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612] 반올림 농성장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

by 철폐연대 posted Dec 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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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 농성장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
임용현 (사회변혁노동자당, 반올림농성장지킴이)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사회적 해결을 위한 반올림 농성’이 어느덧 400일을 훌쩍 넘어섰다. 어느 산골 변두리에 지어놓은 움막집 같은 농성장이 휘황찬란한 고층빌딩 빼곡하게 들어찬 강남에서 참 오래도 버텨냈다. 작년 10월부터 시작한 농성이 사계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할 참이다. 
얼마 전에는 농성장지킴이들과 함께 한겨울을 보낼 채비도 제법 야무지게 했다. 지난봄부터 농성장에 초록빛 싱그러움을 선사해주었던 76개의 고무신 화분은 겨우내 잘 가꾸어줄 분들에게 분양하기로 했고…….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비바람은 물론, 도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과 소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 농성장의 비닐천막도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누구는 낡고 상한 물건들을 버리고, 누구는 망가진 피켓을 보수하고, 또 누구는 어지러운 실내를 가지런히 정돈하느라 종일 바쁜 하루였다. 그렇게 농성장지킴이에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농성장 새 단장에 힘을 보탰다. 적어도 이 날 하루만큼은 본격적인 겨울나기를 위해 땔감을 가득 쌓아둔 것만 같은 충만감이 모두의 가슴에 차올랐을 것 같다.

그러나, 어찌 그런 마음뿐이겠는가. 한편으로는, 또 다시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이 상황에 화도 나고 답답한 심정 금할 길이 없었다. 
문득 떠올려 보니, 삼성은 반올림이 이 곳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누구 하나 찾아온 적이 없었다. 어디 이역만리도 아니고,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라 불리는 ‘미래전략실’, 게다가 삼성전자의 홍보대사격인 ‘d’light관’까지 자리 잡은 삼성 서초사옥 앞에 반올림이 입주한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농성장 새 단장을 했던 이 날, 농성장지킴이들의 손이 많이 갔던 일 가운데 하나는 쓸모(이 ‘쓸모’를 구분 짓는 기준은 주로 피켓 등 선전용 팻말에 적힌 문구의 시의성에 따른다.) 없는 피켓이나 현수막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그 동안 정말 많은 피켓, 현수막 들이 출근선전전과 기자회견, 집중문화제 등 각종 행사에서 유용하게 잘 쓰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농성 400일을 가로지르는 반올림 농성의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진정성 있는 사과’ / ‘배제 없는 보상’ / ‘철저한 재발방지대책’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요구를 담은 피켓들의 쓸모는 아직 유효했다. 그래서 세월의 풍파에 상하고 부러진 피켓들 몇 장만 버리고, 나머지는 적당히 보수해서 앞으로도 계속 쓰게 됐다.

 

제대로 된 사과, 보상, 재발방지 이뤄내야 
이렇게 돌아보면, 반올림 농성 400일은 처음 시작할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특히, 반도체 노동자들의 질병 피해와 업무상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삼성의 ‘한결같은’ 태도는 직업병 문제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아직도 삼성은 반도체 제조공정이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고 안전한 무공해 첨단산업이라며 자사의 기술력만 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도체 공장에서 발암물질을 사용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음해에 지나지 않고, ‘발암물질이 있더라도 허용기준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그 위험이 실재하고 상존하고 있음에도, 삼성은 이와 같은 뻔뻔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이미 삼성 반도체․LCD 공장에서 각종 암과 희귀난치성 질환을 입었다는 피해 제보가 230건에 달하고, 그 중 76명의 노동자들이 고통스러운 투병생활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고통과 죽음은 단지 개인적인 건강상의 문제란 말일까? 
삼성은 직업병 피해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삼성 반도체․LCD 공장의 유해한 작업환경이 세간의 이목과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판단한 듯하다. 이러한 대응기조 속에서 직업병 피해자들을 금전적으로 회유하고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화학물질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등 삼성의 광범위하고도 적극적인 진실은폐, 책임전가 행위가 지속적으로 행해진 것이다. 
물론, 삼성의 이러한 의도가 순조롭게 관철될 리 만무했다. 위로금 몇 푼으로 직업병 피해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삼성의 오만과 독선에 이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의 끈질긴 문제제기와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난 1월 12일 있었던 ‘재발방지 대책’에 대한 합의는 부족하나마 반올림이 이 지난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기에 이끌어낼 수 있었던 작은 성과다. 옴부즈만위원회라는 독립적인 기구를 통해 삼성전자 내부의 안전보건관리를 진단하기로 한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런데, 이 합의 이후 5개월여 만인, 6월 8일 옴부즈만위원회가 ‘늑장’ 출범했다.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위원회가 제 골격을 갖추고 활동을 시작했지만, 반올림은 옴부즈만위원회가 합의한 내용을 과연 잘 이행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재발방지대책 합의문에 명시된 대로 ‘독립성을 갖춘 공익적 성격의 외부기구’로서 옴부즈만위원회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도록 사회적 감시와 견제를 계속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지금 반올림의 농성은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사과와 보상, 이 두 가지 의제만을 중심에 놓고 싸우는 것이라 볼 수 없다. ‘사과/보상/재발방지’라는 직업병 문제 해결의 3대 의제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은 반올림이 농성을 시작했던 지난해 가을이나, 지금 이 순간이나 동일한 과업이다. 

 

직업병 문제 외면하고 이재용 권력승계 몰두한 삼성
한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폭로된 지배자들의 치부는 이제 기존 정치권력의 힘으로는 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을 만큼 일파만파 번지고 있는 상황이다. 측근 실세부터 비선 실세에 이르기까지 국정농단에 연루된 범법자들이 굴비 엮듯 줄줄이 불거져 나오더니, 사태의 한 가운데 재벌들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 중에서도 삼성은 K스포츠․미르 재단을 통한 204억 원 모금 이외에도 최순실 모녀에게 직접 돈을 건넨 유일한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정유라의 승마대회 입상을 위한 명마 구입비 10억 원을 포함, 독일 현지의 스포츠컨설팅 기업(이 회사 역시 최순실, 정유라가 실소유주이다)에 35억 원을 ‘쪼개기 송금’했고, 한국마사회와 승마협회 지원금 규모도 226억 원에 이른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삼성이 이처럼 비선실세와 모종의 거래를 위해 사용한 검은 돈의 총액은 무려 465억 원이다. 
게다가, 최근 검찰조사에서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재벌들의 당면 현안, 즉 대정부 민원을 수렴했다는 단서까지 확보됐다. 이번에 검찰이 부정청탁 혐의로 압수한 안종범 전 수석의 메모에는 이들 재벌의 민원사항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오너 총수의 부재로 인해 큰 투자와 장기적 전략수립이 어렵다’(SK, CJ)거나 ‘노사문제로 경영환경이 불확실하다’(현대차),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헤지펀드 엘리엇의 반대가 심하다’(삼성)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의 불법적인 경영세습을 정권 차원에서 돕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삼성은 K스포츠․미르 재단과 최순실에게 거금을 안긴 셈이다. 이로써, 비선실세의 겁박으로 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재벌들의 볼멘소리도, 지난 11월 4일 “선의로 도움을 준 기업인들에게 큰 실망을 드려 송구하다.”던 박근혜씨의 대국민 담화도 전부 파렴치한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졌다. 금권, 관권으로 점철된 이 사태의 배후에 최순실이라는 민간인의 불법 행위를 넘어, 한국사회의 깊은 병폐 가운데 하나인 재벌문제가 자리하고 있음을 대다수 국민들도 또렷이 인지하게 된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런데도, 삼성은 이 모든 병폐와 부조리를 상징하는 대한민국 대표기업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박히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불과 2~3개월여 전 전세계적인 이슈였던 갤럭시노트7 배터리 폭발 사태나, 이번 ‘박근혜-최순실-삼성 게이트’는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는 불법과 탈법, 편법도 서슴지 않는 삼성가(家)의 검은 이력을 오롯이 보여준다. 
“삼성이 언제쯤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게 될까?” 아마 삼성은 갤럭시노트7 폭발, 박근혜-최순실-삼성 게이트까지 연달아 터진 ‘악재’로 직업병 문제해결은 안중에도 없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 물어야겠다. “삼성이 언제쯤 자신의 죄를 달게 받게 될까?” 
지금 한국사회는 사상 초유의 ‘헌정 파괴’, ‘민주주의 유린’ 사태로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고 있다. 그리고 이미 국민으로부터 하야 통보를 받은 대통령 박근혜씨는 끝까지 ‘모르쇠’와 ‘버티기’로 사태를 일관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도 직업병 문제를 대하는 삼성의 태도와 쏙 빼닮았을까?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것마저 닮은꼴인 이 둘의 결말도 외길 낭떠러지,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 왠지 안쓰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겨울의 길목에서 촛불을 든 수많은 이들과 함께 이렇게 외쳐보고 싶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이재용도 퇴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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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농성장에서맞는두번째겨울_임용현질라라비_201612.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