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105] 이재학 피디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 진재연

by 철폐연대 posted May 0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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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의 투쟁

 

이재학 피디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대책위 활동의 의미와 과제

 

진재연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 / 이재학PD대책위 집행위원장

 

 

 

2020년 2월 4일 청주방송에서 14년간 일했던 이재학 피디가 세상을 떠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서울·충북을 아우르는 80여개 단체·노동조합이 함께 대책위를 꾸려 활동을 시작했고, 49재 결의대회, 100일 문화제,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과 이행요구안 발표, 4자 대표자 논의, 지상파 방송사 앞 피켓팅, 청주방송 앞 지속적인 선전전 및 천막농성 그리고 2020년 7월 4자 대표자합의와 청주방송의 공식 사과. 이후 대주주 이두영에 의한 합의 이행 방해 과정 속에 1주기 추모제를 치뤘고 얼마 전 4월 7일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4월 7일 청주지법에서 열린 이재학 피디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항소심 재판에서 청주방송 사측은 이재학 피디가 청주방송의 노동자였음을, 부당하게 해고되었음을 인정했다. 2020년 1월 31일 이재학 피디가 1심에서 패소하고 2월 4일 절망감과 울분에 목숨을 끊은 지 1년 2개월만이었다. 대책위에서 이재학 피디와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재판에 함께 했고, 재판 전에는 청주지법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동료들의 거짓증언과 배신을 감당하며 1심 재판을 견뎌냈지만 패소의 충격으로 힘들었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이재학 피디의 시간들. 억울함을 증명할 길이 죽음밖에 없었던 이재학 피디와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대책위의 많은 구성원들은 지난 1년 3개월을 보냈다.

 

2021년 5월 13일은 이재학 피디 항소심 선고 기일이다. 합의 번복을 반복하며 오랜 과정 끝에 청주방송 사측이 이재학 피디의 노동자성과 부당해고를 인정했으니 이제 법원에서 올바르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일이 남았다. 이재학 피디의 노동자성이 구체적 사실을 바탕으로 정확히 판결문에 담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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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학 피디 1주기 추모제가 열린 2021년 2월 4일, 청주방송앞에서 두진건설까지 행진해 헌화를 했다. 두진건설 앞에서는 경찰이 행진 대오를 막아섰다. [출처: 이재학PD대책위]

 

이재학 피디의 삶과 노동, 방송현장에서 일하는 모두의 이야기

 

음악을 좋아하고 기타연주를 즐겼던 이재학 피디는 청주방송의 음악프로그램인 <전국TOP가요쇼>의 조연출을 맡게 되면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고, 2018년 동료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부당해고될 때까지 청주방송에서 헌신을 다했다. 방송일을 좋아해 청춘을 바쳐 일했고 야근과 밤샘을 밥 먹듯 해 라꾸라꾸(간이침대)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던 사람. 그럼에도 14년간 단 한 번의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편집실이 비는 정규직 퇴근시간 이후에 일을 시작해야 했던 사람. 수많은 프로그램의 기획, 촬영, 편집뿐 아니라 여러 행정업무까지 담당하며 청주방송 내외부에서 피디로 불렸지만 하루 아침에 해고되었다.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통해 존재를 인정받고자 했으나, 청주방송은 그의 흔적을 지워내기에 바빴고 동료가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 빨간펜으로 ‘PD’문구를 삭제하며 진술서 철회를 강요하기까지 했다.

이재학 피디의 이야기는 불규칙적이고 과도한 노동, 저임금, 부당한 계약에 시달리면서도 정당한 문제제기를 하면 보복조치 당하는 방송현장에서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방송사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면서도 ‘프리랜서’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용역계약, 위탁계약을 강요받으며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일회용품처럼 소모되고 상처받아 현장을 떠나고, 그 중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정착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미래를 위한 희망고문으로 하루하루 버티기도 한다.

 

방송현장의 불안정노동 문제가 사회적으로 알려지고 현장에서 목소리 내기 시작한 지는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사측은 물론 노동조합도 고민하지 못했다. 방송사 노동조합의 투쟁은 언론민주화, 공정한 방송을 위한 투쟁에 집중되었고 방송사 내 비정규직 프리랜서 문제는 드러나지 않았다. 2016년 CJ ENM 이한빛 피디의 죽음, 2017년 박환성 김광일 피디의 죽음 등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와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방송 노동 문제가 조금씩 이슈화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상파 케이블 종합편성채널, 공영 민영 할 것 없이 또한 OTT를 비롯한 뉴미디어 영상 콘텐츠들도 내부 비정규직 프리랜서 종사자들의 기본적인 실태파악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 비정규직 프리랜서를 고용해 쓰다 버리고, 노동 과정에서 수많은 차별이 존재하지만 방관해왔다. 그런 이유로 대다수 방송사들의 시사 교양 보도국에서는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면서도 방송노동에 대한 보도는 하지 않거나 아주 단편적으로 다룬다.

 

대책위는 이재학 피디 사망 이후 죽음의 진상규명, 명예회복, 책임자처벌을 위한 활동뿐 아니라 청주방송 비정규직 노동조건 개선, 그리고 전체 방송사의 비정규직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충북에서 청주방송 앞 투쟁을 집중 기획했고, 서울에서는 KBS MBS SBS 등 방송사 앞에서 제2의, 제3의 이재학들을 만나며 청주방송 문제를 알리기도 했다.

아직 대책위 활동이 종료되지 않았고, 대책위 차원의 공식적인 평가를 진행한 것이 아니기에 지난 1월 3개월간의 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떠올랐던 몇 가지 고민을 나누며 대책위 활동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방송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주체형성, 어떻게 가능할까?

 

이재학 피디는 본인뿐 아니라 동료들의 급여 인상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그리고 소송 중 진행한 인터뷰에서 “판례를 남기겠다”, 판결이 나면 “전국에 알려지지 않겠냐”고 했다. 그는 본인만의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머물지 않고 방송현장에서 일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의 권리향상을 고민했고 실제 용기 있게 나선 사람이었다.

청주방송의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이재학 피디의 죽음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고 그를 보낸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실제 현장을 바꾸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하거나 대책위 활동에 함께 하지는 못했다. 대책위에서도 반성적으로 평가하며 더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이다.

업무가 많아 시간적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이두영 의장의 친인척들이 근무하는 청주방송 내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권리를 위해, 대책위와 연대하기 위한 작은 움직임에도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 결과에도 나오듯이 청주방송 노동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에 빈번히 노출되고 있었고, 악의적이고 근거 없는 뒷담화를 자주 경험했다.

 

규모가 작은 지역 민영방송이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이러한 상황은 청주방송뿐 아니라 대부분의 방송현장이 비슷하다. 위계와 서열이 중요하고, 인맥으로 연결된 좁은 현장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고, 뒷말이 무성하며 평판이 중요한 이 현장에서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은 늘 조심스럽다. 부당한 상황에서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평가들이 덧씌워지는 곳이 바로 지금의 방송현장이다. 그래서 그만 둘 결심, 다시는 방송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만 작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려운 상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방송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조합, 단체들의 활동이 있기에 조금씩 현장은 변하고 있다. 비약적인 조합원 증가나 강도 놓은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지속적인 활동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용기 있게 목소리 내고 힘을 모으는 일은 이재학 피디가 우리에게 남긴 중요한 과제이다.

 

서로 다른 방송 비정규직/프리랜서들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방송현장은 비정상적인 고용형태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방송사 정규직 계약직, 외주제작사 정규직 비정규직, 프리랜서, 파견 하청업체 노동자…. 중층적 하도급 구조에 개인도급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다. 1991년 외주 활성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방송산업은 방송사 내부와 외부로 더 극명하게 나눠졌다.

또한 직군도 다양한데 연출, 제작, 촬영, 조명, 음향, 장비, 미술, 기자, 중개, 연기자, 리포터 등 하나의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수많은 직군의 노동자들이 함께 일을 한다. 다양한 직군의, 고용형태가 다른 사람들이 드라마, 예능, 시사교양 등 다른 장르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프로젝트 단위로 몇 개월씩 만났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청주방송은 하나의 건물에서 오랜 시간 함께 일했지만 서로서로 우애와 연대의식을 느끼기 어려운 폐쇄적인 조직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방송현장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계약관계는 삶의 형태를 분할하고, 서로 다른 직군, 부서의 노동자들이 서로 만나 이해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박탈해왔다.

 

이재학 피디의 죽음으로 꾸려진 대책위는 방송현장의 여러 단체, 노동조합들이 모두 함께 하는 유일한 네트워크이다. 5월 13일 항소심 선고 기일 이후 대책위 활동이 어떻게 정리될지 혹은 어떻게 계속 될지 아직 정해진 바는 없지만 같은 고민을 하면서도 만나기 어려운 조직들이 부족하지만 공통의 과제를 만들어왔고 대책위는 그 기반이 되어 주었다.

지금은 분할되어 있는 방송현장에서 서로 다른 조건의 노동자들이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기획을 해야 할 때이다. 장르를 뛰어 넘어, 직군에 관계없이, 방송사 내외부 계약형태를 초월해 다양한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함께 방송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목소리 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정규직 노동조합은 어디쯤 있을까?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을 지원하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했던 청주방송 내 정규직 노동조합은 사실상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청주방송이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회사를 견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행 과제 중 하나인 ‘노사협의회 비정규직 대표 참여’에 대해 사측과 함께 거부했다. 정규직이 아니기 때문에 대표로 참여시키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청주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는 노동조합에 대해 자신의 문제를 상의하고 도움받을 수 있는 조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방송현장의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화되고, 파악되지 않는 무수히 많은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있으며, 정규직 조직화만으로 노동조합의 규모가 늘어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은 우리 사회 어디쯤 있을까?

방송사 내 노동조합이 구성원들만의 조직이 아니라 방송을 만들어가는 모든 이들의 조직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나가길 바라며 대책위도 이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하기 위한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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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영 의장이 4자 대표자 합의 약속을 번복하자 청주방송 앞 천막농성 및 집회를 매일 열며 합의 이행을 촉구했다. [출처: 이재학PD대책위]

 

민영방송 지배구조의 문제

 

대책위 활동을 하며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이두영 회장의 최종 책임을 알면서도 공식적인 책임을 묻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청주방송이 합의를 번복했던 상황의 중심에는 청주방송의 대주주이자 두진건설 회장 이두영이 있다. 이두영은 20년 가까이 청주방송의 대표이사였고, 이재학 피디가 사망 당시에도 청주방송의 대표이사였다. 이재학 피디 사망의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자 이두영은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대표이사를 사퇴했고, 청주방송의 보도 경영 편성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두영은 실질적으로 청주방송 경영에 손을 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재학 피디 명예회복을 위한 합의 사항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약속 이행을 방해했다.

지역 민방의 대주주는 대부분 건설자본이며 이들의 경영 간섭문제는 아주 오래된 적폐로 여겨져 왔다. 건설자본들이 지역 영향력 행사를 위해 언론사를 소유하고, 사주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수익 빼돌리기, 가족 관계회사로 일감 몰아주기 등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왔는데 청주방송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직문화 시스템, 전반적인 회사 운용의 책임이 있는 이두영 의장이 이재학 피디 죽음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실질적인 조처에 나서야 함에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세로 일관했다. 대책위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했음에도 이두영의 실질적인 책임을 묻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앞으로 노동자 통제, 시민 통제 등을 통해 민영방송 지배구조 문제를 풀어가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현장에 부는 변화의 바람

 

얼마 전 이재학 피디의 친구이자 청주방송 MD로 일했던 정현우님이 1년 반 가까이 진행된 근로자지위확인 및 불법파견 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그리고 작년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진행된 고용노동부 청주고용지청의 청주방송 특별근로감독 결과 조사대상자 21명 중 12명에 대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이 인정됐다. 업무수행 과정에서 청주방송 담당 PD로부터 지휘·감독에 따라 일을 하고 있어 사용종속관계가 분명하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특히 MD 업무에서 일하던 노동자 4명에 대해서는 정현우님 소송 결과대로 명목상은 하청업체 소속이지만, 정규직 PD가 직접 지휘·감독하는 불법파견에 해당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 결과 발표 소식과 동시에 고용노동부는 5월 3일부터 KBS·MBC·SBS에서 근무하는 ‘뉴스·교양작가’를 대상으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대책위는 방송작가뿐 아니라 여러 다른 직군에 대해 전체 방송사를 대상으로 한 근로감독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해 방송사들은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형식적 지표를 없애거나 그들을 잠재적 비용 리스크· 법률리스크 요인으로만 대하는 행태를 멈추고 실질적인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작지만 소중한 변화들은 노동인권 사각지대인 방송현장에서 이재학 피디의 죽음으로 이루어낸 너무나 쓰리고 아픈 결실이다. 대책위에 함께하는 여러 단위들은 방송작가 근로감독이 제대로 시행되고, 타 직군으로 확장되는지 감시하고 압박할 것이다. 또한 청주방송이 아직 미이행된 합의 사항 (가해자에 대한 징계 및 노동조건 개선사항들)에 대해 제대로 이행하는지 지켜볼 것이며, 5월 13일청주지법의 공정한 판결이 나오도록 사회적 압박 또한 집중적으로 진행할 것이다. 또한 법률적인 판단뿐 아니라 현장에서의 투쟁이 조직되고, 여러 직군 노동조합의 공동행동이 가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청주방송의 노동자들이 더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전국의 방송사에서 일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근로계약서 체결을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들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만이 이재학 피디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한 뜻을 잇는 길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