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202] 조수(助手)에서 노동자로, 노동조합 만들기 / 안병호

by 철폐연대 posted Feb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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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바닥 일기

 

 

조수助手1)에서 노동자로,
노동조합 만들기

 

안병호 •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조합원

 

 

 

영화감독을 꿈꾸다

 

10대 시절 영화 보는 일이 유일한 취미였고 영화 만드는 일에 대해 막연한 꿈을 꾸었다. 마음에 드는 영화를 한 편 보면 ‘언젠가 나도 저런 걸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영화감독이 되는 미래를 상상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화감독이 되는 일은 어떤 명망 있는 감독의 밑에서 다년간 조수(助手)로 일을 하거나 제작사의 구미가 당길 만한 ‘그럴싸한 시나리오’ 혹은 ‘그럴싸한 단편영화’를 만들면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나는 구체적으로 영화감독이 되는 상을 갖고 있지 않았고 막연하게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친구의 권유로 촬영부에서 일을 시작했다. 카메라 뒤에서 일하는 것도 나중에 감독이 되기 위해선 필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흐릿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영화 현장에 처음 진입하는 일은 일종의 도제시스템을 통해서 가능했다. 도제시스템은 기술을 가진 장인 밑에서 일정 기간의 수련 과정을 거치고 한 단계씩 올라가 마침내 장인이 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당시 촬영부는 촬영감독이 되기 위한 일종의 수련 과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다분했고 이는 연출, 제작, 미술, 의상, 분장, 소품 등 영화를 만드는 각 부서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감독급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정해진 룰이란 건 없었고 대개는 운을 따랐다. 감독급이 될 마음을 먹은 ‘조수(助手)’로 통칭되었으며, 조수는 경력에 따라 1st, 2nd, 3rd, 4th 등 ‘순서’로 구분되었고 통상 영화 일을 처음 하는 사람은 ‘막내’로 불렸다.

 

1) 조수(助手): 영화 현장에서 감독급 스태프 밑에서 일을 하는 스태프를 말하며 일종의 도제시스템 관습하에 호칭이 만들어진 측면이 있음. 해외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을 사용하나 단순히 감독급 스태프의 하위 스태프로 인식하기보다 직업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으며 종종 감독급 스태프보다 나이가 많은 경력자가 채용되기도 함.

레드카펫 뒤의 사람들

 

막내로 처음 현장에 들어간 것이 2001년 9월이었다. 2001년은 영화판에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던 시기였다. 4월 25일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이 진행 중인 세종문화회관 앞, 레드카펫 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뒤로 한 채 초대받지 못한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손글씨로 쓴 피켓을 펼쳐 들고 마스크를 쓴 채 시위를 벌였다. 피켓의 손글씨는 “우리가 제작자 시다바리가?”, “40억 영화에 연봉은 200만 원”, “반칙왕=제작자”, “불평등 계약과 임금체불”, “저임금에 착취당하는 영화인들”, “표준계약제 실시하라” 등의 문구로, 열악한 한국 영화 스태프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당시 언론에선 “5년 동안 영화일 하며 번 돈이 220만 원”, “두 작품을 하면서 90만 원”을 번 사정 등이 소개되기도 하며 ‘한국영화 전성시대’에 가려진 이면이 드러났다. 한국 영화 80년사 최초 조수급 스태프들의 목소리였다. ‘도제’로 시작한 영화로 언젠가 ‘감독’이 될 것을 꿈꾸었지만, 언제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고 5년 동안 일해도 220만 원에 불과한 돈으로는 꿈은 멀어질 수밖에 없고 버티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인식하기 시작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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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25. 2001년 제39회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는 영화 스태프 노동자들. [출처: 영화산업노조]

 

그런 변화의 흐름과 현장의 목소리 덕분으로 나의 첫 현장은 내 이름이 버젓이 적힌 개별계약서로 시작할 수 있었고, 여전히 최저임금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당시로선 ‘막내’들에게 지급했던 최고 수준의 금액2)을 지급받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각 부서의 감독급 스태프들과 각 부의 팀장급 스태프(1st)에 한해서 진행되는 것이었고, 이 경우 팀장급 스태프가 각 부원들을 대표하여 제작사와 계약하고 제작사로부터 받은 임금을 임의로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임의의 방식이라 함은 팀장은 전체 임금의 50%를, 그 밑으로는 그의 반, 반의 반 하는 식으로 차등을 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수급 스태프들을 주축으로 이른바 양심적인 임금 분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는 법정최저임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제작사의 양심을 자극하기 위해 참여했던 영화마다 임금을 공개하자는 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2) 당시는 경력이 없더라도 월 100만 원은 받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 현장 스태프들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일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했다.

 

첫 번째 현장을 마치고 함께 일했던 당시 퍼스트(1st)를 보던 형으로부터 촬영조수협회 이야기를 들었고 함께할 것을 권유 받았다. 그즈음 연출, 제작, 조명 등 조수협회가 만들어졌고 현장의 처우개선이 주요하게 논의됐다. 이후 연출, 제작, 조명, 촬영 4개 부서는 ‘4부조수연합’으로 함께 활동했으며 주로 ‘다음’이나 ‘프리챌’ 등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소통했다. 근로기준법 내용을 찾아 올리는 사람도 있었고 미국의 영화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기도 했었다. “할리우드는 정해진 시간 되면 퇴근 한다더라.”, “시간을 넘으면 돈을 몇 배 준다더라.” 같은 바다 건너 다른 스태프들의 사정과 근로기준법 준수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꿈같은 이야기와 함께 노동조합에 대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우리가 노동자가 맞냐”는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도 있었다.3)

 

당시 현장은 밤낮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 일하는 누구나 밤샘과 장시간 촬영을 문제 삼았다. 오전 6시에 촬영이 시작되면 다음 날 오전 6시가 되어서야 일이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게 24시간을 보내고 나면 하루를 쉬는 경우가 많았는데 쉰다고 해도 잠을 자느라 시간을 보내니 ‘쉬는 날’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다음 날 오전으로 콜타임4)이 잡히면 중간에 깨서 잠을 못 자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피곤함을 무릅쓰면서 해가 떠 있는 시간은 버티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잠을 청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40~50명의 스태프들이 3~4개월 동안 촬영을 하면서 ‘우리 영화’라고 불렀고, 영화가 흥행한다 해서 별다른 이익이 없음에도 ‘우리 영화’가 잘되길 누구보다 응원했다. 그럼에도 ‘우리 영화’를 찍으면서 밤을 지새우는 일에 대해, 잠을 못 자게 되는 일에 대해 그 누구도 40~50명의 스태프들과 이야기하지 않았다. 감독급 스태프들과의 상의를 통해 내 피곤한 사정은 괜찮은 것으로 간단히 치부되었다. 실상 ‘우리 영화’에 ‘나’는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할리우드는커녕 우리의 근로기준법마저도 아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피곤한 사정을 개선하고자 촬영조수협회에서 진행했던 운동 중 하나가 ‘일하는 시간 기록하기’였다. 시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니 ‘나의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됐다. 2004년 4부조수연합에서 진행했던 설문에 의하면 하루 평균 16시간을 촬영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74.2%였으며, 25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촬영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88%였다.5) 그러한 와중에 임금체불까지 만연해 있었다. 당시 많은 스태프들은 감독급 스태프가 되는 것이 좀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 길이고 ‘내 영화’라는 타이틀도 갖게 되니 그것으로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도 있었다.

 

아무리 과정의 일환이라고 해도 다음의 사람이 계속 나올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하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단순히 과정이라고 하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과정 역시 소중한 일이고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노동조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연출, 제작, 촬영, 조명 등 4개 부서의 조수협회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제작부협회는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제작사이고 실제로 제작사를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아 노동조합 형태는 적절하지 않다고 내부 의견을 모았다. 결국 제작부협회6)는 제외하고 노동조합 설립 추진위가 구성되었다.

 

3)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이 이러한 의구심의 밑바탕이 되었고, 영화라는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이니 오히려 ‘예술인’에 가깝지 않느냐는 인식이었다.

4) 현장 스태프들의 집합시간을 말하며 통상 그날의 촬영 내용을 정리한 한 장짜리 콜시트를 통해 스태프들에게 전달된다.

5) 2004년 <영화현장스탭의 근로조건 개선과 전문성 향상을 위한 연구보고서> 중.

6) 제작부협회의 주요 구성원들은 2008년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을 설립하게 되고 단체교섭의 사측교섭위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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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설립은 2명 이상 모이면 가능하다고 했음에도 설립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은 출‧퇴근하는 직장이 정해져 있는 곳에 많으니 우리처럼 3개월 정도 지나 촬영이 끝나면 또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는 이들에겐 노동조합 설립필증을 내 주지 않을 거란 우려였다. 노동자 2명 이상이 자주적으로 결성하면 될 줄 알았던 노동조합은 알게 모르게 까다로운 조항이 많았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현장을 갈망했던 사람들이 함께한 덕분에 2005년 12월 15일 드디어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대략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어디서도 이렇게 모여 있는 충무로 스태프들을 본 적이 없었다. 한국 영화산업 최초의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조수에서 노동자로 노동조합 만들기

 

이곳저곳에서 한국 영화산업 최초의 노동조합 탄생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조직 확대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대다수의 영화산업 노동자들은 현장의 문제를 절감하고 있음에도 스스로 노동자라는 인식은 부족했다. 그래서 노동조합 창립 초기 민주노총 및 상급단체로 정한 공공운수연맹, 그리고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을 통해 노동조합 관련 교육을 받기도 했고, 촬영 중인 현장마다 다니면서 조합원 조직에 힘을 기울였다. 노동조합 초기 조직화는 노동조합 추진위로 함께했던 연출, 촬영, 조명 부서 위주로 진행되었다. 대개 함께 일하는 선배를 통해 가입이 이루어졌다.

 

노동조합 창립 이후 주요하게 신경 쓴 것은 단체교섭이었다. 당시 단체교섭의 중심 기조는 ‘근로기준법 준수’였다. 단체교섭이라면 당연하게도 법보다 상회한 수준의 것이었어야 하는데 계약서조차 없는 일이 빈번한 영화 현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변화였다. 뜨거운 기대와 무거운 긴장감을 동시에 껴안고 단체교섭을 준비하고 논의했다. 처음 만든 90여 개의 조항은 근로기준법 및 노동관계 법령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첫 교섭을 위해 한창 촬영 중인 현장의 제작사들을 중심으로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어떤 제작사도 교섭에 응하겠다는 답신이 없었다. 교섭 테이블을 마련하고 맞은편 빈 자리만 바라보던 적도 있었다. 개별 제작사로의 대응이 어려워 한국영화제작가협회7)를 사측 교섭단으로 하여 교섭을 진행하기로 하고 제작가협회에 교섭을 요청하였다. 교섭 말고 간담회로 진행하자는 회신이 왔다. 영화산업 최초의 단체교섭 시작을 위해 분주한 그 무렵 한국 영화계는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미FTA 선결과제로 스크린쿼터 축소가 요구되었다. 우리로선 이제 겨우 노동조합 만들었더니 일자리가 줄어들게 생긴 것이다. 단체교섭에 앞서 우리도 노동자로서 스크린쿼터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청와대 앞 1인 시위, 광화문 문체부 앞 농성, 촛불집회 등 우리의 일자리를 위해 함께했다. 스크린쿼터 축소 폐지 운동과 더불어 그 안에서 현장 스태프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단체교섭 필요성도 제기하였다. 스크린쿼터 축소 폐지 운동 내부에서도 제작사가 단체교섭에 임해야 한다는 말들이 오갔고 결국 제작사들을 단체교섭 테이블에 앉힐 수 있었다. <파업전야>를 만들었던 그들이었기에 수월할 줄 알았던 단체교섭은 그렇게 어렵사리 시작되었다. 그들 딴엔 어찌되었건 노동자의 편이라 생각했는데 노동자에 반하여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는 사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들보다 ‘슈퍼갑’인 대기업 자본의 투자사가 있는데 왜 힘없는 우리에게 교섭을 요구하나 싶어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우리의 노동은 멀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7)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1994년 한국 영화 제작사들이 모여 설립한 단체로 할리우드 직배영화 반대 운동, 스크린쿼터 축소 폐지 운동 등에 참여해 왔음.

 

그렇게 2006년 6월 27일 시작된 교섭은 9개월여 동안 진행되었고 2007년 4월 18일 한국 영화산업 최초의 단체협약이 체결되었다. 영화산업 최초의 노동조합이 체결한 최초의 단체협약으로 단박에 현장이 바뀔 줄 알았다. 단체교섭을 위임한 제작사는 40여 곳이 넘었지만 실제 제작이 진행된 것은 5편 정도에 불과했다. 제작사만 천여 곳에 달하는 상황에 매년 제작사가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니 위임사를 통해 현장을 개선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첫 단체교섭의 흥분을 뒤로 하고 실제 현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고민했다. 몇 개의 제작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산업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합의가 필요했다. 대부분의 한국 영화가 주요 투자사로부터 투자를 받아 제작이 진행되기에 한국 영화 현장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투자사의 참여가 필요했다. 문체부에 찾아가고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법을 지켜 달라고 하는 호소 뒤 우여곡절 끝에 문체부, 제작사, 투자사, 노동조합이 참여한 노사정 합의가 진행되었다. 주요 내용은 근로기준법 준수, 4대 보험 적용, 임금체불 영화의 경우 상영 제재 조치 등으로 2014년 3차까지 합의가 진행되었고, 2015년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영화근로자’ 와 ‘영화근로자조합’에 대한 조항이 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스태프들과 계약 시 ‘임금, 근로시간 및 그 밖의 근로조건’을 구체적으로 밝히도록 하였고 위반 시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단체교섭 체결 10여 년 만에 영화 현장의 근로기준법 적용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시간 넘으면 돈을 더 받는” 꿈같은 먼 나라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를 위한 법이라며 만든 ‘근로기준법’이 영화 현장에 닿는 데 60여 년이 걸렸다. 임금체불에도 노동부를 찾아가면 우리 소관이 아니라며 반려했던 고용노동부의 판단은 대법원을 통해 그들의 소관임이 확인되었고, 임금체불 제작사는 벌금형을 받았다. 한국영화가 나온 지 100년이 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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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3. 영화산업노조 일일 후원주점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출처: 영화산업노조]

 

좋아하는 일을 하니 버티고 견디는 과정으로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감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영화는 감독 혼자서 만들 수 없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조수급 스태프들 역시 일하는 사람으로 온전히 인정받길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감독이 되지 않아도 영화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랐다.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감독,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길 바랐다.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래 잘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로 영화를 꿈꾸었던 사람들이 조수가 되었고 노동자가 되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꿈을 좇는 일이건 돈을 좇는 일이건 일하는 노동자가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노동조합은 그걸 알게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