의와 2015년 ‘해고무효확인소송’ 최종 승소를 통해 해고자들 중 복직을 원하는 인원은 전원 본사의 ‘무기계약직’으로 복직되었습니다.

 

2 2009년 KBS계약직지부 투쟁 [출처 필자].jpg

 2009년 KBS계약직지부 투쟁 [출처: 필자]

 

그러나 복직 후 거의 10년이 지나도록 KBS의 무기계약직들은 일반직과 동종․유사 업무(동일 또는 협업)를 하면서도 일반직의 약 40% 이하의 낮은 임금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렇게 임금 차이가 큰 이유는 저희의 초기 연봉액이 매우 낮았을 뿐만 아니라, 임금인상률도 호봉상승분이 있는 정규직에 비해 턱없이 낮기 때문입니다. 또한 연장근무 수당 외에는 모든 수당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며, 복직 후 7년이 지나서야 받게 된 교통비도 그나마 일반직의 절반이었을 정도로 복지에서도 여전히 차별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조직 개편이나 인사 발령이 있어도 시행문 어디에서도 비정규직들의 이동 상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내 복지기금 가입은 거부당했고, 무기계약직들의 연봉은 ‘인건비’가 아닌 ‘부서 비용’으로 관리되었습니다. 비정규직, 무기계약직은 회사의 한 ‘구성원’이라기보다 업무에 부속된 ‘집기’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요.

 

결국 무기계약직이란 채용형태는 고용만 안정되었을 뿐 비정상적인 임금 억제와 차별을 강제하는 기형적 고용형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KBS 무기계약직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과거 해고에 맞서 싸웠던 100여 명은 복직 후에도 ‘KBS계약직협회’를 조직해 지속적으로 차별 시정과 무기계약직 제도 개선을 주장해 왔습니다.

 

2018년, 142일 간의 파업 끝에 새로 들어선 경영진과 언론노조 KBS본부는 무기계약직 포함 사내 비일반직 220여 명에 대해 일반직으로 전환하는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노조와 함께 실무협상을 담당했던 계약직협회는 ‘모두 함께 전환한다’라는 큰 기치 아래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그동안 회사가 연봉직 및 무기계약직을 일관된 기준 없이 운용해왔기 때문에 사내 134명의 무기계약직들은 60여 개에 달하는 다양한 업무에서 각기 다른 연봉과 근로조건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환 협상은 업무, 임금, 평가 여부를 따지지 않고 ‘함께 전환되는 것’, 그리고 ‘장기 근속자’, ‘저임금자’의 근로조건을 높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렇게 긴 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업무와 경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바탕으로 한 적정 직급 및 호봉 산정’이라는 노측의 요구와 ‘현 연봉 수준에서의 신분 전환’이라는 사측의 시각은 좁히기 쉽지 않았습니다. 사내에는 상시직의 일반직화를 통한 고용정상화라는 환영과 응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기존 공채 직원들의 반감도 상당했습니다. ‘공영방송’, ‘국민의 방송’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존 일반직의 부정적 시선’은 사측의 완고한 태도에 큰 명분이 되었습니다.

 

3 2018년 사내 피케팅 [출처 필자].jpg

2018년 일반직 전환 협상 과정 피케팅 [출처: 필자]

 

협상과 합의, 실제 전환까지 1년이 걸려, 지난 3월 1일자로 KBS 내 무기계약직들은 일반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복직 후 꼭 10년 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쉬운 점이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10년 전 해고로 인해 근속 단절의 아픔이 있던 무기계약직들은 다시 한 번 사직 후 재입사라는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KBS에 근무했었던 경력이 KBS에서는 단 1년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차별 받았던 복리후생과 저임금 문제도 충분히 해소되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모두 함께 전환’, ‘하후상박’의 원칙만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협회가 있었기에, 사측에 비하면 턱없이 약한 무기계약직들이었지만 똘똘 뭉쳐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전환을 시작으로 (전)계약직협회는 다시 뭉치기 위해 새로운 협회 건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KBS 안에는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형태의 비정규직들이 다 있지 않을까 이야기합니다. 무기계약직부터 한시계약직, 파견직, 도급, 외주, 프리랜서, 특수고용……. 비정규직 문제는 단지 ‘일부’ 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시장 전체, 한국 사회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사회적으로 저출생 문제의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불안정한 고용, 낮은 임금, 당장 내년을 걱정해야 하는 비정규직의 굴레에서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미래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은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고용의 안정만으로 지속적인 차별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차별이 영구화될 뿐입니다. 그래서 무기계약직의 일반직 전환 문제에 대한 관심 역시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자리를 얻는 것, 노동의 가치를 차별 없이 인정받는 것으로 투쟁이 확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투쟁에 늘 함께해주셨던 김혜진 동지를 비롯해 투쟁 속에서 만난 동지들께 배운 것은, 비정규직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규직의 ‘시혜’가 아닌 ‘연대’라는 점입니다. 비정규직은 단지 열등한 노동자가 아니라, 낮은 곳에서 불합리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에 저항하는 투쟁의 한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눈으로 KBS를 보는 것은, 어쩌면 더 나은 KBS와 더 나은 한국 노동자들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비정규직 당사자였으며, KBS의 한 구성원인 저희들은 앞으로도 KBS 내부가 비정규직 문제에 무뎌지지 않도록 비판과 각성의 작은 송곳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