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708] 인생의 항해를 시작한 현대미포조선 고공농성장 / 손소희

by 철폐연대 posted Aug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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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항해를 시작한 현대미포조선 고공농성장
손소희 (지역사회노동자운동지지모임, 철폐연대 회원)

 

현대미포조선 고공농성장에 가기 위해서 무작정 울산으로 달렸다. 네비가 가리키는 대로 현대미포조선 정문을 지나쳤지만 고공농성장은 보이지 않았다. 담벼락을 따라 돌아서니 조선소의 거대한 담벼락 너머에 바다가 흩어지는 비를 맞으며 펼쳐져 있었다. 왼편에서는 웅장한 배가 제작되고 있는 듯이 보였고, 오른편에는 안개비에 가려져 하늘과 경계가 흐릿한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다리를 따라 끝까지 걸어가 보니 철문이 닫혀 있는 공장 안은 젊은 청년이 경비를 서고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보이는 시추선이 웅장하게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다시 현대미포조선 담벼락을 따라 고공농성장을 찾아 헤맸다. 마침 퇴근선전전하는 사람들의 피켓 든 모습을 보고서야 고공농성장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옛 동지를 만나 안부도 나눴다. 
낯선 도시 울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를 나홀로 불쑥 찾아가서는 누구랑 이야기를 나눌까 기웃기웃거렸다. 한 남자어른이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빼물고 계셨다. 남자어른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끼를 입었고 가슴에는 세월호 뱃지를 달고 계셨다. 깡마른 몸에 말씀은 아주 느릿느릿했지만 주변의 동료들이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 투쟁의 산증인이라며 인터뷰를 적극 권해주셨다.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 영배씨 이야기
그의 이름은 김영배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에서 25년간 일하다 현대미포조선으로 옮겨와 하청노동자로 살았다. 2013년에 비밀조합원으로 가입해서 특별히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조합원들과 산행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현장에선 늘 조용히 일만 하다가 사장이 부당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한 번씩 짚어주는 정도의 역할만 해왔던 이였다. 그러던 중 2015년 4월경 그가 소속되어 있던 현대미포조선의 하청업체 KTK가 하루아침에 ‘먹튀’ 폐업을 하는 바람에, 체불임금 지급과 고용승계를 요구하면서 노동조합 싸움을 주도했다. 
2003년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그때 그는 나서지 않았다. 한쪽 눈을 감고 살기로 마음먹었던 그에게는 삼십 년 전의 아픔이 있었던 탓이다. 이십 년을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그에게 운명적인 시간이 다가왔다. 2011년 위암 판정을 받고 생사를 넘나드는 기로에서 그는 꽤나 깊이 고뇌를 한 듯 했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6개월의 요양으로 건강을 회복한 김영배씨는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를 찾아갔다. 노조에 가입했다. 2013년의 일이었다. 

2015년 4월의 봄날, 매일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던 현장에서 카톡이 울린다. 전 작업자들은 공구실에 공구를 반납하고 사무실에 모이라는 내용이었다. 사무실에는 관리자가 없고, 직‧반장만 있었다. 직‧반장들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듯 했다. 본공(업체에 소속된 상시적인 인력)과 물량팀(한시적인 물량만 생산하기 위해 투입되는 인력) 다 포함해서 106명이 모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퇴근했다. 
다음날 월요일에 출근하니 소장이란 자가 노무사와 함께 왔다. 하청업체 사장 고소취하서와 체당금 신청서를 내밀면서 사인을 하라고 했다. 하청노동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서명을 하려고 했다. 영배씨는 “왜 회사가 폐업을 했는지 충분한 해명을 들어야 한다. 모든 돈 지급에는 월급이 최우선인데, 아무 곳에나 사인을 하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사장을 기다렸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먹튀’한 것이 확인되었다. 
하청노동자들을 다 모아서 현대미포조선의 건조부 회의실로 쳐들어갔다. 원청회사 건조부서장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원청의 관리자는 자신들도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뗐다. 하청업체와 직원들 간의 문제이니 원청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회의실을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체불임금에 일자리를 잃게 된 현대미포조선 KTK 소속 하청노동자들은 쉽게 물러설 수가 없었다. 현대미포조선 사장실을 점거하기 위해서 로비로 이동했지만 원청의 구사대들이 다 나와서 막아섰다. 1시간가량 현대미포조선 본사 로비에서 농성을 하게 되자 원청의 상무가 내려와서 원만한 해결을 약속했다. 하청노동자들은 문제가 확실히 해결될 때까지 건조부서의 회의실을 사용하겠다고 요구했지만 원청 상무는 들어주지 않았다. 건조부서에서 무작정 4일을 지냈다. 그러다 보니 원청의 직원 중 한 사람이 출입증이 삭제되면 앞으로 현대미포조선 출입이 안 될지도 모른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아직은 완전히 해고된 것이 아니라서 약간의 여유가 있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현대미포조선 정규직 노동조합을 찾아갔다. KTK 하청노동자들의 문제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부위원장은 단칼에 딱 잘라 거절했다. 오히려 부위원장이 2시간가량 KTK 하청노동자들을 설득하면서 정규직노조가 해결하겠다며 장담했다. 하는 수 없이 노조사무실을 나와서 돌아가는 길에 정규직 관리자를 또 만난다. 그는 “지금 나가는 순간 출입증이 삭제될 거다. 해결될 때까지 안에서 버텨야 한다.”고 충고해줬다. 
일주일이 지나니까 106명이 30명으로 줄었다. 다급한 마음에, 현장 안에서는 ‘어용’이라 불려도 노동조합이 좀 편하고 쉬워서 노조사무실을 점거했다. 노조사무실은 원청 구사대가 함부로 침탈할 수 없고, 하청노동자들을 조금은 보호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거점도 필요했다. 3일간 점거를 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정규직 노조의 집행부와 대의원 80여 명이 몰려들어와 욕설을 하면서 반강제적으로 끌어냈다. 물러설 곳이 없는 하청노동자들은 다시 KTK 하청사무실로 나와야 했다. 그 시각 우습게도 ‘원청의 관리자와 하청의 관리자 그리고 정규직 노조’가 당사자들을 쏙 빼고 협상을 했다. 업체사장이 남기고 간 기성비가 있었다. 그것을 N분의 일로 나눠서 지급하고 고용승계는 다른 업체의 빈자리로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단, 체불임금은 책임지지 못한다는 결론이었다. 
“그 안을 받을지 말지를 고민할 때 나 개인적으로는 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상황을 오래 버텨내는 것이 쉽지 않을 거 같았거든요. 그래도 남은 노동자들과 어떻게 할 건지 의논을 했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사람들의 반응이 달랐어요.” 영배씨는 현장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들은 정규직 노조의 안을 받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협상내용이 아닌 것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긴 싸움을 예고하는 외곽투쟁이 시작되었다. 밖으로 나가서 계속 싸울 것을 결정했다. 열흘만의 일이었다. 8명이 남았다. 마지막 다섯 명이 남았을 때까지, 지금 고공농성 중인 이성호씨가 함께였다. 아이 셋을 키우며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어려움이 그를 더 버티지 못하게 했다. 2015년 하반기에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정규직인 아버님이 산재사망 인정 투쟁을 하게 되면서 해고자 복직과 산재사망 인정 투쟁은 서로 만나게 된다. 현대미포조선은 모기업인 현대중공업의 방침대로 하는 기업이었다. 마지막에 영배씨를 제외한 두 사람의 복직을 현대중공업과 합의하는 작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는 마지막 세 사람의 복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지만 영배씨의 결단이었다. 두 사람이라도 복직이라는 결과물을 가지고 와야 노조가 살고 자신도 살 수 있겠다는 판단이 깃든 결과였다. 
그리고 영배씨는 현대미포조선 사내하청 해고자로 계속 투쟁하게 되었고, 2년이 지난 2017년 4월 9일 이성호씨가 소속되었던 동양산업개발이 폐업하면서 4월 11일 조선소 구조조정 비정규직 해고 중단과 노조활동 감시 탄압하는 블랙리스트를 철폐하라는 요구를 걸고 고공농성을 올라가게 된다. 

 

3 7월 19일로 100일을 맞은 고공농성 [출처 필자].jpg 7월 19일로 100일을 맞은 고공농성 [출처: 필자]

 

조선소 하청노동자 이성호씨 이야기 
‘미포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이성호씨는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 KTK의 ‘먹튀’ 폐업으로 100일을 싸웠다. 생계 문제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싸움을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고 잠시 쉼을 가졌다. 
울산 현대중공업 앞 바다 해수욕장에서 헤엄을 치고 있을 때 현대중공업의 퇴근시간에 맞춰 방송 선전전 앰프소리가 파도에 밀려 들려온다. 가슴이 저민다. 이성호씨와 또 한 명의 동료까지 빠진 세 명의 해고자가 210일간 투쟁을 했고 복직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성호씨는 물량팀으로 들어가 빡세게 일할 수 있었다. 
영배씨의 희생에 마음이 아팠지만, 성호씨도 노조 활동을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노동조합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은 빡세지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물량팀으로 일했다. 물량팀은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 받을 길은 없다. 본공으로 일해도 워낙 업체가 폐업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 업체에서 장기근속은 불가능하다. 여기저기 옮겨다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이 일거리를 찾는데 또 큰 자산이기도 하다. 다행히 동양산업개발의 직장으로 있던 지인 오종환씨의 소개로 빨리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성호씨는 KTK 하청폐업투쟁을 통해서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다. 노조에 가입해서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이성호씨는, 그간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보잘 것 없이 살았나를 반성하며 후회했다. 헌신적으로 노동조합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의 생애 최고로 행복한 순간을 맞았다고 말한다. 생계문제로 마지막까지 함께하지 못했던 부채감도 없지 않았다. 2016년 초에 대의원이 되었다. 야심찬 노조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조선소 노동자들의 상태와 처지가 얼마나 열악한지 알 수 있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이성호씨가 봤을 때 너무나 당연한 권리였고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노조를 피한다. 이유는 블랙리스트 때문이었다. 노조에 가입하면 폐업은 하루아침에 일어난다. 다른 곳으로 일을 찾아 직장을 구하려고 30~40곳의 하청업체에 이력서를 넣어도, 채용발표를 하고도 한두 시간 후에 채용을 취소해 버린다. 무엇보다 업체가 폐업되면 80~90% 이상 다른 업체의 빈자리로 고용승계를 하는 것이 조선소의 오랜 관습이고, 관행이었다. 그러나 노조활동이 활발해지자 조합원 누구도 재취업을 보장할 수가 없으니 사람들이 떠난다. 노조가 존폐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노조활동의 보장을 위해서라도 없애야겠지만, 고용의 보장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습이었다. 

이성호씨가 고공농성을 하는 동안 아랫마을에서 고공의 수발을 드는 한 남자가 있었다. 지난 4월에 폐업되어 함께 일자리를 잃었던 조합원인 오종환씨다. 그는 동양산업개발의 직장이라는 직위에 있었던 하청관리자였다. 이성호씨와는 형아우 하는 친한 사이였다. 함께 일하는 동안 노조를 알게 되었고, 조합원이 되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사람이 좋았다. 사람이 하는 일에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하청관리자라지만 원청의 새파랗게 젊은 관리자들이 시키는 일이면 다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면 원청관리자들은 하청사장에게 이야기하고, 하청사장은 어김없이 하청관리자들을 쥐 잡듯이 잡는다. 하청의 관리자라고 하지만 온갖 수모와 멸시를 감내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오종환씨는 오랜 경력으로 잘 알고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감당해야 할 일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환씨의 선택은 달랐다. 노조가 좋아서만도 아니었다. 종환씨가 너무나 좋아하는 형이, 아끼는 형이 저 높은 곳의 땡볕 아래서 조선소 노동자들을 위해 고생하는데 차마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고공농성을 올라가던 날부터 종환씨는 자리를 지켜왔다. 앞으로도 지켜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지만, 고공농성하는 두 사람의 변덕에 한 번씩 마음이 상할 때도 있다는 속 좁은 고백을 늘어놓는다. 

이성호씨에게 노조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신이기도 했다. 
“비록 나 하나의 힘은 없지만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의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난 2년은 내게 감사의 시간이었다. 노조는 내게 세상을 알게 해줬다. 그 전까지 나는 나와 가족만 위하면서 쳇바퀴 도는 삶을 살았다. 노조하면서 행복했다. 조선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이 많다는 것도 기쁘다. 내 개인적으론 내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선노동자들의 권리를 제대로 찾고 싶다. 노동조합 활동 제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바람은 그것밖에 없다.”

 

[편집자주]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는 고공농성 중인 이성호‧전영수 조합원을 비롯해 현대미포조선 사내하청업체 (구)동양산업개발의 폐업으로 고용승계에서 배제된 조합원 4명에 대해 2017년 9월까지 복직하기로 7월 25일 합의하고, 7월 26일 107일 간의 고공농성을 해제했다.

 

 

인생의항해를시작한 현대미포조선고공농성장_손소희-질라라비201708.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