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104] 쉼과 배움으로 충만했던 나의 안식년 / 이종란

by 철폐연대 posted Apr 04,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살아가는 이야기

 

쉼과 배움으로 충만했던 나의 안식년

 

이종란 •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상임활동가, 철폐연대 회원

 

 

 

“부담 갖지 말고 <질라라비>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정말 큰 부담 없이 승낙했습니다. 비록 글재주는 없지만, 작년 한해 잘 쉬고 복귀했으니 늘 애쓰는 이의 그 정도 부탁이야 응하는 게 도리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런데 막상 내일이 원고 마감일인데 부담감이 확 몰려옵니다. 딱히 주제가 정해진 글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니, 막상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괜히 “반올림 활동 내용만 담지 말고 작년에 어떻게 보냈는지 그런 거 쓰면 좋겠다”고, 글을 요청한 이가 처음에 한 귀띔이 생각납니다. 안식년 마치고 복귀한 지 벌써 넉 달째 되어 가니 일 중심적인 삶으로 점점 가속도가 붙고 있는데, 정말 더 잊어버리기 전에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글에 담아보려고 합니다.

 

안식년을 가진 2020년은 코로나19가 전 지구를 강타하여 여러모로 위태로운 해였습니다. 새로운 감염병 앞에서 공포와 불안, 혐오의 감정들이 나돌기도 했고, 위기 속에서 이웃을 돌보고 헌신하는 이들로 인해 뭉클해지기도 하면서요. 야생동물 서식지를 함부로 파괴해온 인간이란 종의 반생태적인 생활양식에 대한 비판에 깊이 공감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튼 저는 이런 위기 속에서도 ‘쉼’에 집중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큰언니 격인 오랜 지인의 큰 베풂 덕분에 유럽의 두 나라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2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즈음, 코로나로 인해 더 이상 해외여행을 할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막차 타고 간신히 다녀온 그런 셈이 되었습니다. 다들 제게 운이 좋았다고들 말합니다.

 

여행이 어땠는지를 묻는다면? 음… 저는 유명한 도시나 역사 깊은 유적지에 대해 둘러본 것도 괜찮았지만, 무엇보다 한적한 시골 마을, 너무 춥지 않아 겨울임에도 피어 있는 작은 꽃들, 한국의 나무와는 분위기가 묘하게 다른 그곳의 나무들을 보면서 즐거웠습니다. 다시 기회가 있다면 식물 관련 탐방을 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요. 또 함께 갔던 분의 현지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며칠씩 머물며 맛있는 식사도 함께하고 동네 산책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받은 뜻밖의 환대는 오래도록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뒤 나머지 열 달은 착실한 집순이로 지냈습니다. 페이스북과도 일 년간 거리두기를 하니, 세상이 조용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세상과 완전히 단절해 지내는 건 자신이 없던지라 3월부턴 TV를 연결해 시청에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법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역사, 교양 등 방송 프로그램 수준이 높아졌다고 느끼면서요. 그래도 TV를 종일 끼고 있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보단 책이 주는 즐거움이 의외로 컸습니다. 안식년 때 가장 흥미로웠던 일을 꼽자면 여유롭게 책을 보았던 그 자체 같습니다. 지금 가장 아쉬운 부분도 그것이네요. 아무튼 작년에 읽은 책들은 그간 알고 싶었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들을 탐독했던 것 같습니다. 기후 위기를 경고한 책들, 채식주의에 대한 것, 여성주의나 성소수자 관련 책들, 생태주의를 다룬 책들, 건강권 혹은 질병권에 대한 주제나 장애 인권에 대한 이야기들도 어렵지만 도전해 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일 핑계로 간과했던, 어떤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시간이 필요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한없이 고마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네요. 사실 안식년 들어가기 전에 저는 누가 조금만 마음을 건드려도 분노하거나 눈물이 났습니다. 어쩔 땐 거의 자극이 없이도 눈물이 났습니다. 우울증 상담을 받아보라는 권유도 받았습니다. 망설이다 그냥 지나치고 안식년을 맞이했었는데, 아무튼 부족하고 힘들었던 일들과 거리두기를 하고 다행히 치유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보고 싶은 사람들을 잘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전에 계신 부모님, 보고 싶은 반올림 피해자 가족들. 안식년 때에는 꼭 봐야지 했던 약속들은 또 다시 기약 없이 미뤄졌습니다. 누군가는 “이러다 정말 우울증 걸리겠다”고 털어놓기도 하고, 누군가는 주말에 혼술로 외로움을 달랜다며 고백하기도 하면서도, 서로를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좁히지는 못했습니다. 그나마 사회적 자원이 없는 이들은 더욱 외로웠을 시간들임이 분명합니다.

 

8 살아가는 이야기01-02.jpg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텃밭에서 가꾼 채소를 직접 수확하는 ‘작은 기쁨’도 누렸다. [출처: 이종란]

 

다시 좋았던 일로 마무리를 하자면, 집 근처 주말농장을 분양 받아 텃밭에 각종 채소와 허브를 키우는 재미도 누렸습니다. 덕분에 비닐 포장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서 좋았습니다. 흙을 밟고 농사 흉내를 내면서, ‘왜 인간이 논과 밭에서 멀어졌나. 도시의 인스턴트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과 생태적인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기후 위기 시대이니만큼 그동안 한없이 편리함에만 길들여진 생활 습관들을 고치려 해봤습니다. 플라스틱이나 비닐 같은 일회용 쓰레기 배출도 최소화해 보고요.

아쉽게도 복귀 후 많은 것들이 뒤죽박죽 된 것이 사실이지만, 가급적 제가 작년에 느끼고 배운 것들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도로 원점으로 되돌리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지켜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다행히 채식은 유지하고 있습니다.

 

올해 3월 5일 눈 쌓인 울산바위 아래 언덕에서 황유미 씨를 만나고 왔습니다. 벌써 14주기입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투쟁한 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다만 아직도 피해제보가 적지 않게 들어오고, 누군가는 또 여전히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산재 인정의 문턱을 넘기 위해 애를 쓰고, 승인 후 부닥친 여러 어려움에 또 좌절을 겪습니다. 반올림은 노동자 건강과 인권지킴이로서의 제 사명을 다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그러니 이젠 다시 작년처럼 여유롭게 책을 보거나 긴 시간 산책을 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누군가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동기부여가 될 만큼 건강해져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겠노라고, 내일 죽어도 여한 없이 잘 살겠노라고. 더 이해하고 아끼며 지내겠노라고요. 과로하고 피곤하면 세상이 원망스러워질 수도 있으니, 잘 조절하면서 가겠노라고요.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운 지난 1년의 시간, 특히 빈 자리 채워준 우리 상임들에게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런 휴식이 보편적 권리가 되길 간절히 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