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110] 충북지역 생활임금ㆍ노동안전보건 조례 제정 투쟁의 성과와 교훈 / 선지현

by 철폐연대 posted Oct 0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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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바닥 일기

 

충북지역 생활임금ㆍ노동안전보건 조례 제정 투쟁의 성과와 교훈

 

선지현 • 비정규직없는충북만들기운동본부 공동대표, 충북노동자교육공간 동동

 

 

 

노동자의 삶과 권리가 지워진 지방정부의 정책

 

2017년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추진 정책이 발표됐을 때 지역은 술렁거렸다. 자본의 공세를 당해내기도 버거운데 정부까지 나서서 노동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일이 다반사였던 터라 지방정부와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중앙정부의 정책을 앞세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일은 매우 낯선 일이었다. 그래도 제법 신나는 일이었다. 지방정부를 찾아가 ‘지침이 내려왔는데 왜 추진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일은 정부를 상대로 한 청원투쟁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2018년 11월 기준으로 충북도 및 시군단위 공공부문 비정규직 3천470명 중 293명만이 정규직(사실은 무기계약직) 전환이 이뤄졌다. 전체 비정규직 규모의 8.44%에 불과했다. 다수 기초단체들은 계획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시간이 좀 흐르자 다시 비정규직은 늘어났다. 제도 변화 없는 단기적 정책으로는 비정규직 제도가 낳은 저임금·불평등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국회만 바라볼 문제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제도를 바꿔낼 수 있는 대중투쟁의 힘이었다. 그 힘은 지역과 현장에서 만들어져야 했다.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찾고 싶었다. 그 고민은 ‘지방정부도 노동정책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조례를 만들자’는 것으로 이어졌다.

 

충북도는 경제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세우는 지방정부다. 기업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지역 곳곳에 산업단지를 세우고 있었다. 도지사는 ‘전국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치적으로 삼아 3선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은 최악이었다. 전국에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이었다. 산업재해율은 수년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정규직 전환 역시 충북도, 청주시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노동자의 권리 보호나 지원을 위한 조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최고의 경제성장률과 기업 유치를 자랑하는 충북도, 거기에 노동자는 없었다.

 

 

조례가 무슨 소용인가?

 

지역 노동·정당·사회운동단체의 연대로 구성한 비정규직없는충북만들기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는 2018년 ‘충북지역 노동실태와 과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면서 노동조례 제정운동을 본격화했다.

처음에는 조례의 실효성을 두고 고민을 했다. 법이 바뀌지 않는데 조례가 무슨 소용이 있나, 의원 찾아가서 만드는 조례인데 청원 운동은 한계가 뻔하지 않나, 조례를 만들어도 결국 모든 의사결정권은 행정부에 있는데 노동자운동이 개입할 여지가 있을까 등등 회의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운동본부는 일단 시작해보면서 방법을 찾기로 했다. 노동자권리보장,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보장 지원, 생활임금 등에 대한 조례안을 만들고 도민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2달 동안 1만 명의 서명을 받아 도의회를 찾아갔다. 토론회를 열고 의원입법조례 논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견된 것이었다. 운동본부가 만든 조례안의 핵심 내용은 삭제된 채 누더기가 된 채로 통과됐다. 생활임금은 도지사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아예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운동본부는 의원입법조례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조례안을 직접 발의하는 직접행동이 필요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명 요건과 절차는 굉장히 까다로웠다. 설사 안 발의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의회 통과 절차가 있기 때문에 원안이 통과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직접 발의를 성사시키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결정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몇 달에 걸친 고민 끝에 운동본부는 결의했다. 의회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안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조직적 결정과 정당·사회운동 단체들의 집중된 활동으로 ‘주민과 함께 만드는 최초의 노동조례’를 성사시켜보자는 것이었다. 노동권에 대한 지방정부의 책임과 역할 문제를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어 노동자운동이 지방정부 정책과 운영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은 ‘보편적인 노동자 권리’ 문제를 공론화하고, 진보·변혁정당은 의회 밖에서 노동자와 함께 만들어내는 지역 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조례 제정 운동으로 투쟁을 만들어 가다

 

‘우리가 직접 만드는 노동조례’ 운동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청구인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그 요건과 절차가 까다로워 온라인이 아닌 대면 접촉을 해야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사업장 출입과 거리 선전전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 노동자들의 조직적 서명, 운동본부 소속단체들의 면대면 서명운동 등으로 어렵게 1만 7천 명이 조금 넘는 서명을 받았다. 하지만 청구인 서명은 생년월일, 아파트 동호수까지 기입한 주소, 직접 서명 날인이 일일이 확인돼야 하기 때문에 누락되는 서명지가 너무나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15,100명의 청구인을 모았고 2021년 2월 15일 운동본부는 주민 발의로 성사된 생활임금·노동안전조례안을 제출했다. 조례안 제출 후 한 달이 조금 지난 3월 24일 충북도는 ‘심사 결과 청구요건이 충족됐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이제 도의회에 부의되면 조례 제정 투쟁이 본격화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충북도는 갑자기 ‘청구 재심사’를 통보했다. 주민청구 조례안이 상위법 위반 여지가 있어 각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운동본부는 느닷없는 충북도 재심사 통보에 분노했다. 충북도는 겉으로 법제처 해석과 상위법 문제를 앞세웠지만, 속내는 ‘노동조례는 기업유치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운동본부 소속 활동가들과 노동자들이 도청 농성을 시작했다. 충북도의 태도에 분노한 노동자들과 지역 노동자들이 충북도청 복도를 가득 메웠다. 다른 시도에서 모두 제정된 조례가 충북도에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정당성을 갖기는 어려웠다. 결국 충북도는 재심사 결정을 취소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충북도 행정의 민낯을 봤다. 노동 문제에 대한 상식 이하의 태도와 노조 혐오 논리, 기업과 경제 성장에만 힘을 쏟는 지방 행정, 민주적 절차마저도 행정부의 판단에 의해 고무줄이 되는 상황을 보면서 노동자들은 지방정부와의 투쟁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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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7. 노동안전ㆍ생활임금 조례 제정에 미온적인 충북도를 규탄하는 결의대회에 나선 충북지역 노동자들. [출처: 비정규직없는충북만들기운동본부]

 

어렵게 주민청구 조례안이 충북도의회에 부의됐다. 이때부터 충북도는 조례안 통과를 막기 위해 노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역 언론들은 ‘노동계의 떼쓰기’, ‘생활임금 상위법 위반’, ‘공정하지 못한 생활임금’, ‘기업유치와 지역경제에 악영향’, ‘힘든 소상공인들 생활임금 요구에 울상’ 등 충북도의 주장을 그대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운동본부가 발의한 생활임금 조례안은 생활임금 적용범위를 지방정부 및 공공기관(지방정부 출연기관)에 직접고용된 기간제 노동자만이 아닌 용역, 민간위탁, 하수급인, 그 외 공공기관의 업무를 수행하는 프리랜서 노동자까지를 대상으로 했다. 이를 두고 충북도 행정부와 언론은 ‘지방정부가 민간업체까지 생활임금을 주라는 얘기냐’며 반발했지만, 이는 사실상 지방정부 또는 공공기관의 예산으로 운영되어 이들이 사실상 원청 지위에 있는 사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래야만 공공부문이 선도해 민간부문에도 생활임금제를 확산하는 것이고, 공공서비스부문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를 포함해 생활임금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노동안전조례로는 노동안전조사관제도, 충북도형 명예산업안전감독관제도, 노동안전기본계획 수립, 사고 예방 및 사고 발생 시 사고조사위원회 구성 등을 통해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작은사업장 노동자들의 사고 예방과 노동안전을 강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두고 충북도는 산안법을 넘어서는 내용이라며 반발하면서 거부했다.

 

노동자와 도민의 직접 발의로 성사된 주민 조례는 충북지역에서 생소한 일이었다. 거기에 충북도와 노동계의 대립이 격화되고, 충북도가 노골적으로 방해에 나서자 노동조례 제정을 두고 지역 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 노동조례의 필요성과 지방정부의 역할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7월 1일 운동본부는 천막농성과 매일 선전전을 벌였고, 매주 집회를 이어나갔다. 민주노총충북본부는 충북도와의 전면투쟁을 선포하면서 코로나19 방역을 앞세운 집회 제약을 뚫고 거리 집회를 만들어갔다. 주민 발의로 청구된 조례안, 노동조합의 투쟁, 정당·사회단체의 연대로 힘이 모이자 도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충북도의회는 운동본부가 제출한 조례 원안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정된 내용으로 조례를 제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러 차례 논의가 이뤄졌다. 7월 20일 충북도의회에서 생활임금제도, 노동안전조례가 드디어 통과됐다. 통과된 안은 원안보다 후퇴한 것이었다. 그러나 운동본부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값진 조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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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0. 비정규직없는충북만들기운동본부는 노동안전ㆍ생활임금 조례안의 충북도의회 통과를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출처: 비정규직없는충북만들기운동본부]

 

싸울 게 너무 많다는 걸 확인한 조례제정 투쟁

 

중앙정부와 국회를 통해 만들어지는 법과 제도는 늘 배제당하는 노동자를 만들어 낸다. 근로기준법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있었고, 산업재해 예방 및 사고 대응을 위한 법들은 대다수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있다. 산업 변화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는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노동권’은 남의 나라 얘기다. 여기에 법으로 보장된 권리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를 해결하려면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역시 쉽지 않다. 노동조합 할 권리는 100인 미만 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실질적으로 보장된 권리가 아니라 높은 장벽이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배제는 일상화되고 노동의 위계화는 다층화되고 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협약을 쟁취해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자는 외침은 늘 옳지만, 그것만으로 일상화된 배제, 위계의 다층화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사업장 규모, 고용형태, 성별, 국적, 노조의 유무와 상관없이 ‘일하는 누구나 보장받을 권리’를 법과 제도로 만들기 위해 지역과 현장에서 사회적 담론을 만들고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이 필요했다. 그 운동이 힘을 가질 때 ‘배제를 정당화하는 법과 제도’에 파열구를 낼 수 있다. 우리는 노동조례 제정 운동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조례를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조례 통과 이후 충북도는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생활임금과 지방정부 및 출연기관에 직접고용된 노동자로만 적용범위를 제한하는 내용을 제출하며 제정된 조례의 취지를 짓밟고 있다. 운동을 여기서 멈추면 오히려 우리는 후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례 제정 운동은 더 큰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 조례를 시군단위로 확대하는 문제, 제대로 된 조례 시행을 요구하는 투쟁, 지방정부의 책임을 묻는 요구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다.

그래서 조례 제정 운동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지역에서 ‘보편적인 노동권’을 사회적 담론으로 만들고, 이를 차곡차곡 쌓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그것을 위해 이제 첫발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