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212] 성실과 미래, 일로 만난 사이에서 / 윤지연

by 철폐연대 posted Dec 0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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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성실과 미래, 일로 만난 사이에서

 

 

윤지연 • 민중언론 참세상, 월간지 <워커스> 전 편집장 / 철폐연대 후원회원

 

 

 

8. 본문사진1.jpg

 

 

<성실한 미래>는 플랫폼 청소노동자 성실과, 플랫폼을 통해 일거리를 얻는 프리랜서 디자이너 미래의 이야기다. 배경은 다르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느 때는 성실이었고, 또 어느 때는 미래였기에 소설 속 화자도 공평하게 두 명이다.

 

몇 년 전, <워커스> 기획 기사를 위해 플랫폼 청소업체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사실에 근거한 경험은 기사로 실렸지만, 함부로 쓸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예컨대 나와 고객 사이에 흐르던 긴장과, 서로를 향한 시선과, 그것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와 같은, 미루어 짐작해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가 처음 그 집에 갔을 때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서울에서 방 두 개, 거실 하나짜리 아파트에 독립해 살면서 청소 서비스 비용까지 척척 부담할 수 있는 경제력이라니. 되게 비싸 보이는 화장품과 왠지 세련돼 보이는 식기류 같은 것들을 보면서, 나의 초라한 화장대와 엉망진창인 부엌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설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전형적이기도 했고, 소설 속 인물은 좀 더 자존감이 높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물론 부러움은 찰나였다. 그때 모든 감정들을 압도하며 활활 타오르던 것은 분노였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평소 같으면 도망가기 바빴을 바퀴벌레 사체를 꾸역꾸역 치우면서, 나는 고객을 저주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사람을 된통 부려 먹는 양아치라고 생각했다. 서재에 꽂혀 있는 여러 사회 분야의 서적들을 보면서, ‘백 날 천 날 저런 거 읽어 봐야 뭐하나. 인간이 돼야지’라는, 왠지 우리 엄마가 나한테 했을 법한 말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낯선 집에서 분노를 억누른 채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었고, 고객은 그런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나는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 내 보일 만한 경력 한 줄 없는 초짜에, 일도 서툴러 보이고, 뭘 찾는다고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는 꼴이 영 미덥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서로 탐색전을 하듯이,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눈치를 보고, 그는 일하는 척 앉아 있다가도 어느새 내 곁에 와 서성이는 그런 시간이 지나갔다.

 

서로에 대한 불편한 시선과 날선 감정이 어떤 계기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커다란 거실 테이블에 온갖 일거리를 쌓아 놓고 뭔가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집이 집 같지도 않겠다, 라고 생각했을 때였나. 숨 돌릴 틈도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던 내게, 조심스레 물과 간식을 건넸을 때였나. 그러고 나서 그는 산책을 하고 오겠다며 짧게 집을 비웠었다. 그 순간들이 지나며 팽팽하게 긴장돼 있던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던 것도 같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의 분노가 오롯이 그를 향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나를 이 집에 밀어 넣은 것도, 출퇴근을 체크하고 작업을 지시한 것도, 멋대로 서비스 시간을 책정해 노동 강도가 높아진 것도, 그래 놓고 높은 수수료를 떼 가는 것도, 플랫폼 회사 놈들인데. 교육 시간에 플랫폼 직원은 우리에게 어질러진 집 안 사진을 몇 장 보여 주며, 이런 집도 있다고, 운이 된통 나쁘면 이런 곳에 가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세상에, 나의 노동 조건이 운빨로 결정된다니.

 

집이 더러워서 청소 서비스를 부른 고객은 잘못이 없다. 더군다나 ‘어이쿠, 오늘은 집이 너무 더러워서 청소 서비스를 못 부르겠다’ 하는 고객은 없지 않을까. 제시간에 일을 끝내지 못해 초과 노동을 하는 나를 보며 그가 미안한 기색을 내비친 것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세 시간 남짓한 시간에 모든 것을 완벽히 끝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기사에는 미처 쓸 수 없었던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다. 네가 허접한 서비스를 받은 것은 내가 일을 못해서가 아니고, 내가 개고생 한 것은 네가 양심 없고 게을러서가 아니라고. 그 시간 동안 내가 느꼈던 것을 너도 느꼈을 것이라고. 어쩌면 너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사실에 가까울 수 있는 상상들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썼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었다. 하나는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 퇴근해서 집에 오면 저녁 일곱 시. 밥 차려 먹고 치우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가뜩이나 없는 기운 밥 차리는 데 다 써 버렸으니 좀 쉬어야지. 그렇게 어영부영 내일 아침이 된다. 또 하나는 집 안 청소. <워커스> 잡지 마감을 준비하는 이 주 가량은 주중이고 주말이고 정신이 없다. 집안이 급격하게 더러워지는 것도 이 시기다. 마감 끝나는 주말엔 꼼짝 않고 종일 자야 한다. 그다음 주말엔, 응? 나 소설 써야 하는데?

 

그렇게 나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소설을 썼다. 싱크대에선 음식물 쓰레기와 그릇들이 뒤엉켜 썩어 갔고, 미처 싱크대로 가지 못한 쓰레기들이 아일랜드 식탁에 쌓였으며, 거실은 새로운 쓰레기들로 쌓였다. 나는 굳이 예전의 기억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내 집안 꼴을 바라보며 미래의 이야기를 썼다. 베란다 한편을 가득 채운 일회용기를 바라보며, ‘이런 거 백 날 천 날 써 봐야 뭐하나. 인간이 돼야지’라며 자책했다. 그 꼴을 안 보고 싶어도, 코로나19 때문에 밤늦게까지 문을 여는 카페가 없어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이따금 청소 서비스를 부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매번 앱만 껐다 켰다 하다가 관두기 일쑤였다. 그 돈이면 커피가 스무 잔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욕을 먹을까 봐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사람을 잡네 잡어, 그러면서 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과거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평수도 작아서 돈도 얼마 못 받을 텐데, 엄청 고생만 하겠지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나는 어느 땐 성실이었다가, 또 어느 땐 미래가 됐다.

 

참세상 기자로 일하며 맨날 기사만 쓰다가 소설을 쓰려니 영 어색했다. 기사 쓰기도 아직 어려운데, 소설은 안 써 봐서 더 어려웠다. 한동안은 내가 쓰는 게 글인지 똥인지 구분이 안 가, 친한 사람들을 많이 괴롭혔다. 수줍게 원고를 내민 뒤 그들의 피드백을 기다렸다. 나름 소설 같은데? 하면 가슴을 쓸어내렸고, 고개를 갸우뚱하면 썼던 글들을 고쳤다. 처음엔 몰랐는데 쓰는 일만큼 고치는 일도 재미있었다. 글을 뜯어고치고 나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다 쓰고 난 뒤에는 마음 한구석의 짐을 덜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트북 폴더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글이 밖으로 나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감정도 찰나에 불과해서, 나는 요새 비워진 폴더를 다시 꾸역꾸역 채우고 있다. 그래도 나름 성실하게 쓰고 있으니, 예전보단 조금 나아지겠거니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