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102] 노동인권 실현의 시작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 유상철

by 철폐연대 posted Feb 08,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살아가는 이야기

 

노동인권 실현의 시작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 직업성 정신질병 예방을 위하여

 

유상철 • 노무법인필 공인노무사, 철폐연대 후원회원

 

 

 

최근 ‘쾌적하다’라는 단어에 꽂혀 있다. 뜻은 ‘기분이 상쾌하고 즐겁다’는 의미이다. 만약 30세에 입사해서 60세까지 일을 한다면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어디일까? 아마도 온전한 정신으로 노동을 하는 시간일 것이다. 즉,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일터라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저녁 ‘월요병’을 앓듯이 주말을 보내고 일터로 향하는 발길이 무거운 경우가 많다. 그저 출근이 싫어서 그런 상황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일터로 향하는 발길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고, 일터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괴물처럼 느껴진다면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나의 일터의 작업환경, 조직문화 등 관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에서 ‘쾌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사업주의 의무로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을 줄일 수 있는 쾌적한 작업환경의 조성 및 근로조건의 개선”을 명시한 이유일 것이다.

 

일과 정신건강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2005년 노무법인필을 개업하면서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노노모)’에 가입했다. 2009년 사무국장을 시작으로 2014년 회장을 마칠 때까지 30대 중반~40대 초반의 시기를 노노모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복수노조 제도, 근로시간면제 제도 등 노조법 개악, 폭압적인 노동탄압에 맞선 법률지원 활동만으로도 버거웠던 시기였다. 나 역시 “노동인권 실현”이라는 말을 그저 선언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외부의 거센 탄압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정도의 상황이었고 버티고 저항하는 데 급급하였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정서적·심리적으로 소진되면 육체적 스트레스도 함께 누적된다.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가 복합적으로 신체적 변화를 야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공세적인 노동탄압에 맞서야 한다는 생각에 나의 일상을 챙기기보다 각종 기자회견, 진상조사, 집회, 항의방문 등 일정을 소화하기 급급하였다. 정부의 폭압적인 노동탄압에 맞서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정작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8 살아가는 이야기_01.jpeg

2012.3.26. 공황장애 기관사 사망사건 관련 서울도시철도 기관사의 건강권 쟁취와 노동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모습.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노동자 정신건강 훼손이 산재로 인정받기까지

 

1999년 故 이상관 동지 투쟁(“1999년 대우국민차 창원공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쳐 산재로 요양하던 20대 청년 노동자 이상관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요양을 종결하라는 근로복지공단 직원의 종용을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자살(이하 ‘극단선택’)에 대한 인정 기준이 개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직업성 정신질환에 대한 집단산재 투쟁이 전개된 것은 그 이후로 기억된다. 2003년 청구성심병원 투쟁, 2004년 도시철도 기관사의 공황장애,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투쟁이 이어졌다. 기관사 사건의 경우 사고의 경험 유무에 따라 산재 인정 여부가 달라지는 이상한 기준이 제시되었다. 2004년 KT 퇴출프로그램, 2005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투쟁 등을 지속하였지만 당시 사회적 인식은 극단선택 사건이나 우울증 등 정신질병에 대해 개인적 소인에 의한 상병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하였던 상황이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 후 연이은 극단선택 사건이 이어졌고, 노동현장에서 심리적 치유, 정서적 지원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직업성 정신질병의 발병은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과 연결되는 것으로 집단적 상황에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보인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저성과자 퇴출프로그램에 의한 극단선택 사건이 지속되는 등 직업성 정신질환의 수많은 사건을 경험하면서 현장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질병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인식과 맞물려 극단선택 사건 뿐 아니라 정신질병의 업무관련성에 대한 인식은 낮은 수준이었다고 생각된다.

 

노동자 건강권 보장을 위해서 권한을 남용하거나 조직적으로 발생하는 힘희롱(직위를 이용한 괴롭힘), 일터 괴롭힘, 직장갑질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었던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직업성 정신질병 인정 투쟁 뿐 아니라 현장을 바꾸기 위해 통제적 조직문화 개선, 직장 내 민주주의 실현 등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투쟁이 확대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12년 3월 도시철도 기관사가 열차에 투신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후 도시철도 기관사 4명이 2년 6개월 동안 연이어 극단선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들을 수행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극단선택, 정신질병 사건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자동차 연구원 사건, 청소노동자 사건, 사무금융노동자 사건, 물류노동자 사건, 시설노동자 사건, 언론노동자 사건 등 극단선택, 정신질병 사건은 직종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였다. 사건마다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직접적인 요인은 다소 다르지만, 재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업무와 관련하여 자존감 훼손의 경험을 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업장 내 다양한 조직적 관계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인격적 무시를 경험하면서 악화의 정도에 따라 우울증, 적응장애 또는 극단선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회적 인식과 법제도의 변화

 

최근 노동자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2018년「산업안전보건법」에 고객의 폭언, 폭행 그 밖의 적정 범위를 벗어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에 대한 예방 조치의무가 규정되었다. 2019년「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노동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가 규정되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업무상 재해의 인정기준으로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질병을 업무상 재해로 규정하였다. 또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별표3을 통해 “바. 업무와 관련하여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에 의해 발생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사. 업무와 관련하여 고객 등으로부터 폭력 또는 폭언 등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 또는 이와 직접 관련된 스트레스로 인하여 발생한 적응장애 또는 우울병 에피소드”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2021년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을 통해 안전보건교육의 내용으로 “직무스트레스 예방 및 관리에 관한 사항,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 및 관리에 관한 사항”을 명시하였다.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현황을 살펴보면 직업성 정신질병의 증가 상황은 수치로 확인된다. 2017년 정신질병(극단선택 포함) 187건(인정률 55.9%), 2018년 226건(인정률 73.5%), 2019년 325건(인정률 59%)으로 2017년 대비 2019년 1.74배가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 직업성 정신질병 관련 사건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신청 사건이 증가한 배경에는 노동관계법령을 통해 직업성 정신질병에 관한 세부사항을 규정한 영향으로 보여진다. 재해자가 요양신청 등 적극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터에서 직업성 정신질병의 발병 위험성을 낮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동시에 개인적 소인의 문제로 치부되었던 정신질병, 극단선택의 문제를 이제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조직적인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업무관련성에 대한 인식이 좀 더 확대되어야 한다. 여전히 현장에서 정신적·심리적 소진을 경험하는 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아직까지도 개인의 특수성으로 인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거나 과잉 반응을 보인다고 치부하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8 살아가는 이야기_02.jpg

“행복하게 살 권리 쟁취하자!” [출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다친 몸과 마음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최근 진행한 직업성 정신질병 사건의 내용이다. 사업장 내 복수노조가 존재하고, 경영진 교체 등 노노갈등, 노사갈등이 극심하였던 상황에서 사용자는 부서의 인적 구성을 뒤섞는 방안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였다. 재해자는 단지 부서의 막내였다는 이유로 타 부서로 강제적으로 인사이동 되었다. 형식적으로 희망원을 제출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희망원을 제출하기까지 1주일 동안 부서장으로부터 온갖 폭언, 욕설 등 괴롭힘, 인격 모독, 권한 남용을 경험하면서 재해자는 우울감이 심해졌다. 동료들과 선배들은 ‘부당한 일이지만 내가 갈 수는 없다’, ‘1년만 참고 버텨봐라’는 등 지지와 연대는커녕 재해자가 희생양이 되는 것을 묵인, 방관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재해자는 홀로 벼랑 끝으로 몰렸던 것이다. 부서 이동 후 버티고 버텨 보았지만 자존감 훼손, 심리적 소진과 패배감, 배신감 등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두 달가량 병가 신청 후 이동된 부서에서 근무하였지만, 1년 후 돌아온 것은 ‘근무성적 불량자’라는 통지와 경고장이었다. 재해자는 더 이상 헤어나올 수 없었다. 복도에서 이동 전 부서의 부서장을 마주치면 움직일 수 없었고, 혹시나 부서장을 만날 것을 염려하여 위, 아래층으로 빙빙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결국 휴직을 신청하였고, 참고 참다가 용기를 내어 상병을 진단 받은 날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에 요양신청서를 접수하였다. 재해자에게 “원래의 부서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이며, 소망이다”라는 말로 시작한 사건이었다. 앞으로 재해자가 현장에서 맞서야 할 일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성 정신질병의 치유와 재해자의 일생을 위해서 맞서야 한다고 말했고, 지지와 연대를 보내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재해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맞서야 한다”는 말이라니 참으로 잔인한 세상 같다.

 

억압적인 일터를 쾌적하게 바꾸는 것부터

 

다양한 직업성 정신질병, 극단선택 사건을 경험하면서 “노동인권 실현”이라는 선언적 문구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 정리되는 것 같다. 선언적으로 말하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 상호간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 노동인권 실현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적 대우를 하는 것,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인간적 대우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가 외치는 노동 존중이라는 추상적 문구를 노동자의 일상에서 구현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정리되기까지 너무도 많은 죽음과 고통 받는 노동자를 보았기에 더욱 간절하다. 직업성 정신질병, 극단선택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권력이 있든 없든, 돈이 많든 적든 간에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사회로 변화시켜야만 한다. 일터에서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기 위해 항상 ‘쾌적’이라는 말을 되새기길 바란다. 지금 나의 일터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쾌적한지?” 늘 점검하고, 조금 더 쾌적해질 수 있도록 바꾸고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일터에서 쾌적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으면 많을수록 늘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