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07]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단어, 조직화 / 김한별

by 철폐연대 posted Jul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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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동네 2%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단어, 조직화

 

김한별 •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 부지부장

 

 

 

코로나19 여파가 반년 넘게 장기화해가고 있다. 특히 코로나는 취약했던 곳의 취약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얼마 전 나의 동료 한 명은 상반기 프로그램 런칭을 목표로 주 5일 사무실에 출퇴근을 하며 일을 하다 코로나 여파로 준비해왔던 방송 기획이 연기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막연히 제작 재개를 기다리고 있고,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는 상황을 맞았다. 이렇게 코로나로 인한 결방, 제작 연기, 편성 변경 등은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에게는 해고나 다름이 없다. 방송3사는 코로나 위기로 인한 경영난을 이유로 비용 절감에 들어갔고 이 절감되는 비용 안에는 프로그램 제작비도 포함되었다.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프로그램 제작비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 결국 방송국 코로나 긴급 경영의 여파는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오롯이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취약하고 불합리한 방송 노동환경

 

이번 코로나 사태로 방송작가들은 불의의 이유로 단숨에 밖으로 내몰리게 돼도 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뼈아픈 사실을 또 한 번 직면했다. 전 국민 고용보험 및 여러 사회보장 제도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들을 위한 노동 안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고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방송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왔다. 방송작가들에게 때로 너무나 척박하고 불합리한 이 방송 노동 환경에 대한 자각의 목소리였다. 지금의 이 환경이 매우 가슴 아프지만 어떻게 보면 방송작가들을 조직하기에 이보다 적기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았다.

 

처음 이 원고 청탁 전화를 받고 고민을 많이 했다. 조직화는 방송작가유니온에서 활동해온 나에게 최대 난제였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제 내 주변 작가들 중에서 가입할만한 사람은 다 가입했다. 더 이상 지인 찬스를 쓸 수도 없다. 몇 작가들은 노조에 가입해서 함께 목소리 내자고 제안하는 나에게 되물었다. 노조에 가입하면 자신이 뭘 얻을 수 있느냐고. 그럴 때마다 부당한 일을 당하면 함께 싸워줄 동료와 약소하지만 여러 경조사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자동 반사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 때마다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노조가 마치 돈을 넣으면 무엇인가 손에 쥘 수 있는 자판기인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응당 비용 대비 수익을 따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이해하지만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 글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조직화를 어렵게 하는 방송작가 직군 특유의 문제가 있을지. 노동운동을 오래 해 온 활동가 분께 여쭤본 적이 있다. 조직화의 비기가 있느냐고. 무조건 꼬셔서 같이 술을 먹든 밥을 먹든 무엇이든 먹이는 게 최고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 힘들었다. 우선 작가들은 너무 바빴다. 심지어 한 사업장 안에 있지도 않고 여의도, 상암, 일산 등지로 흩어져있기 때문에 모임을 잡기도 굉장히 어려웠다. 한 사업장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작가들이 서로의 상황을 잘 모른다는 것이기도 하다. 부당한 일이 있더라도 원래 이런 것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고, 심지어 부당한 줄도 모르고 묵묵히 해내는 일이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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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1. 방송작가유니온이 함께하고 있는 ‘고 이재학PD 대책위원회’의 상암MBC 앞 집중캠페인 모습 [출처: 방송작가유니온 인스타그램]

 

방송작가도 노동자다

 

또한 ‘프리랜서’라는 허울도 걸림돌이다. 실제로 굉장히 고정적으로 일을 하고, 전혀 프리하지 않게 일을 하면서도 고용구조 자체가 프리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 프리랜서로 고용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로 언제든 교체가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기에 현장에서 부당한 일이 생기더라도 웬만하면 참거나 외면하는 일이 생긴다. 현재의 방송 노동 환경이 작가들에게 너무나도 불합리하다는 것을 모든 방송작가들이 알고 있지만 쉽게 목소리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혹여 노조에 가입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지 하는 우려도 적지 않다.

 

또 하나 걸림돌이 바로 노동자라는 자각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글을 쓰는 일임과 동시에 노동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하는데 사실 그게 방송작가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글 쓰는 작가에게 노동이 웬 말이냐 하는 인식이 오래 전부터 내려오고 있음과 동시에,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회생활을 이곳에서 처음 한 작가들의 경우에는 단 한 번도 다른 직군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이런 현장이 당연하고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고 여기기 쉽다. 바로 내가 그랬다. 며칠 씩 밤새는 건 예사고, 한 달 주말 없이 뼈 빠지게 일해도 야근 수당은커녕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았던 날들. 좋은 작가가 되려면 이런 고된 환경쯤은 참아내야 한다는 바보 같은 생각들을 했었다. 매번 방송으로 다루던 비정규직 노동 문제가 결국 내 문제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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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피해 긴급지원금 서류양식을 안내하는 방송작가유니온의 웹포스터 [출처: 방송작가유니온 페이스북]

 

방송 비정규직 권리찾기를 위해

 

지금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조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작가들의 특성 때문이야’ 하고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너무 부끄럽다. 작가들을 눈치 보게 만들고 참게 만드는, 이런 환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결국 방송사인데…. 이렇게 비정규직 노동자 혼자서 목소리 내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에 방송 비정규 직군에 그 어느 곳보다 노동조합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했다. 결국 돌아서 조직화…. 뭔가 유의미한 결론을 내고 싶어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안 되겠다. 정말 모르겠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이 글의 결론을 나에 대한 다짐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우리 노동조합이, 내가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다짐. 너무 쉬운 결론이지만 우리 노동조합이 큰 성과를 내는 조직이 되고, 작가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내가 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여기에 어떤 것을 또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난제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노조에서 관련 설문조사를 해서 성명서를 내고, 코로나로 일자리를 잃거나 임금이 깎인 작가들이 쓸 수 있게 프리랜서 긴급지원금 서류 양식을 만들었다. 모든 작가들을 대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는데 이 양식 반응이 좋았다. 소속이 없는 작가들 모두 쓸 수 있는 기준 양식을 하나 만든 것인데, 당장 작가들이 사용할 수 있고, 크게 와 닿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깊이 고민해서 만들어낼 수 있도록 귀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이 원고를 마무리면서 그런 다짐을 또 한 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