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09] 집회의 권리와 안전은 대립하지 않는다 / 랑희

by 철폐연대 posted Sep 16,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보통의 인권

 

집회의 권리와 안전은 대립하지 않는다

 

랑희 • 인권운동공간 활

 

 

 

8월 20일 서울시는 서울 전역 '10인 이상 집회'를 30일까지 전면금지했다. 열흘간의 조치이기는 하나 30일 이후 이 조치가 얼마나 변화가 있을지, 집회의 가능성이 얼마나 보장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코로나19 발생 이후 평화적 집회의 권리 상황이 나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감염이 확장되었다 주춤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일상과 활동도 변했다. 지난 6개월 동안 공공기관은 문을 닫았다 열었다 하고 프로스포츠도 무관중으로 진행하다 얼마 전 제한된 인원으로 입장이 가능하기도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집회는 언제나 변함없는 금지였다. 아니 오히려 금지 지역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사라지는 공간들, 지워지는 목소리들

 

2월 21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대규모 집회가 시민 건강을 위협해 집회 금지를 통보”한다며 “위반 시 벌금 300만 원의 불이익이 있으니 시민들이 따라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2월 27일 서울시는 서울역광장에서 서울광장, 청계광장, 광화문광장, 효자동삼거리로 이어지는 광장 도로 및 주변 인도와 종로1가 등 주요 장소에 집회금지 고시를 하며 “집회금지가 감염병의 확산을 막고 시민의 생명과 건강, 안전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밝혔다. 이날 종로구청은 오전 7시 30분부터 공무원 100명과 용역 인력 200여 명, 경찰 병력 12개 중대 등을 동원해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인근에 설치된 고 문중원 기수 대책위 농성장을 강제철거했다. 한국마사회의 문제를 밝히고자 했던 죽음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어져 90일이 넘는 외침이 되었지만 정부는 무참히 그 외침의 공간을 치워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집회 금지 구역이 하나둘씩 늘어나 목소리를 밀어내고 비워지는 공간들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구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을 행정대집행으로 쫓아내 버리고 집회금지 고시를 한 동작구청, 용역 폭력에 항의하는 철거민들에게는 집회를 금지하면서 수백 명의 용역들을 동원해 터전을 빼앗는 강남구청, 국회와 산업은행 등 집회가 주로 열렸던 곳들을 금지한 영등포구청 등을 비롯해 대구시, 인천시, 광주시, 안산시, 성남시 등 전국으로 집회가 사라지는 공간은 넓어졌다.

 

07 보통의 인권_01.jpg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더 모이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서울시를 비롯한 전국 지자체가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집회금지 조치를 시행한 데 대해 지난 7월 2일 시민․사회․노동․인권 단체들이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출처: 다산인권센터]

 

 

사라지는 공간만큼 우리는 안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지난 3월 목격한 도심의 풍경은 내가 보아왔던 도시가 아니었다. 거리엔 사람들이 줄었고 조심스럽게 외출한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 채 텅 빈 광장 주변을 지나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집회를 금지한다는 방송을 반복하는 차량이 광장과 사람들 사이로 돌고 있다. 마치 집회가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는 공포가 거리를 채우고 있다. 삶의 위기를, 삶의 권리를 말하려는 목소리가 사람들을 위협하는 바이러스 취급을 당한다. “코로나 위기에 집회라니” 거리에 선 사람들은 위축됐다. 방역과 함께 집회를 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박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들은 목적한 곳에 채 닿기도 전에 치워졌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전례 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 무엇보다 생명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 되었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이례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집회 자유의 권리를 보장하고 증진하기 위한 인권 규범에도 예외적으로 제한을 할 수 있는 원칙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공중 보건 위기 상황이다. 문서로만 보았던 그 문장이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상상해본 적이 없으니 이 위기에 집회의 권리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쉽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간의 정함도 없이, 규모와 방식, 방역 조치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금지하는 지금의 방식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19가 세상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집회 자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 제일 중요한 권리이기 때문이 아니다. 집회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자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단결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안전과 생명에 대한 권리, 인권침해로부터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정치와 공무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등 우리 삶과 연관된 여러 권리를 요구하고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안전한 삶을 위해 거리에 나선 사람들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1월 20일 이후 매일 진행되는 질병관리본부 브리핑에는 수어 통역사가 함께한다. 이제는 자연스러운 뉴스 장면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농인 당사자들이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넣고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난 다음에 이뤄진 변화였다. 이들은 수어 통역 부재는 단지 농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계층에 대한 대책이 부족한 것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안전한 상태는 정부와 전문가의 의견과 결정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과 활동으로 더 탄탄해진다. 이런 개입과 활동을 통해 하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들과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문제로 확장된다.

 

권리를 외쳐 삶을 지키려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19 해고 1호 사업장’이라는 원치 않는 이름을 얻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다. 강요된 무기한 무급휴직을 거부했다가 해고당한 청소노동자들(아시아나케이오)이 회사에 항의하기 위한 농성장은 벌써 세 번 철거당했다. 회사 앞 천막 농성장을 종로구청은 3일 만에 철거했다. 노동자들은 또 다시 농성장을 설치했고 종로구청은 이 농성장을 비롯한 종로 일대에 집회금지 고시를 했다. 청소노동자들은 코로나19 때문에 해고당하고, 코로나19 때문에 해고에 대한 항의도 금지당했다.

 

코로나19의 방역조치 중 하나는 아프면 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파도 쉴 수 없는 노동자들, 감염병에 취약한 노동환경이 불안하지만 출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 경제 위기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해고되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의 불안한 삶과 노동을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고 존엄한 삶의 권리로 보장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금지된다. 모이고 말하고 행동했다는 이유로 수사까지 받아야 한다면 이들에게 안전한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해고된 청소노동자 8명의 목소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이 사회에 들릴 수 있는 목소리는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이 세계를 어떻게 안전하게 구축해갈 수 있을까? 안전한 삶은 그저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로 채워야 하는 것임을 거리에 나선 사람들로부터 확인한다.

 

07 보통의 인권_02.jpg

 

2020.7.11.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박원순 전 서울특별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문서]

 

다시 열린 광장, 누구의 공간인가

 

권리의 공간을 금지당한 이들은 서울시청에 집회금지 조치에 대한 개선을 요청했다. 집회금지 조치로 누구의 목소리가 사라지는지 이야기했고, 방역을 해야 하는 지자체의 입장도 이해하니 함께 방법을 찾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금지조치를 변경할 생각이 없으며 개별 집회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고 방역에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금지하는 방식을 바꿀 생각도 없다고 했다. 이후에 좀 더 의논을 해보자는 제안도 거절했다.

 

그리고 8일 후, 굳게 닫혀있던 광장이 다시 열렸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이 시간 동안 광장과 거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금지당한 자신들의 애도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열린 광장을 보며 공공공간으로서의 광장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권력을 향한 목소리를 소거시킨 그 자리에 들어선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폭력에 저항하는 존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존재는 누구인가? 애도를 위해 광장으로 진입 가능한 죽음이란 어떤 죽음인가? 결국 광장은 누구의, 무엇을 위한 공간인가?

 

광장이 열린 순간 쫓겨난 사람들을, 쫓겨난 죽음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시민의 안전을 이유로 닫혔던 공간이 예외적으로 열린 것, 그 자체만이 아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저지른 폭력을 면책하거나 그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를 약화하기 위해 공적 애도의 시간을 만들었고, 그 시간을 위해 광장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서울시청 광장을 열고 그 공간을 채운 행위가 죽음 이후의 시간을 무엇으로 만들려고 했는가의 문제이다.

 

광장과 거리를 권력에 저항하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서 죽음을 끌어안고 삶의 투쟁을 벌였다. 광장과 거리에서의 애도는 그 죽음을 둘러싼 폭력을 고발하고 권력을 드러내는 투쟁이었다. 그 공적 애도는 존재의 상실 이후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한 시작이었다. 우리가 상실한 존재가 남긴 것은 큰 업적이 아니라 죽음으로 균열시킨 세계의 틈이었고, 광장과 거리에서 연대의 힘으로 그 틈을 벌려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분투를 벌였다.

 

광장은 단지 방역을 이유로만 닫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광장에 입장하는 존재를 선별하거나 광장 자체를 개폐(開閉)하는 권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동시에 피해자의 곁에 서는 연대도 목격했다. 다시 닫힌 광장과 거리는 권력에 맞서 물러서지 않는 이들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방역과 집회의 권리는 함께할 수 있다

 

감염병이라는 불확실성은 불안감을 만들어 그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가 인권을 유보시킨다 해도 수용하기 쉽다. ‘불가피 하다’는 말은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검토와 경합이 이루어진 후에나 할 수 있다. 집회금지는 정말 생명을 구하고 사회의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까?

 

감염병의 위험이 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고, 노동을 해야 하고, 학교에 가야 한다. 물론 감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과 함께 말이다. 삶을 유지하고 구축하는 많은 것을 지키기 위해 불확실하지만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동료 시민들과 협력한다. 이런 합의는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이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집회의 권리는 너무 쉽게 밀려났다. 지자체의 조치는 ‘집회는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 자제해야 하는 것’, 더 나아가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인식하게 했다. 특히 최근 교회로부터 시작된 집단감염이 8월 15일 집회를 통해 확산될 우려가 생기면서 더욱 그렇다. 불확실성은 공포를 만들어 내고, 공포를 다스릴 강도 높은 대응을 요청한다. 수도권 지역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를 실시한 지 이틀 만에, 집회만 거리두기 3단계 수준으로 조정됐다. 위험도가 더 높은 실내의 밀집도를 그대로 둔 채 집회만을 통제하겠다는 것은 지금의 위기를 집회의 문제로 집중시키고 불안감이 증가한 시민들을 향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동안 집회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던 시도들과 위기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인권의 원칙에 대한 요구가 무너지는 느낌이다. 전광훈을 비롯한 8월 15일 집회를 주도한 보수 기독교인들이 만든 현재 위기는 교회 내에서, 거리에서 감염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회 때문이라거나 집회를 허용해준 것이 문제라고 하기엔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져 있고, 집회의 권리 차원에서도 나쁜 영향이 될 수밖에 없다. 방역조치를 거부하고 감염병의 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준 여러 맥락들은 사라졌다.

 

생명 안전의 권리와 집회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서로 긴장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권리들이 양립하도록 하기보다는,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게 만든 것은 권리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집회를 기본권으로 보호하기보다는 통제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권력 행위의 연장선이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권리는 위기 상황에서는 더 쉽게 후퇴한다.

 

 

우리는 더 모이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최근 국내외에서 코로나19와 집회의 권리와 관련해 의미 있는 판결이 이어졌다. 프랑스 최고행정법원은 지난 6월 13일 코로나19로 인한 방역 문제와 감염 우려가 더 이상 대중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판결에서 “모든 시위는 보건위생 수칙을 지키고 사전에 당국에 집회 사실을 신고하고 공공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지 않는 한 허용되어야 한다”라고 밝혔다. 또한 법원은 “집회 시위에 대한 금지는 보건위기 상황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면서, 집회와 시위 권리는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라고 선언했다. 서울행정법원도 지난 7월 29일 “서울시 집회금지처분이 감염병 예방을 위한 조치임을 고려하더라도 과도한 조치”라고 판결했다. 8월 15일 집회 중 하나에 대해 집회금지 명령의 효력을 정지한 이유도 “참가자 마스크 착용 및 명단 작성·비치, 사회적 거리두기 준수, 손 세정 등 감염예방 조치를 적절히 취한다면 감염병 확산 우려가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예상된다고 보이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이런 판단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이다. 그 집회의 내용과 대상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없고, 어떻게 될지 미리 예단할 수 없다.

 

감염병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할 공간이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홀로의 존재를 넘어 동료 시민들과 함께 행동에 나서는 민주주의의 공간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만드는 동시에 우리의 삶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시공간,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발언할 수 있는 평등한 시공간이 바로 집회다. 이 시공간은 저항과 연대를 만들어내는 존재들과 마주하는 기쁨을 느끼고, 무력감이 가능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 용기를 얻기도 하는 저마다의 다양한 경험이 쌓여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가는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이 위기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로서 거리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거리에 나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과 만나 우리 삶이 존엄할 수 있도록 행동을 요청한다. 그런 행동들이 코로나19를 겪은 현재와 그 이후 모든 사람의 삶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길 위에 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들의 공간을 보장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변화를 만드는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