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207] 청주 페미니스트들의 지방선거 도전기 / 선지현

by 철폐연대 posted Jul 0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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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청주 페미니스트들의 지방선거 도전기

- 기성 정치 문법이 아닌 다른 문법이 필요했다 -

 

 

선지현 • 철폐연대 회원 / 청주페미니스트네트워크 걔네 회원

 

 

 

달라지지 않은 세상에서 달라진 여성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오랫동안 지속돼 왔다. 세상이 바뀌지 않았느냐고? 그렇다. 세상은 분명 변화했다. 여성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고, 여성의 교육 수준도 높아졌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도 높아졌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차별·억압은 사라진 게 아니라 세상의 변화만큼 그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여전히 여성들은 성폭력의 위험에 시달리고 있고, 일터의 차별을 겪고 있으며, 여성의 몸은 통제당하고 있다. 저임금·불안정노동체제의 유지와 심화는 성별분업체계와 맞물려 있고, 혐오와 차별, 배제를 먹이 삼아 유지되는 기득권 체제는 때마다 여성과 소수자를 정쟁의 수단으로 삼거나, 시혜와 보호로 자신들의 탐욕을 가린다.

 

이 오랜 흐름에서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여성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들의 각성이 이뤄진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라고 인식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8년 미투 운동은 여성 자신이 겪었던 폭력과 차별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핵심에는 ‘위계화된 권력’이 있었고, 이를 유지시키는 정치가 있었다. 달라진 여성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소수의 싸움이 아니라 대중적인 투쟁이었다.

 

세상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곳곳에서 모임이 만들어지고 토론이 시작됐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여성의 변화된 행동에 제동을 거는 백래시가 본격화됐다. 청년들이 겪고 있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성별 갈등으로 왜곡됐다. 그 공격의 화살이 ‘페미니즘’으로 향했다. 우리는 성폭력, 성차별, 배제와 혐오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이를 바꾸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페미니즘은 갈등과 대립을 유발하고 남성을 짓밟고 여성의 우월을 과시하는 것으로 왜곡되고 공격당하고 있었다. 대선은 최악의 시기였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유력 대선주자의 말 한마디에 2030 남성들이 몰려들고, 배제당했던 여성들의 권리는 ‘특권’으로 둔갑했다.

진실이 사라진 곳에서 횡행하는 것은 왜곡된 담론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침묵을 강요당했다. ‘너도 페미냐’, ‘페미 무섭다’, ‘무고죄’라는 공격이 나타났다. 지역은 더 심했다. 모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랴….

 

우리를 연결하는 네트워크

 

2021년 11월 1일 청주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청주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걔네)’를 만들었다. 걔네는 지역 페미니스트들이 자유롭게 모임을 만들고 활동하는 네트워크다. 또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결합돼 나타나는 현재의 여성 억압과 차별, 폭력과 혐오에 맞서는 개인과 개인의 연대체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을 통해 억압과 위계, 차별과 배제를 만드는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출범한 걔네는 페미니스트들의 ‘연결’과 ‘연대’를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우리의 연대는 내가 겪는 빈곤이 아니더라도 빈곤한 존재를 향해, 내가 겪는 멸시가 아니더라도 멸시 받는 존재를 향해, 내가 겪는 폭력이 아니더라도 폭력 받는 존재를 향하게 하고 싶습니다. 이 속에서 관점이 다르면 격렬해도 좋은 논쟁을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나와 완벽하게 지향이 일치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 서로 연대하고 싶습니다.” (청주페미니스트네트워크 제안문 中)

 

다소 위축된 모임들을 다시 만들고, 다양한 논의의 장을 만들어 내면서, 온라인을 넘어 일상에서 서로 연대하며 힘을 키워나가기로 한 걔네가 출범 후 마주한 것은 바로 정치권이 확산시키는 백래시였다. 대선이 본격화되면서 그 흐름은 더 커졌다. 걔네에 백래시 대응팀이 구성됐고, 대선 집담회에서는 ‘권리의 주체로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와중에 여가부 폐지 문제가 불거졌다. 백래시 대응팀 활동가들은 서울에서 열리는 여가부 폐지 반대 집회를 지역에서도 조직해 보자고 제안했다. 여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차별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정치권에 맞서는 목소리가 서울로만 모이는 게 아니라 지역에서 나와야 더 많은 여성들의 삶과 만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걔네 주최로 집회가 열렸고 지역 페미니스트들의 연대와 응원이 이어졌다.

 

다른 정치 문법이 필요해! 예비후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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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후보 출마 포스터. [출처: 선지현]

 

 

걔네 소속의 백래시 대응팀은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용인하는 정치는 거대양당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젠더 간의 갈등을 만들어 내면서 백래시를 확산하는 국민의힘만이 아니라 젠더를 위계화하며 이에 폭력과 차별을 용인했던 민주당의 정치 역시 페미니즘 운동이 넘어서야 할 정치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대선에서 보였던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정치는 여성의 권리를 지우는 것으로 귀결됐다. 이대로면 지방선거도 뻔했다.

 

우리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지방선거에서 혐오와 차별의 정치를 부술 다른 정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해 보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거대 정당 중심의 선거제도와 막대한 선거자금 등 기성의 정치 문법으로는 우리가 낄 자리가 별로 없었다. 정당의 청년/여성 할당제를 활용하는 선거 개입은 늘 청년과 여성을 도구화하고 있으니 이 역시 우리의 자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다른 문법을 만들기로 했다. 바로 예비후보운동이다. 예비후보운동은 본선을 나가기 위한 일종의 이름 알리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운동 기간은 90일로 제법 길었다.

 

우리는 집단적인 예비후보 등록을 결의했다. 페미니즘 정치를 전면에 걸고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 보자는 것이다. 바로 ‘떼창’이다. 설사 모두 본선 등록을 하지 못하더라도 남은 50여 일간의 기간 동안 페미니즘 정치를 공론화해 보자는 취지였다. 본선은 예비후보운동의 성과로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다.

 

걔네 회원 중 7명의 활동가가 결의를 했다. ‘나가서 신나게 페미니즘 정치를 떠들어 보자’는 그 마음 하나로 모였다. 우리는 선거 활동을 위해 ‘청주페미니스트연대’를 구성했고, 모임을 시작했다.

 

‘성평등한 지방자치’를 주제로 다양한 학습과 토론이 이어졌다. 지역 여성단체들을 찾아 다니며 지역 현황도 정리했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여성의 권리가 소수자의 권리와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다.

4월 4일 페미니스트 7인의 예비후보 출마 기자회견을 열었다. ‘페미니즘이 당당한 청주’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7인의 후보들은 “페미니즘은 여성의 언어이지만 모든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정치다. 양당체제를 넘어 다른 정치를 상상할 수 있게 페미니즘 정치를 알릴 것”이라고 외쳤다. 기자회견을 열고 나니 관심이 뜨거웠다.

 

주변의 관심은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벌어지는 시도’, ‘2030청년여성의 집단적인 페미니즘 정치 도전’, ‘정당 소속이 아닌 무소속연대’라는 것으로 모아졌다.

 

여성과 소수자도 권리의 주체! 목소리를 내자!

 

7명의 예비후보 중 정당 소속은 1명이었다. 노동당 후보 역시 걔네 활동을 함께해 왔던 활동가다.

 

학생, 직장인, 사회단체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예비후보들은 ‘청주페미니스트연대’를 구성했다. 선관위에서는 정당과 무소속이 함께 구성한 청주페미니스트연대가 선례가 없다며 숙고를 거듭했다.

 

선례가 없다는 건 금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우리는 청주페미니스트연대로 예비후보운동을 시작했다. 전국 777명의 페미니즘 정치에 대한 지지, 성 평등한 지방자치를 이야기하는 챌린지, 차별금지법제정 촉구 농성, 페미니즘 정치를 알리는 각종 간담회와 모임까지 숨 가쁘게 달렸다.

 

후보들은 각자의 공약으로 동영상과 카드뉴스를 직접 만들었다. 대부분 퇴근 후에 이뤄졌다. 선거를 한다면서 퇴근 후에 모여 선거운동을 한다는 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는 생각이 달랐다. 우리는 페미니즘 운동을 하면서 ‘선거도 하는’ 것이었고, 일상을 지키면서도 정치 참여를 이뤄 보자는 생각이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주권자들의 정치 참여가 투표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이렇게 우리는 기성의 문법을 깨면서 선거를 치렀다.

 

본선이 다가왔다. 예비후보운동에 대한 많은 관심과 지지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다. 후보자 7명 중 3명이 본선 참여를 결의했다. ‘페미니즘 정치로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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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8. 본선 출마 기자회견. [출처: 선지현]

 

 

여성이지만 노동자이고, 장애인이고, 청년이고, 이주민이고, 노인이고, 빈곤층이고, 성소수자이기도 한 이들의 목소리로 다른 정치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재미있게, 기발하게, 치열하게’ 본선을 치렀다. 이주민이 밀집된 곳에 외국어 현수막을 달았다. 이 역시 선례가 없어 선관위 숙고를 기다려야 했다. 민주당 앞 차별금지법 농성을 후보들이 하는 것도, 선거사무소를 따로 차리지 않고 집에 두는 것도 모두 선관위에서는 낯선 사례들이었다. 낯선 사례와 마주하는 일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더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니 말이다.

 

본선에서는 우리는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버스킹을 하기도 하고, 선거운동원들이 배너를 메고 거리를 누비며 기존과는 다른 선거운동으로 13일을 채웠다.

 

우리의 득표는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거운동은 감히 빛났다고 자부한다. 2016년, 2018년 함께 분노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침묵하던 많은 지역 여성들과 눈을 맞추며 우리는 연결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서울로 가지 않아도, 거대한 담론을 만들지 못해도, 우리가 서 있는 지역에서 우리는 서로를 연결하며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내겠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