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402] 삶의 최저선을 높이는 홈리스 운동 / 홍수경

by 철폐연대 posted Feb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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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운동의 목소리

 

 

삶의 최저선을 높이는 홈리스 운동

 

 

홍수경 •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공장소에서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없거나 열악한 거처에 사는 홈리스입니다. 홈리스행동은 작년 6월부터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서울역 앞 지하보도에서 홈리스 강제퇴거를 감시하는 피케팅을 하고 있습니다. 지하보도와 연결된 민간기업 ‘서울스퀘어’ 보안직원들이 그곳에서 머무는 홈리스에게 ‘영업에 방해된다’며 밤 10시 이전에 오지 말라 부당하게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해당 지하도의 소유·관리 주체는 서울시로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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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 지하보도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홈리스야학 학생. [출처: 홈리스행동] 

 

 

한두 해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사유화된 공공장소는 소비력을 갖춘 사람만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변하며 그곳에서 생활해 온 이들은 강제퇴거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2011년 코레일의 ‘서울역 야간 노숙행위 금지’ 조치로 수많은 홈리스가 역에서 쫓겨났습니다. 2017년 서울시는 ‘서울로 7017 고가공원’ 개발을 위해 서울역 앞 지하보도에서 생활하던 홈리스 약 60명에 대한 퇴거 조치를 강행했고, 같은 해 용산역에서 호텔로 연결되는 공중보행교가 건설되며 홈리스와 노점상이 호텔 경비용역에 의해 부당하게 퇴거당했습니다. 코로나 확산이 심각했던 2020년 5월 부산역에서 24시간 운영하던 심야 대합실을 폐쇄하고 홈리스를 역사 안에서 퇴거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로 공공장소에서 추위를 피하고 쪽잠을 자던 홈리스들은 대책 없이 쫓겨나 더 열악한 곳으로 내몰렸습니다.

 

홈리스를 내쫓는 것은 이들이 거리, 지하보도, 공공역사 등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지웁니다. 홈리스의 존재는 ‘노숙인 등’에 대한 주거권 보장에 책임이 있는 정부와 지자체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자 결과이며, 홈리스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더욱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모는 것은 문제를 더욱 해결하기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홈리스 운동은 공공장소가 기업의 이윤을 위한 차별적 공간이 아닌 누구나 점유할 수 있는 평등한 공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노숙인이 아닌 홈리스 

 

‘노숙인’이 아닌 ‘홈리스’라는 용어 사용이 낯설 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노숙인복지법)」 제2조(정의)에서 “노숙인 등”은 거리, 노숙인시설 생활자 이외의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고시원, 여인숙, PC방 등 집이 아닌 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포괄해야 하지만 정부, 지자체의 모든 홈리스 정책에선 그 대상을 거리, 시설, 쪽방 거주자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2021년 거리와 시설, 쪽방을 중심으로 한 ‘노숙인 등 실태조사’에서 ‘노숙인 등’은 1만 4,404명입니다. 조사에 포함되지 않아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비적정 거처 거주자는 2017년 36만 9,501가구에서 2022년 44만 3,126가구로 20% 가까이 급증했습니다.

 

사전적 의미의 ‘노숙인’은 ‘이슬을 맞고 자는 사람’, 즉 거리 노숙하는 이를 뜻합니다. 협소한 의미의 ‘노숙인’ 뒤에 ‘등’을 붙인다고 해서 법과 정책이 포괄해야 하는 대상을 대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빈곤 운동진영에서는 (포괄적 정의 규정 차원에서라도) 집(home)이 없다(less)는 뜻인 ‘홈리스’라는 용어 사용을 지향합니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구성되는 사회적 관계와 권리 등이 박탈된 상태를 표현하기에 더 적절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실효성 없는 홈리스 지원체계 

 

홈리스 당사자들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노숙인복지법」은 2011년 제정 당시부터 제기된 법률의 한계에서 나타나는 문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선 상기 언급한 정의 규정만으로는 법률이 규정한 복지서비스를 신청하고 수급할 수 있는 대상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비적정 거처에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거, 급식, 의료, 고용지원 등 복지서비스에 관한 사항은 모두 임의조항으로 공공에 강제할 수 없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과반의 내용이 노숙인시설 설치·운영에 관한 조항이며, 홈리스에게 필수적인 복지서비스를 받기 위해선 시설을 경유하도록 설계돼 있어 시설중심체계를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열악한 홈리스 지원체계와 인권보장 수준은 단적으로 많은 홈리스의 때 이른 죽음으로 드러납니다. 2022년 보건사회연구원 ‘노숙인 의료지원제도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홈리스 경험자의 사망률은 전체인구집단에 비해 약 4.18배 높습니다. 홈리스의 사망률은 고령화와 건강 상태 악화로 인해 10배 이상의 증가세를 보입니다. 

 

삶의 최저선을 높이는 홈리스 운동 

 

극한 빈곤 상태에 처한 홈리스는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되기보다 삶 전반에 걸쳐 쌓여 온 경험과 시간이 낳은 총체적 결과입니다. 불안정·저임금 노동, 실직 또는 사업실패, 질환, 이혼 및 가족해체 등 오랫동안 다양한 요인이 다층적으로 작용하여 홈리스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간 우리 사회는 사회구성원이 되기 위한 기준을 ‘노동’으로 상정하고 홈리스를 무능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해 왔습니다. 이런 시선은 고달픈 각각의 삶의 서사들을 납작하게 눌러 버립니다. 홈리스 진입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손실, 열악한 환경에서 건강의 악화, 사회적 지지망 단절 등은 개인의 노력과 의지 따위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아래를 받쳐 주는 튼튼한 그물망이 있다면, 일의 세계에서 밀려나 이르는 곳이 천 길 낭떠러지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대가 없는 나쁜 일을 참지 않고, 부당한 일에 한 번쯤 목소리 높여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홈리스 운동은 홈리스 대중의 조직된 힘을 통해 사회보장 해제 공세에 맞서 인권과 복지의 그물망을 만들고, 삶의 최저선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분발합시다” 

 

2년 전 혹한이 이어지던 겨울, 서울역 광장에 거주하던 두 명의 홈리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해 거리와 쪽방, 시설 등지에서 생활하던 무연고·홈리스 사망자가 서울에서만 442명이었습니다. 심화된 빈곤 속에서 매년 세상을 떠나는 무연고·홈리스의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울역 광장에서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작은 추모제를 진행했습니다. 고인의 홈리스 동료가 쓴 추도사를 공유합니다. 계속될 홈리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에 함께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일주일 전쯤 구 헌혈의 집 한쪽 끝에 조용히 텐트 치고 지내던 얼굴도 모르는 우리 옆의 형제가 이번 추위 속 며칠 전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여 남의 일 같지 않아 너무도 마음이 착잡할 뿐입니다. …… 노숙 생활이 결코 우리들이 나태하고 게을러 된 내 탓만이 아니라 나라의 책임이 더 큰 것이기에 비록 구차한 생활이라도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우리들의 권리를 주장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지 지원을 최대한 당당히 받아내야 합니다. …… 우리들이 광장에 텐트 치고 사는 자체가 그 어떤 집회시위보다 더 효과적인 무언의 시위이기 때문에 우리 노숙인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 땅의 최저층의 서민을 위한 요원의 불길이 되어 이 나라 최대 당면과제인 빈부격차, 양극화 해소에 일익을 담당하자는 작은 사명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 분발합시다.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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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세상을 떠난 두 명의 홈리스를 기억하며 진행된 추모제에서 고인의 동료들이 남긴 추모 메시지. [출처: 홈리스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