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301] 47세에 공장노동자로 사는 나의 일상 / 이종희

by 철폐연대 posted Jan 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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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47세에 공장노동자로 사는 나의 일상

 

 

이종희 • 철폐연대 회원

 

 

 

새벽 5시 30분. 오늘은 월요일이다. 월요일 아침은 다른 날보다 일어나는 게 힘들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하루를 시작한다. 여름에는 이 시간이면 해 뜨는 것이 보였는데 겨울 새벽 아침은 아직도 어둡다. 창밖을 보며 오늘은 또 얼마나 추우려나 중얼거리며 출근 준비를 한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다. 눈도 요 며칠 많이 왔다. 길이 미끄럽다. 바람도 차다. 모자에 목도리, 장갑과 핫팩을 주머니에 넣고 아침 공기를 마시며 집을 나섰다. 6시 55분. 멀리서 해 뜨는 하늘이 보인다. 길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디뎌본다.

 

20여 분을 걸어 통근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이 버스를 기다린 지도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처음엔 통근버스를 타는 내가 낯설었지만, 이제는 나도 여기저기서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어 간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내 평생 임금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7시 35분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간다. 막상 일하면 힘들고 쉬는 시간만 기다려지지만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아직까지는 좋다. 언제까지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회사에 도착해서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마시고 작업복을 입고 전쟁 같은 오전 근무 준비를 한다. 비록 봉지커피지만 그 어떤 커피보다 맛있다. 힘들 때는 봉지커피가 비타민이 된다.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보니 노동자 다 되었나 보다.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공장노동자가 된 것이 5월 2일. 첫 직장에서 3개월을 다니다가 짤렸다. 그리고 두 번째 선택한 곳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다. 직원이 60여 명 되는 육가공 포장업체다. 활동할 때 전국에 있는 수많은 사업장을 다녀봤지만 식품회사는 처음이었다.

 

이곳에서의 일은 냉동된 고기들을 기계에서 칼질이 될 정도로 녹인 후 간장이나 고추장 등등의 양념으로 고기를 양념한 후 일정량을 커다란 그릇(이것을 바트라고 부른다)에 담아 제품마다 정해진 고기의 양을 손으로 용기에 담아 저울에 맞춰 포장하는 일이다. 모든 육류들은 냉동 상태이고 제품의 특성상 온도 유지가 필요하다 보니 작업장은 냉장 상태여야 한다. 한마디로 공장 전체가 냉장고이다. 공장 안은 10도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 추우나 더우나 10도다. 얼마 전에 눈도 많이 오고 춥던 날 그런 날은 공장도 기온이 떨어진다. 일하다가 갑자기 추워서 온도계를 보니 공장 온도는 8도.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리다. 다행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코는 안 시리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기 종류도 다양하다. 내 생전 돼지나 소의 부위가 이렇게 다양한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나는 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다. 애들은 커야 하니까 챙겨 먹였지만, 그렇게 먹더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는 거라곤 목살, 삼겹살,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본 갈비살의 지방을 제거해 보기도 하고, 고기에 이자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난생처음 알았다. 양념육만 포장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돌돌이 삼겹살. 그것도 포장한다. 돌돌이 삼겹살만 포장하는 공장도 있다. 겨울에는 돌돌이 삼겹살을 공장 전체가 생산하기도 한다. 일주일 동안 이 제품만 포장하다 보면 고기가 쳐다보기도 싫어질 때가 있다. 그래도 적당히 예쁜 고기를 보면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더라. 매일매일 이런 고기들을 생산한다. 다양한 식재료가 아니라 육류를 매일매일 이렇게 생산 포장한다는 게 참으로 끔찍하다. 사람들이 이렇게 고기를 많이 소비한다는 사실이 놀랍더라. 인간이란 정말 사악한 동물이다, 라는 생각을 이곳에 와서 다시 느끼는 중이다.

 

일의 특성상 앉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8시 30분부터 잔업 포함 7시 30분까지 꼬박 10시간 정도를 서서 일한다. 한자리에서 내가 받은 양의 고기를 저울을 보고 용기에 담는 작업을 하다 보니 어깨와 목덜미가 늘 뻐근하다. 다리는 오전 한 타임만 지나도 붓는 느낌이 든다. 냉동된 고기를 만지다 보니 비닐장갑과 목장갑, 거기에 위생용 고무장갑을 끼고 고기를 만져도 손이 시리다. 시리다 못해 오른쪽 손가락 4개는 아프다. 겨울에는 저리기까지 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다. 발바닥은 불이 난다. 뜨거워서 불이 나는 게 아니라 허접한 작업용 장화가 발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피로한 발바닥은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욱신거린다. 온종일 냉장고 안에서 일을 하고 쉬는 시간 탈의실에 가면 그래도 바닥은 따뜻하여 잠깐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때의 쉼은 다음 시간을 버티기 위한 회복제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하루를 버텨 일을 하고 퇴근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할 때 비록 몸은 피곤해도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이 나는 아직까지는 좋다.

 

 

8. 본문사진.jpg

출근길 아침. 바람이 차다. [출처: 이종희]

 

 

알바몬에 이력서를 넣고 소개받은 곳이 식품회사다. 보통 내 나이 때 여성들이 소개받는 곳이 화장품 공장 아니면 식품회사들인 것 같다. 나처럼 전업주부로 살다가 애들 학원비,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이런 공장들뿐인 거다. 막상 일을 해 보니 힘들다. 그래도 이런 곳에 중년 여성들이 많다.

 

첫 회사에서는 직원 수가 제법 많았다. 170여 명 되는 식품회사였는데, 대부분이 중년 여성들이었다. 50대 초중반. 젊으면 나처럼 40대 중후반. 40대 중후반에 들어와서 정착한 노동자들인 것이다. 자녀들이 스스로 학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 사회생활을 한다. 남편들도 이맘쯤 되면 은근히 아내가 나가서 돈을 벌기를 바라기도 하더라. 그래서 40대 중반의 여성들이 경력단절이 되어서 갈 곳이 없어서 택하는 곳이 바로 식품회사인가 보다. 젊어서는 자식 낳고 키우는 노동에 시달리고 어느 정도 자녀가 크면 이젠 가사노동에 돌봄노동, 돈까지 벌어야 하는 이중 삼중의 노동에 시달리는 것이 중년 여성들이다.

 

이런 곳에 남성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이주노동자들이다. 한국 남성 노동자들은 관리자 몇 명뿐이다. 지금 다니는 공장은 직원 60여 명 중 사무실 직원은 10여 명 되려나? 사무실을 제외한 나머지 생산공장엔 물론 여성 노동자들이 대다수이고, 남성 노동자들이 일부, 병역특례자들이 몇 명 있다. 특이한 사실은 생산직들 다수가 이주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보통 한 부서에 10여 명씩 있다. 그중 이주노동자가 7명이면 한국 노동자는 2~3명이다. 국적도 다양하다. 사무실 직원들과 병역특례자들 일부를 제외하고 40명 조금 넘는 인원이 차지하는 국적은 대략 9개국이란다.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필리핀, 네팔, 중국, 태국, 한국 등등 말이다. 작은 탈의실에 모여 있다 보면 영어를 제외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들린다. 대다수가 20~30대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다. 주임들도 한국 사람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다. 다들 한국말이 서투니 의사소통은 잘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 톤은 높고, 가끔은 한국 관리자가 전달한 일 내용이 달라서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각자의 나라말로 이야기한다. 100% 서로 욕하는 상황이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그저 웃기만 하는 재미진 상황도 만들어지는 공장이다.

 

한 여성 노동자가 이런 말을 했었다.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최저임금이 많이 올라서 잔업·특근하면 그래도 200만 원은 버니까 예전보다는 좋아졌다고. 나의 짧은 경험으로 보아도 노동조합을 만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규모가 큰 회사들이야 만드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이런 공장들 대부분 정직원은 많지 않다. 대다수가 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첫 번째 공장은 도급업체만 대여섯 군데가 들어와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중년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싸우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지금 다니는 곳은 한국인이 없어 노동조합 만들기는 더욱 힘들다. 이주노동자들이 이주노조에 가입해서 지부를 만든다면 모를까.

 

요즘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다는 것을 몰라서 안 만드는 것이 아닐 거다. 이런 작은 사업장의 힘듦을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안 보고 있거나이다. 보는 사람들만 맨날 보고 안정적인 노조 안에서 유지하고 싸우려고 하는 걸 보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워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이 어렵다면, 이런 작은 사업장에는 최저임금과 근로기준법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사람이란 스스로가 그 상황에 놓여 봐야 안다는 게 사실인가 보다.

 

얼마 전에는 월차를 써서 하루를 쉬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그렇지만 쉰다고 쉬는 게 아니다.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소중한 휴식을 써 버리니까 말이다. 그래도 나도 월차라는 걸 써 보니 신기했다. 그날따라 노동당 모임도 하고 두원정공 활동가도 만났다. 몇 년 만에 약속이란 걸 잡았다. 활동을 접고 자녀를 낳고 전업주부로 산 게 벌써 18년이 흘렀다. 물론 중간중간 이런저런 활동을 해 왔다. 하지만 몸짓선언 활동이 워낙 다이나믹했고, 선언 활동을 정리하게 될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그만둔 거라 미련이 남았었다. 그리고 가끔 만나는 현장 활동가들도 나를 선언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더 많으니까 말이다.

 

휴가 때 만났던 두원정공 동지가 물었다. 춤은 추고 싶지 않냐고 말이다. 솔직히 춤을 추고 싶다고 말했다. 가끔은 꿈속에서 춤을 추었다. 꿈의 마지막엔 나 혼자 방황하고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춤을 추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데 그렇게 말했다. 춤은 추고 싶지만 그때처럼 눈 부릅뜨고 적과 싸우자면서 선동하는 춤은 못 출 것 같다고 말이다. 운동을 떠나 아이들의 친구 엄마들도 만나게 되었고, 지역 활동가들도 만나고, 함께 일하는 동료 노동자들을 만나다 보니 젊을 때 전투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들과 삶을 소통할 수 있는 춤을 추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이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다고도 했다.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을 잊지 않고 연락하고 살았다면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많았을 텐데, 그렇게 만난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말이다. 운동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인데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말이다.

 

내가 꼭 운동을 하는 것이 맞을까요, 라는 질문에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지금 당장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준비를 하고 있으면 된다. 때가 되었을 때, 그때 기회를 잡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준비 없이 무작정 나온다고 운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끔은 현재에 젖어서 잊고 살 수도 있지만, 지금의 마음가짐만 잊지 않는다면 기회는 올 거라고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준비 중이다. 그때가 올 때 일어설 수 있는 준비. 운동이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잔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퇴근길 아침에는 춥던 출근길이 저녁 퇴근길은 그리 춥지가 않다. 오늘 하루를 해냈다는 뿌듯함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료가 함께하는 길이라서 그런지 즐겁다. 비록 가정을 가진 중년 여성 노동자에게 출근은 있어도 퇴근은 없다는 말이 슬프긴 하지만, 그 또한 내일을 맞이해야 할 과정이라면 즐겁게 받아들여야지 한다. 언젠가는 퇴근할 수 있는 날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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