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112] 지역금속, 공단조직화 그리고 조선하청노동자 조직화 / 이김춘택

by 철폐연대 posted Dec 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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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바닥 일기

 

 

지역금속, 공단조직화 그리고 조선하청노동자 조직화

 

이김춘택 • 전국금속노동조합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전략조직부장

 

 

1

 

2020년 한 해 동안 대우조선해양에서 4천 명 넘는 하청노동자가 해고됐다. 그리고 2021년은 일감이 더 없을 것으로 예상됐다. 당장 짤리지만 않아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움츠러들기 마련일 텐데, 임금인상 요구를 앞세운 하청노동자 투쟁을 적극 조직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하는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투쟁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3월 10일 삼성중공업 도장업체에서 일하는 파워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에 나선 것이다. 조선하청지회는 파업투쟁 2일째 되는 날 파워 노동자들을 찾아가 만났고, 3일째 되는 날 함께 투쟁하자고 결의했다.

투쟁이 조직적 모습을 갖추자 노동자들의 분노는 더 크게 분출했다. 파업에 참여하는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 5백 명을 웃돌았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투쟁의 한계도 분명했다. 깜짝 놀란 자본이 임금인상 요구를 일부 수용하자 투쟁은 금세 주춤거렸다. 결국, 파업 10일 만에 아쉬움을 가지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삼성중공업 파워 노동자 투쟁을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이번엔 대우조선해양 파워 노동자들이 4월 1일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이미 대우조선해양 파워 노동자는 2019년 3월 15일 동안 파업투쟁을 한 경험이 있었다. 2년 전 투쟁에서 가슴 끓어오르는 희열과 쓰디쓴 좌절을 모두 맛보았고, 그 과정을 거의 똑같이 반복하는 삼성중공업 투쟁을 지켜본 노동자들은 이번엔 달라야 한다고 생각을 모았다.

200명 가까운 하청노동자가 금속노조에 가입해, 조선하청지회 푸른 깃발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투쟁했다. 90% 가까운 파워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해 생산을 멈춰 세웠다. 특히 스프레이, 터치업 등 다른 직종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하면서 파워 노동자를 넘어 도장업체 전체 노동자 투쟁으로 확대됐다. 또한, 도장 노동자 투쟁에 용기를 얻은 발판(족장) 노동자가 소수지만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게 23일 동안 거침없는 하청노동자 파업투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원청’이라는 벽을 끝내 넘어서지는 못했다. 결사 투쟁과 조직 보존이라는 갈림길에서 후자를 선택했고, 싸움에 비하면 조금은 초라한 성과로 투쟁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조선소에서 처음으로 9개 도장업체 대표와 노동자 대표 9명이 마주앉아 협상을 했고, 비록 노동조합의 이름은 빠졌지만 합의서를 체결했다. 퇴직금을 안 주기 위한 꼼수인 퇴직 적치금을 폐지하고 그만큼 임금을 올렸고, 한두 달 단기계약을 1년 계약으로 바꿔 고용불안 없이 투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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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도장 노동자 파업 투쟁 [출처: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23일 동안의 파업투쟁을 마무리하자마자 조선하청지회는 5월 3일 9개 도장업체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예상치 못한 단체교섭 요구에 도장업체 대표들은 합의서 위반이라며 반발했지만, 법이 보장하는 단체교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사측의 시간 끌기에 6월 23일이 돼서야 1차 교섭을 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아무런 진전 없이 형식적 교섭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금속노조로 단결한 도장 노동자들은 꿋꿋이 교섭을 이어나갔고, 결국 쟁의조정을 거쳐 10월 29일 파업권을 확보했다.

11월 11일, 도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청노동자 350여 명이 대우조선해양 민주광장에 모여 투쟁선포식을 갖고 4시간 파업을 벌였다. 합법/불법이 뭐가 중요할까마는, 조선소 하청노동자가 노동조합에 수백 명 가입해서 단체교섭하고 파업권을 획득해 벌인 첫 번째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이어 11월 24일에는 도장업체 중 한 곳인 기륭이엔지 폐업으로 인한 체불임금 해결과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9개 도장업체 모든 조합원이 8시간 파업을 벌였다.

 

다만, 2021년 12월이면 물량이 늘어날 것이라던 예상과 달리 2022년 3월까지는 일감 부족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면적인 파업투쟁은 잠시 미룬 채, 2021년 단체교섭 투쟁과 2022년 임금인상 투쟁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2022년 임금인상 투쟁은 도장 노동자만의 투쟁이 아니라 대우조선해양 전체 하청노동자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관건이다. 지난여름부터 끈질긴 임금인상 투쟁을 이어오고 있는 발판 노동자가 함께 할 것이고, 여기에 더해 최소 10개가 넘는 하청업체에서 임금인상 투쟁을 조직할 것이다.

그리하여 2022년은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규모 조직화의 성패를 가늠할 운명의 한 해가 될 것이다. 2017년 2월 5일 조선하청지회 창립 이후 조금씩 조금씩 쌓아온 투쟁의 성과가 거대한 하청노동자 임금인상 투쟁으로, 대규모 하청노동자 노동조합 가입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한 해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 한판 큰 싸움을 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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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1일 도장 노동자 투쟁선포식 포스터 [출처: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2

 

조선소 하청노동자 조직화는 업종을 중심으로 한 조직화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는 ‘공단조직화’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IMF 경제위기 이후인 1999년 말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을 때, 취업이 가능한 곳은 대개 노동자 10~20명이 일하는 영세사업장이었고 자연스럽게 중소영세사업장이 모인 노동조합인 마창지역금속지회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 우연한 시작이 20년 넘게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본업으로 삼아 활동하게 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처음엔 중소사업장 한두 곳이라도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투쟁을 해서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노동조합을 안착시키는 것이 활동의 목표였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10명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켜내는 것이나 1,000명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켜내는 것이나 비슷한 품과 노력이 들었다. 게다가 중소사업장은 자본도 노동조합도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한 곳이 조직되면 다른 한 곳이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다. 조직이 조금씩 확대되다가도 장기투쟁 사업장이 한 곳 생겨서 그 투쟁에 모든 힘을 쏟아붓고 나면 또 한동안은 정체기와 시련이 닥치곤 했다.

 

이렇게 10년 넘게 중소사업장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애면글면하다 보니 회의감도 들었다. 수만 명이 일하는 공단에 수십 명 조합원의 노동조합 한두 개 만들고 힘들게 지키는 것이 전체 미조직 노동자의 삶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중소사업장 노동조합 조직화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확산성을 갖지 못하고 공단 안에 섬처럼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그랬다. 지역 단위 노동조합은 기업 단위 노동조합과 달리 중소사업장 여러 곳이 함께 모여 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의 활동은 마찬가지로 기업 단위 임단협 중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도 생겼다. 때마침 읽은 <일본 노동운동의 새로운 도전>(기노시타 다케오 지음, 임영일 옮김, 노동의지평 펴냄)은 이 같은 문제의식을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 기업의 울타리를 넘어선 방식의 조직화와 노동조합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것이 공단조직화였다.

그래서, 원했던 녹산공단 조직화 활동을 이런저런 이유로 못 하게 되고 차선(?)으로 거제로 활동 공간을 옮겨 조선소 하청노동자 조직화 활동을 시작했을 때도 공단조직화 문제의식을 담으려고 했다. 지회 이름을 대우조선사내하청지회가 아닌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로 지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때는 2016년 초, 조선소에 하청노동자 대량해고의 광풍이 불어닥치기 직전이었다. 우선 대량해고에 대응할 ‘조선소 하청노동자 살리기 대책위원회’를 지역의 여러 단체와 함께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으로 조선하청지회를 만들기 위한 논의도 시작했다. 그동안 조선소 하청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각개약진 해왔던 역량을 모두 모으니 10여 명, 그 10여 명이 1년 남짓 준비를 거쳐 2017년 2월 5일 조합원 34명으로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5년, 조합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투쟁으로 2022년 하청노동자 임금인상을 위한 큰 싸움을 준비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활동이 대우조선해양에 집중되다 보니, 기업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자 했던 공단조직화 문제의식이 옅어지는 것은 아닌가 경계하게 된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는 공단조직화라는 이름으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반월시화공단에서 8년여 활동 결과 ‘월담노조’가 출범한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게으름 탓에 창립총회 축하 인사 약속도 지키지 못했지만, 멀리서도 ‘월담노조’가 출범하기까지의 고민과 선택을 내 것처럼 느끼고 있다면 좀 과장일까. 공단조직화를 위해 애쓰는 모든 동지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