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208]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로 살기 / 최민

by 철폐연대 posted Aug 0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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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바닥 일기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로 살기

 

 

최민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저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라는 노동자 건강권 단체에서 8년 차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단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직업환경의학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해 5년간 병원 생활을 했습니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 과정을 시작할 때부터 ‘노동자 건강권 활동’을 염두에 뒀던지라, 활동을 시작한 지 벌써 12년이 넘었네요.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경험을 편안하게 써 달라’고 하셨지만, 오랜만에 돌아보니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반성도 하게 됩니다.

 

의사인데/이지만 활동가로 살기

 

1997년 의대에 입학하였습니다. 1990년대에 대학에 간 다른 여러 사람처럼 학생운동을 접하고 인생이 달라졌지요. 의사가 되기보다는 이 세상을 직접 뒤엎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학교에 과감히 자퇴서를 내고, 학생운동 조직과 시민·사회단체에서 20대를 대부분 보냈습니다. 1년 반 동안 작은 시민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실망이 컸습니다. 하루하루의 일상에 묻혀 서로의 생각과 사상을 나누고 발전시킬 시간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운동가’로 살고 싶었지만 ‘시민단체 상근자’로 사는 나날이 계속되었고, 개인의 발전에 대한 고려는 없는 기능적이고 편의적인 분업 구조 속에서 일했습니다. 기자회견과 토론회 개최 중심의 활동 방식도 내가 지금 누구를 상대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자꾸 헷갈리게 했습니다. 아주 작고 (어떤 측면에서는) 유연한 조직이었음에도 이런 일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함께 일하던 젊은 활동가 둘이 단체를 떠나면서, 저도 상당한 패배감을 가지고 본과에 다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도망치듯 돌아간 학교여서 전처럼 삶을 걸고 싶은 일을 만나지 못하고 막연히 ‘양심 있는 좋은 의사’로 살아야 하나 싶던 본과 4학년 2학기에 직업환경의학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 노동자든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을 증진시키고, 일이 인간에게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이 직업환경의학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학생 때 연대했던 산재노동자협의회도 생각나고, ‘내가 하면 잘할 수 있겠다, 재미있겠다, 이걸 전공하면 운동하며 살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이 일을 함께할 사람과 조직을 찾던 중 지금 일하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소 활동을 하면서 직업환경의학과 전공의로서도 많이 배웠지만 동시에 ‘동지들과 함께 일하는 것의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직과 함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운동’하는 것이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보니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나서 진로로 가장 적당한 곳이 연구소 상임활동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소 활동이 현장에 천착한 노동안전보건 전문가로서의 전문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전문지식과 현장 노동자의 궁금함을 연결하고, 제가 가진 지식으로 운동의 촉매가 되도록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부족하지만 꿋꿋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일할 권리, 작업중지권

 

노동안전보건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작업중지권 복원’을 위해 여러 현장의 노동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모아 보려 했던 것입니다. 처음 작업중지권 얘기를 들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2013년 추석 연휴 직전, 한 대학교 구내식당 조리실에서 환풍기가 고장 났습니다. 수리를 요청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다른 업무가 바쁘다고 환풍기 수리가 당일에 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공교롭게 연휴가 시작되어 수리는 더 지연됐습니다. 결국 연휴가 끝난 3일 뒤까지 환풍기는 고쳐지지 않았고, 노동자 중 한 명이 근무하다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고 말았습니다. 일산화탄소 중독 진단을 받았습니다. 식당과 학교 측이 환풍기 고장을 방치해서 발생한 산업재해인 셈이지요. 이 학교 식당 조리 노동자들이 노조에서 활동하는 노무사를 찾아와 이때 얘기를 하면서 ‘죽을 뻔했다’고 무용담처럼 털어놓았답니다. ‘아니 왜 그 지경인데 일을 멈추지 않았어요?’ 묻는 활동가에게 조합원들은 그래도 되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이게 제가 책에서나 보던 ‘작업중지권’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처음 실감하게 되었던 사례였습니다.

 

작업중지권이라고 하면 천장에서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거나 건축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재래형 사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대학 식당 환풍기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위험에 대해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입니다.

 

작업중지권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노동자 안전과 건강 문제가 안전 규정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권리 문제라는 것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위험에 대해 노동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힘, 판단대로 행할 수 있는 조직력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노동자 건강을 관리하는 전문가로 남기보다 현장의 힘을 키우는 데 일조하는 활동가로 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노동조합이 있는 아주 일부 현장에서조차 작업중지권을 노동자들이 쉽게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를 널리 알리고 ‘안전은 권리 문제다, 우리가 되찾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업중지권을 노동조합에서 잘 사용하는 사업장, 꼭 필요한데도 고용과 임금 문제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업장, 작업중지권을 사용해서 사고를 막은 사례, 작업중지권 사용 후 회사에 의해 고소당한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모으고, 이 문제를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부 고용이 안정적인 금속노조 사업장에서나 가능한 얘기라는 냉소도 많았는데 지금은 폭염 시에,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강풍이 불 때, 고객이나 동료에 의한 폭력이 발생할 때, 어디서든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해야 하는 권리로 인식되게 된 것에 작게나마 힘을 보탠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아직 여전히 작업중지권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먼 현실이고, 기본적인 안전수칙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장에서 항의조차 못 하고 일하다 죽고 있지만, 우리 권리에 이름 붙이고, 먼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3. 본문사진1.jpg

2015년 단체 상근을 시작한 첫해, 노동절 대회에서 작업중지권 배지를 판매하며.

 

 

분절된 노동을 극복할 수 있는 힘

 

최근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법적인 ‘근로자’와 그렇지 않은 노동자들, 남성과 여성,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잘게, 깊게 나뉜 노동자들 사이의 분절을 넘는 데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기준으로 하는 노동안전보건운동이 기여해야 한다는 고민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자본의 속도와 강도 대신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을 기준으로 하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몸을 기준으로 한다면, 심야 노동은 발암물질이라고 주야맞교대를 주간연속2교대제로 전환해 놓고도 새벽에 잔업을 하고 싶어 하는 불안한 노동자들이 우리 모두를 덜 불안하게 하는 제도를 만드는 데 힘을 합칠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 몸 갈아 넣는 ‘잔업/특근’을 못 한다는 이유로 하청 노동자들의 절박한 점거/파업 투쟁을 외면하는 것은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요?

 

올해, 초단시간 노동자 실태조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동안 쉽게 만나지 못했던 노동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주 15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법에도 따로 없는 ‘초단시간 노동자’로 여러 차별을 받습니다. 근로기준법에서 주휴수당과 연차의 적용이 제외되고,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에서도 제외됩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에 따라 퇴직금 적립도 제외되고,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계속 근로한 총 기간이 2년을 넘어도 무기계약 전환에서 제외됩니다.

 

유난히 초단시간 노동자를 많이 사용하는 한 기관의 인사 담당자는 ‘고용과 비용’ 때문이라고 담백하게 말하더군요. 직장건강보험과 국민연금, 퇴직금과 주휴수당, 연차 비용 등을 모두 고려하면 20% 이상 비용이 증가한다고요. 노동시간이 너무 짧은 노동자를 여럿 사용하는 게 관리자 입장에서 힘들지 않느냐 물었더니, 오히려 초단시간 노동자들의 고용이 안정적이라고 합니다. 기간제 노동자를 정규직화하지 않기 위해서 절대 11개월 이상 계약을 하지 않는데, 초단시간 노동자는 정규직화 대상에서 제외되니 3년이고 5년이고 일하기도 한다고요.

 

하나 덧붙일 것은 이 관리직 노동자 역시 민주노총 소속의 조합원이었다는 점. 심지어 해당 산별에서 올해 초단시간 노동자 관련 연구를 하면서 단위 노조마다 혹시 초단시간 노동자가 있다면 연락 달라 요청했는데 전혀 답이 없었다고 합니다. 조합원 중에는 초단시간 노동자가 없으니까 그랬던 거겠지요? 여기서도 노동자 사이의 경계와 분절을 봅니다.

 

하지만 결국 그 분절을 넘는 힘도 거기에 있습니다. ‘초단시간이라 노조도 가입 못 한다’는 협박을 듣던 여러 초단시간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2대 보험만 되던’ 일자리를 3대 보험이라도 가입되도록 싸우며, 자신들의 노동과 시간을 존중받기 위해 싸우는 모습에 희망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돌아보니 ‘단체 상근자’가 아니라 ‘운동가’로 잘 살고 있는지 부끄럽기만 합니다만, 계속해서 우리를 갈라놓는 자본의 힘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 곁에 서 있는 믿을 만한 ‘활동가’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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