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210] 기록과 노동, 돌봄과 동료됨의 지속 가능성 / 희정

by 철폐연대 posted Oct 0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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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바닥 일기

 

 

기록과 노동, 돌봄과 동료됨의 지속 가능성

 

 

희정 • 기록노동자

 

 

 

기록노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낯선 명칭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고, 노동자라고 이름 붙인 것이 마음에 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기록노동자란, 말 그대로 기록을 노동 삼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글을 쓰지만 내 이름 앞에 작가라는 말은 붙이지 않기로 했다. 처음 쓴 글이 청소노동자에 관한 이야기이고, 두 번째 쓴 글이 쌍차 해고 노동자 이야기였다. 글 속에 담긴 사람들을 쌍차 노동자, 청소노동자라 명명해 놓고 글 밖에서 내 이름에 작가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적합도, 정당도 아닌 그저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집필노동자라 나를 불렀다. 글 쓰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후에 기록노동자로 명칭 변경을 했다. 수많은 글 중에서도 나의 관심사는 르포르타주, 기록글이다.

 

기록의 시작

 

주로 노동에 관해 쓴다. 10년 전, 내가 졸업한 학교에 청소노동자 노조가 만들어졌다. 이를 돕는 학생들이 있었고, 운이 좋게도 내가 아는 후배들이었다. 그들을 쫓아다녔다. 재미있어 보였으니까. 교내 건물 가장 후미진 곳으로 가면 어김없이 ‘미화원 휴게실’이 있었다. 대학 시절 내내 ‘노동자’라는 단어를 참 많이 듣고 썼는데. 그렇게 오래 학교를 다니고도 제대로 본 적 없고 인사조차 나눈 적 없는 노동자들이 간판 없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은 그런 마법을 부리려고 있는 존재다. 심지어 이들을 ‘아주머니’라고 부르고자 버티던 대학 교직원마저 이들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자 노동 같은 것은 통하지 않게 됐다. 이들이 묻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동을 아는가. 그들의 물음이 세상의 렌즈를 벗겼다. 그 순간, 정말로 나는 이들의 노동이 궁금해졌다.” (<두 번째 글쓰기>, 181쪽.)

 

종종 휴게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열악한 환경’이라는 말로 쉽게 표현했던 그들의 노동이 ‘일의 기쁨과 슬픔’이 되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이게 나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록노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록 A/S

 

처음에는 씩씩하게 찾아다녔고, 재미있어서 썼다. 그런데 나는 녹음기를 꺼내 놓지만 저 사람은 인생을 내놓는 일이라, 이 불공정 거래를 지속할수록 후회가 쌓이는 일이 많았다. 기록노동에서 잠시 벗어나(잠시, 라고 생각했는데 그만 4년을 떠나 있었다) 노조 상근 활동을 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안 되겠다. 내가 썼던 기록물들을 A/S 해야겠다.

 

<노동자, 쓰러지다>를 쓰고 좋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잔혹한 산업재해 현실을 꼼꼼하게 기록했다는 평도 있었다. 열심히 기록했지만, 꼼꼼하진 않았다. 글의 빈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인터뷰이를 보는 시선에 빈틈이 있었다. 그 책의 첫 장에 이런 문구를 썼다. 출간 직전에 추가한 문장이었다. “이 책이 소꿉장난 같다.” 이 말은 세상의 잔혹함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후회가 아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너무 한계적이라는 고백이었다.

 

기록은 기록자가 세상을 보는 만큼 나온다. 인터뷰이의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기록자는 인터뷰를 하고도 자신의 세상밖에 써낼 것이 없다. 기록을 하러 갔는데 사람이 죽으니 화가 났다. 내가 사는 사회도 나처럼 공분해 주길 바랐다. 사람들이 공분해야 이 죽음이 멈출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본 그/녀들의 모습을 열심히 전달했다. 그렇게 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다룬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을 썼다. 나의 첫 책이다. 하지만 출간한 지 10년쯤 된 지금도 종종 후회를 한다. 내 시야 안으로 그들을 가둔 것이 아닐까.

 

내가 그들의 편(?)이었건, 나의 분노가 진심이었건 간에 나에게 그들은 ‘피해 당사자’에 머물렀다. ‘피해자’라는 수동적인 역할 외엔 떠올리진 못했다.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공부를 곧잘 해 가족과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대기업 생산직으로 가서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일하다가 병에 걸린 젊은 반도체 오퍼레이터. 요약하면 이 정도 되는 설명 어디에도, 그들이 나처럼 욕망하고 갈등하고 변동하고 후회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들을 ‘좋은 딸’로만 묶어둔 것 같아 기록집을 내고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나 자신도 ‘착한, 누군가의 무엇’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싫은데, 더는 항변도 못 할 사람들의 인생을 평평하게 만들어 세상의 공분을 구한 것은 아닌지. … 젊은 여성을 클린룸에 유폐하고 ‘근면하고 순한’ 노동자로 통제한 것은 기업과 가정의 무의식적인 공모만은 아닐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295쪽.)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도 인터뷰이들도 각자의 삶을 살아갔다. 이들은 삶을 통해 자신이 결코 마네킹이 아님을 증명했다. 매 순간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일상이었다. 그것은 아픈 몸마저 훼방을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한 기록도 그들의 삶을 가두지 못했다. 다만 내가 좀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던 중 반올림 제안으로 2세 질환 직업병 문제를 기록하게 됐다. 클린룸의 독성 물질은 일하는 노동자의 몸에만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자녀가 아팠고, 우리는 이것을 직업병이라 불렀다. 생식에 관여하는 독성 물질과 환경 요인이 있었다. 어느 일터에나. 이 기록을 위해 다시 만나게 된 반도체 전직 오퍼레이터들. 그들은 이제 누군가의 좋은 딸이 아닌 각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모습을 기록했다.

 

나에겐 A/S의 결과물이기도 한 기록집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오월의봄)이 세상에 나올 채비를 하고 있다(이 글을 사람들이 볼 즈음에는 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내가 예전보다 나은 책을 썼다고 말할 순 없다. 고친다고 고쳤는데 잘못 고쳤을 수도, 다른 곳이 곪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널리 읽히길 바란다. 힘겹게 썼으니까, 힘겹게 말해 준 사람들이 있으니까.

 

 

3. 본문사진.jpg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2022년 10월 오월의봄 출간) 표지 이미지.

 

 

지속 가능한 노동

 

나의 노동은 힘들다. 해야 할 일이 많고, 주의해야 할 것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 마음이 무너지면서 기쁜 일들도 많다. 이런 말도 듣는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글을 써 달라.” 그러기에 오늘도 이 노동을 한다.

 

그런데 ‘노동’과 ‘투쟁’에 가까운 글을 쓸수록 청탁 횟수와 원고료는 줄어든다. 어떤 언론사가 싸우는 노동자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합당한 원고료까지 준비해서 청탁을 할까. 마음이 있으면 자원이 없고, 자원이 있다면 마음이 없을 것이다. 기록노동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직업이 되기에는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다. 기록 활동을 전업으로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찬 바람이 불면 이 생각을 하지 않을까. 다음 해에도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올해로 기록노동을 한 햇수가 9년이다. 엄살을 피운 것치고 오래 버텼다. 오래 버티기 위해 내내 일했다. 야박한 원칙도 세웠다. 원고료를 주는 곳에 우선으로 기고하고, 한 해 한 권 이상의 책을 출간한다는 것. 최대한 나의 노동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선택한 방식이지만, 숨이 찼다. 놓쳐 버린 많은 것들이 있었다. 일상의 소소함, 가족 구성원으로의 책임, 친구에게 내줘야 하는 시간, 심지어 길가의 농성장을 들리는 일까지. 누군가를 돌보고 내가 돌봄 받아야 하는 대부분 시간이 글 작업에 들어갔다. 이렇게는 안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내가 기록노동을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는데, 이따금 주객이 전도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대안이 있다. 부족한 나에게 절절매지 말고, 의미 있는 싸움을 의미 있게 기록해 줄 동료들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록팀 중 하나가 싸_람(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이다. 기록팀을 꾸리고도 나는 여전히 여력이 없어 끙끙거리지만 나의 동료들은 활발하다. 대우조선, 유천초, 소성리, 한화생명 등 투쟁이 있는 곳에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속 가능한 노동은? 해결된 것이 없다. 각자 혼자 하던 고민을 이제는 여섯 명의 팀원이 머리 맞대고 할 뿐이다. 돈 구할 고민. 기록과 노동, 돌봄과 동료됨을 지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아직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숙련과 노동

 

최근에는 숙련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베테랑의 몸>(한겨레21). 오랫동안 성실하고 또 성실했던 이들을 만난다. 이들이 몸에 붙인 기술과 숙련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기획 단계부터 걱정이 하나 있었다. 개인의 숙련에 관한 이야기라, 개인적 노력이나 분투로 이야기가 귀결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막상 만나니, ‘동료’나 ‘우리’를 언급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노동은 결코 혼자 이뤄지지 않는구나. 그렇게 배운다.

 

노동을 몸에 붙이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서인지, 요즘 나의 노동을 바라볼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 묻듯 나 자신에게도 물어야겠다. 내 노동의 의미와 숙련은 어떻게 나의 몸과 삶에 새겨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