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106] 다치고 아플 때 걱정 없이 치료받고 보상받을 권리를 위해! / 재현

by 철폐연대 posted Jun 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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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다치고 아플 때 걱정 없이 치료받고 보상받을 권리를 위해!

 

재현 • 철폐연대 후원회원,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부장

 

 

 

“오늘도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끼여 죽고 깔려 죽고 떨어져 죽고 맞아 죽고 과로사, 일터괴롭힘으로 죽고 있습니다.”

 

“법에 정해져 있는 산재 처리 기간을 지키지 않고 있어 일하다 다치고 병들고 아픈 노동자들은 생계 곤란과 해고 위협까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견디고 있습니다.”

 

“○○○ 기자입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었는데도 왜 중대재해, 노동자 산재사망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기자회견문, 성명서를 쓰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현실, 그리고 언론 기자 분들께 자주 듣는 질문들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과 희생을 딛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투쟁으로 제정했지만 ‘더 이상 죽이지 마라’는 우리의 구호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재벌 대기업은 이 법이 제정되면 한국에서 기업하기 어렵다 엄포를 놓았지만 누구 하나 처벌 받지 않습니다. 이들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국회를 압박하고, 대형 로펌 자문을 통해 경영 책임자 처벌을 면하는 데 골몰하고, 경총에 가입해서 든든한 지원을 약속 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노동자의 죽음을 마주하고 성명을 발표하고 대책위를 구성하고 유족과 함께 대체 왜 죽어야 했는지, 사업주와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싸워야 합니다. 고용노동부는 유족과 노동자의 요구를 받아 형식적으로 감독하고 수습대책을 마련하고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면 세상에서 잊혀 가고 우리는 또 다른 노동자의 영정을 들고 분주하게 다시 싸움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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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21. ‘근본적인 산재 피해 예방 대책 마련 촉구 노동부 앞 집중집회’에서 아들 영정에 헌화를 마친 뒤 오열하는 이재훈 아버님을 위로하는 김미숙 대표의 모습. 언제까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노동자가 누군가의 유족으로 만나야만 하는 것일까. [출처: 노동과세계]

 

죽음마저 평등하지 않다는 말들도 나옵니다. 20대 청년 노동자가 죽거나 수십 명의 대형 참사가 있어야 정치권이 움직입니다. 노동자 시민들의 분노가 높아지는 것이 두려워서 유족을 찾아와 위로하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러나 청년 건설 노동자의 죽음은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습니다. 매년 700명이 산재사고로 사망하는 건설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죽음은 일상이 되었고 사회 전체가 무감각해져 있습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일하고 활동하고, 노동자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 사회 역시 분명 달라지고 있지만 어딘가 허전합니다. 무엇 하나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사고로 직업병으로 과로사로 괴롭힘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싸우고, 노동자들이 조직되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 가려 하는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자주 의심하게 됩니다. 추모 문화제를 준비하며 국화꽃 사러 갈 때마다 언제까지 또 다른 영정을 마주하고 국화를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이 무기력함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대재해로 노동자들의 죽음이 반복되는 가운데 산재 처리 지연 기간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분노와 요구를 담아 세종시 고용노동부 앞에서 농성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산재보상보험법 제1조 목적은 ‘일하다 다치고 병든 노동자가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 받고 치료와 재활을 통해 다시 일터와 사회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법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세부조항에서 산재 처리 기한을 정하고 있지만 십수 년째 문구로만 있을 뿐 현실에서 전혀 작동되지 않고 있습니다.

 

2020년 약 18,000건의 직업병 산재가 처리되는 데 평균 172일이나 소요되었습니다. 이중 절반에 해당하는 약 9,000건에 근골격계 직업병의 경우 평균 121일, 뇌심혈관계 질환은 130일, 직업성 암의 경우 330일 동안 처리 지연되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은 산재를 신청해도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약이 없고, 기다린다고 해도 100% 승인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결국 산재 신청을 포기하게 되었고, 산재보험 제도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금속노조는 지난해 11월부터 지금까지 산재보험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이 법에 명시되어 있는 산재보험 목적과 처리 기한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투쟁해왔습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줄곧 외면해왔습니다. 아니, 오히려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자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사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의 무분별한 산재 신청 증가로 산재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고 말하며 산재로 고통 받는 노동자를 두 번 울렸습니다.

 

산재보험 제도와 보험 업무를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을 관장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고용노동부 또한 문제투성이입니다. 민주노총이 농성 투쟁에 돌입하며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 고용노동부와 면담을 요청하고 근본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해왔지만, “긴급하게 중대재해 예방 대책을 마련하느라 만날 시간이 없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습니다. 면담을 요청하러 고용노동부 민원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조끼 입은 사람은 시위자라서 담당 부서에서 인솔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며 경찰 방패막에 가로막히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줄곧 노동자가 죽어가도 꿈적도 하지 않고 방치해오다시피 한 고용노동부가 이제 와서 중대재해 예방 대책 마련을 핑계 삼아 산재 처리 지연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것입니다. 평택항에서 사망한 청년 건설노동자 고 이선호 님의 죽음 이후 한 달 가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고용노동부였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빈소에 다녀가고, 신임 고용노동부 장관이 “근본대책 마련하라”고 지시하니까 부리나케 뒷수습에 나선 자들이 정작 산재 처리 지연 문제는 근로복지공단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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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의 산재보험 제도 개혁 농성 투쟁 속보 이미지. [출처: 민주노총]

 

산재 처리 지연 문제는 노동조합이 없거나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들이 치료와 재활을 위해 산재를 신청하는 것 자체를 막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에게 산재신청은 해고 등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결심과 다르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무수히 많은 현장에서 산재가 은폐되고 사업주는 재해 원인을 찾아 개선하지 않고, 고용노동부 역시 이를 방치하고, 그 결과 노동자는 같은 원인으로 일하다 다치고 병드는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반복되는 중대재해를 대응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과 함께, 산재 처리 지연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고 산재보험이 일하는 모든 노동자의 사회보험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도록 제도 개선 투쟁을 지속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 <질라라비> 독자 여러분, 철폐연대 동지들과 같이 고민 나누고 함께 투쟁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