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211] 임신중지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이제는 당연한 우리의 권리로 / 나영

by 철폐연대 posted Nov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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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인권

 

 

임신중지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이제는 당연한 우리의 권리로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의 출범과 요구 -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2022년 8월 17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이하 모임넷)’의 출범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2017년에 발족해서 ‘낙태죄’ 폐지를 위해 함께 투쟁했던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하 모낙폐)’ 활동이 2021년을 마지막으로 해소된 이후 8개월 만에 새로운 연대체가 결성된 것이다. 모임넷에는 모낙폐 활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단체들과 임신중지 비범죄화 이후의 과제들을 이어서 투쟁해 가고자 하는 여러 단체들이 모였다.

 

현재 한국은 ‘임신중지 비범죄화’의 상태에 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결정문에서 명시했던 개정 입법 시한인 2020년 12월 31일까지 새로운 법의 제정이나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한국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 조항은 법적인 실효가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임신을 중지한 당사자도, 관련 의료 행위를 한 의사나 조산사, 약사 등 어떤 사람도 임신중지를 했거나 도왔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모낙폐는 ‘낙태죄 폐지’를 목표로 했던 만큼 형법상 ‘낙태죄’의 법적 실효가 사라진 후 1년의 시간을 지켜보며 활동을 마무리하였지만, 처벌이 사라졌다고 해서 운동이 끝날 수는 없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진정한 목표는 처벌의 폐지에 있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권리 보장과 이를 위한 불평등과 부정의를 해소해 나가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임넷의 출범은 ‘낙태죄’ 폐지 운동이 목표로 했던 첫 번째 단계를 지나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는 재생산정의 운동으로의 전환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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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7.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출범식. [출처: 노동과세계]

 

 

입법 공백이 아닌 ‘책임의 공백’을 묻기 위해

 

헌법재판소가 명시했던 개정 입법 시한이 경과한 이후 관련 정책과 제도의 변화가 지연되면서 현재의 상황을 여전히 많은 곳에서 ‘입법 공백으로 인한 혼란의 시기’라고 말한다. 국회에서 처벌과 허용의 기준을 새롭게 정하지 않아 어디까지가 가능한 행위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와 식약처 등 관련 보건당국에서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회적 합의가 어렵다는 핑계로 정책과 제도의 추진을 계속해서 지연시키고 있다.

 

그러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 행위와 건강보험 등의 보장 제도를 추진하는 데에 있어서 먼저 ‘어떤 임신중지를 허용할지에 대한 법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제도 마련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먼저 넘어서야 할 걸림돌이다. 이는 여전히 임신중지를 법적 처벌이 필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결정권 중 무엇을, 어느 시기에, 어떤 기준으로 보호할지 그 기준을 법으로 규정하여 ‘조정’해야 한다는 오랜 착각을 벗어나야 한다. 법은 그에 대한 합리적 기준이나 정답을 정할 수 없을뿐더러 처벌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사회적 효과나 이익도 전혀 없다. 임신중지는 단순히 임신한 당사자와 태아와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수많은 사회경제적 조건과 관계, 보건의료적 상황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생계와 양육을 책임질 수 있는지의 여부, 구체적인 삶의 조건들을 가늠하며 임신중지를 결정한다. 임신 기간, 허용 사유 등을 아무리 구체적으로 명시한다고 하더라도 법은 이를 둘러싼 상황들을 모두 다룰 수 없다. 결국 법적 처벌은 임신 당사자의 권리를 제약하면서 결정 시기만을 늦어지게 만들거나, 파트너나 가족 관계, 의료기관, 직장, 학교 등의 공간에서 차별과 낙인, 폭력에 취약해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안전하지 못한 보건의료 환경에 처하게 만들 뿐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의 법적 실효가 사라진 지금, 이제 임신중지는 처벌과 허용에 관한 법적 기준을 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건강권과 사회적 권리의 보장, 불평등과 부정의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다뤄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상황은 입법 공백이라기보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할 정부와 국회가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책임의 공백’ 상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임넷은 8월 17일 출범식에서 이제 그 책임을 구체적으로 묻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위한 일곱 개의 요구안을 발표했다.

 

권리 보장을 위한 7대 요구안의 의미

 

모임넷의 7대 요구안은 다음과 같다.

 

하나, 임신중지 관련 의료행위에 건강보험 전면 적용하라

둘, 유산유도제를 하루속히 도입하고 접근성을 확대하라

셋,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를 구축하라

넷,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종합 정보 제공 시스템을 마련하라

다섯,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교육을 실행하라

여섯, 사회적 낙인을 해소하고 포괄적 성교육을 시행하라

일곱,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을 위한 법 체계를 마련하라

 

가장 우선순위에 놓인 것은 건강보험 적용 범위를 확대하라는 것이다. 현재는 모자보건법 14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모자보건법 14조는 형법상 ‘낙태의 죄’와 관련하여 허용 한계(위법성 조각사유)를 명시했던 조항이기 때문에 ‘낙태죄’의 실효가 사라진 지금 이를 그대로 적용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모자보건법 14조는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 정책하에 제정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고 차별적이며, 우생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을 전면 적용하라는 요구는 무엇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국가의 인구정책 목적과 맞물린 처벌-관리 체계하에서 다루어져 온 임신중지를 건강권의 영역으로 공식화하라는 요구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임신중지에 대한 건강보험 보장은 당연히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임신중지는 오랫동안 처벌과 낙인의 대상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모자보건법 14조에 해당하는 경우만이 보험 적용의 대상으로 남아 있게 되면 의료기관에서는 당사자의 건강 상태나 여러 사회경제적 상황, 당사자가 처한 조건 등을 고려하여 필요한 진료와 상담, 정보 제공, 지원 방안 등을 적극적으로 찾기보다는 이전까지의 관행대로만 처리하려 하거나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게 된다. 임신중지를 해야 하는 이들도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시기를 계속 늦추게 되고, 우선 돈을 구하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이런 상황들은 당사자를 상대방이나 다른 가족구성원 등 제3자의 요구에 더욱 취약해지게 만든다.


건강보험 적용과 함께 유산유도제의 도입도 우선 과제이다.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는 시술적 방법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들고 임신 초기일수록 스스로도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병원을 자주 가기 어렵거나 비용에 부담이 있는 사람들의 임신중지 접근성을 높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가까운 산부인과 병/의원이 많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는 경우, 노동시간이나 노동 조건, 다른 돌봄이나 양육 상황 등으로 인해 따로 시간을 내어 병원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 어려운 이들에게는 더욱 필요하다. 현재 승인이 검토되고 있는 약은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의 콤비팩이다. 이 약들은 세계보건기구에서 각국에 권장하는 ‘필수핵심의약품’의 목록에 있는 공식 의약품이다. 필수핵심의약품의 목록에 있다는 것은 각국이 그만큼 누구나 약을 이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장벽을 없애고 언제든 약을 공급할 수 있도록 충분히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식약처는 지난 2021년 7월에 허가가 신청된 이 약을 아직까지도 승인하지 않고 처리 절차만 계속해서 지연시키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여전히 온라인에서 비공식적으로 유통되는 약을 구할 수밖에 없으며, 미소프로스톨이나 다른 약물을 이용해 임신중지를 하는 병원에서도 약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거나 사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유산유도제를 하루속히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산부인과뿐 아니라 가까운 의료기관을 통해서도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필요한 시기에 안전하게 약을 복용하고 임신중지와 관련된 건강 관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의 요구는 임신중지에 관련된 보건의료 체계의 구축과 정보 제공, 상담, 관련 지원 영역에서의 권리 교육과 포괄적 성교육을 공식화하라는 것이다. 임신중지도 다른 의료행위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진료 연계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병원도 제각각이고, 공식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 1차 의료기관에서 하기 어려운 시술이나 추가 지원이 필요한 경우 관련 연계 기관을 바로 찾기가 어렵다. 지역 간 의료인프라의 격차도 매우 크다. 뉴질랜드, 캐나다, 영국 등 여러 국가에서는 가까운 1차 의료기관에서부터 국공립 의료기관에 이르기까지 연계 체계를 갖추고 정부 보건당국 차원에서 공식 사이트와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임신중지에 필요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단순히 임신중지 방법이나 후유증 같은 것을 알려주는 수준이 아니라 임신 사실의 확인에 관한 사항부터 시술이나 약물을 이용한 안전한 임신중지 방법, 임신중지 전/후 가이드, 자신에게 맞는 피임 방법에 관한 안내, 폭력 상황이나 여러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필요한 연계 기관의 안내, 가까운 시술·처방 의료기관 안내, 교육 기관·일터에서의 권리 보장에 필요한 정보 등 다양한 정보와 연계 시스템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 제공과 연계 지원에 관한 사항들이 당연한 권리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포괄적 성교육을 통한 교육뿐 아니라 예비/보건의료인, 상담 인력, 교사, 기업의 담당자, 사회복지 관련 종사자, 의료지원 관련 통·번역사, 활동보조인 등 각 현장에서 당사자를 직접 만나는 이들에 대한 권리 보장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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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7.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출범식. [출처: 참세상]

 

 

임신중지 권리 보장, 성·재생산 권리 보장의 요구를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로

 

모임넷 요구안의 마지막 일곱 번째 항목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 기본법’과 관련 법 체계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월경통이 있으면 월경휴가,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생리대 지원, ‘위기임신’인 경우에 상담과 지원을 제공하는 식의 선별적, 시혜적 지원 방식을 중단하고 성건강에서부터 월경,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까지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관한 사항들을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권리로서 보장하라는 요구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임신중지를 포함하여 노동자의 성·재생산 건강을 위해 안전한 노동환경을 보장할 국가, 지자체, 기업의 책임과 성·재생산 건강의 보장에 필요한 유급 휴가, 비용 지원 등의 보장을 명시하라는 내용이 포함된다.

 

2021년 모낙폐에서 실시했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한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에서는 많은 이들이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 병원을 찾고, 현금으로 적게는 백몇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부담하고, 그러면서도 의료진으로부터 제대로 된 설명 한 번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이후 병원비를 갚기 위한 무리한 노동으로 후유증에 시달렸던 사례들을 이야기했다. 회사에서는 임신중지 사실을 말할 수 없어 그대로 다시 출근하고 휴식도 취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런 현실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잊지 말자. 안전한 임신중지는 불평등의 문제이다.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도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