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701] ‘유성투쟁’ 거리의 6년, 중1 아들은 고3이 됐다

by 철폐연대 posted Jan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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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투쟁’ 거리의 6년, 중1 아들은 고3이 됐다
도성대 (금속노조 유성아산지회 부지회장)

 

사진1 2016.8. 갑을오토텍X유성기업 전국순회투쟁 [출처 필자 facebook].jpg

 

 

2016년 11월 26일! 
부산대학교 논술시험이 있는 날이다. 논술시험장에 모셔다 달라는 고3 큰아들의 정중한 부탁을 받고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날은 200만 명의 군중이 박근혜 퇴진을 한 목소리로 외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운집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이미 며칠 전부터 농민들은 자신들의 재산목록 1호인 트랙터와 트럭에 故 백남기 농민의 원혼을 싣고 박근혜 퇴진 깃발을 꽂은 채, 쌀값 보장 등을 외치며 전라도․충청도․경상도에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천안과 서울의 첫눈 소식과는 달리 5시간의 운전 끝에 도착한 부산에는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큰아들을 일찌감치 시험장에 올려 보내고 반갑지 않은 비를 맞으며 시험장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한 중년 아저씨가 들고 있던 가방에 눈길이 갔다. 그는 노란 세월호 리본이 수줍게 매달린 가방을 앞으로 메고 있었다. 자신의 가방은 등에 매고 앞으로 끌어안듯 메고 있는 가방에 매달린 리본은 왠지 “말을 걸어주세요.” 하는 듯 했다. 
약간을 망설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자제분이 시험을 치르러 왔나보군요.” 그분 역시 반갑게 웃으며 자신은 제주도에서 왔고 둘째 딸이 논술시험을 치르기 위해 왔노라고 했다. 아침에 경북대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고 곧바로 11만 8천 원을 주고 택시를 타고 부산에 도착에 시험을 치고 있는 중이며 내일은 서울 중앙대학교에 시험을 치기 위해 오늘밤 서울로 떠난다고 너스레를 떤다. 딸은 밤 1시에 각종 학원이 끝나고 집사람이 매일처럼 모시러 다녔단다. 논술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1년 이상 학원을 다녔고 논술에 대비해 특별과외를 받았고 서울대 다니는 조카에게 집중지도를 받았단다. 딸이 나중에 아빠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논술시험이 있는 며칠 동안의 강행군은 기꺼이 내가 책임지겠다 자처했다고 했다. 그렇게 받은 수능점수가 3,1,1,3,등급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자판기 커피 한 잔과 함께 1시간여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근심을 나누며 박근혜를 씹고 뜯다보니 얇게 입은 옷 탓인지 한기가 찾아왔다. 인사를 건네고 주차해 놓은 차에 들어오니 문득 내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시험을 치르러 갈 때의 풍경이 떠올랐다. 고인이 되신 아버지와 시험 전날 완행열차를 타고 천리타향이었던 구미까지 밤새 달렸던 기억, 남자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야 출세한다며 육사를 꿈꾸면서도 가난 때문에 학비 걱정 없는 공고를 진학시켜야만 했던 그의 회한을 밟으며 열차는 밤새 잘도 달렸다. 그날 들렀던 민박에서 흔하지 않은 같은 ‘도’씨 성의 아주머니가 끓여주셨던 구수한 청국장의 맛과 시험 잘 치라는 따뜻한 격려의 말 등이 새삼 가슴을 울렸다.

 

2011년 5월 18일!
유성기업에 직장폐쇄가 있었던 날이다. 늦은 시간까지 간부 회의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직장폐쇄를 했다는 것이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다시 되짚어 달려간 공장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있고 험상궂은 용역깡패들이 정문을 봉쇄하고 있었다. 

6년째 이어지고 있는 노조파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마다 죽어갔던 동료들의 사인이 몇십 년을 이어온 주․야 맞교대 장시간 노동이었다는 결론에 이르자 노동조합에서는 급하게 대책을 마련했다. 그것이 “밤에는 잠 좀 자자!”는 요구였고 2009년에는 노사가 합의에 이르렀다. 2011년부터 주간연속2교대제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2011년이 되자 조합원들은 당연히 야간에는 노동하지 않는 주간연속2교대제가 실행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웬 일! 2011년이 되자 사측에서는 2009년의 합의는 신사협정에 지나지 않는다며 11차례의 교섭에서 팔짱만 낀 채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직장폐쇄를 통한 노조파괴를 염두에 두고 3월 25일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무직 직원들에게는 수차례의 정신교육이 이루어졌고 교육을 이수한 그들은 노동조합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퇴사하겠다는 사직서를 이미 제출한 상태였다. 그들은 카메라와 소형 녹음기 등을 통해 노동조합의 일거수일투족을 채증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5일간의 짧은 공장점거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7000만 원 받는 귀족노동자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떠들어댔고 경찰에서는 노조간부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노동부에서는 합법적 파업임에도 직장폐쇄를 즉각 승인하고 노조를 감시하고 법원에서는 단 며칠 만에 공장출입금지, 업무방해금지 등의 가처분 등을 내고 전경련을 포함한 재계와 보수 신문들에서는 몇백 원 하는 피스턴링을 생산하는 유성기업이 현대, 기아차를 비롯한 대한민국 경제를 망가뜨린다고 난리를 쳐댔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공장 앞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후덕한 아저씨 덕에 3개월간의 하우스 생활을 시작했다. 말이 좋아 하우스 생활이지 모를 길러낸 바닥은 물구덩이였고 낮에 천장에 달라붙었던 물방울들은 밤이면 살며시 내려와 옷을 적시고 침낭을 적시고 몸과 마음까지 적셨다. 
공장 앞, 법원 앞, 노동부, 경찰서, 유시영네 집 앞 등지에서의 1인시위가 시작되었고 파업을 풀고 공장에 들어가 일하겠다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은 노조파괴의 야욕에 휩싸인 사측의 욕망과 개별복귀라는 억지에 가로막혔다. 불안과 초조가 지배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지도부의 구속과 도피생활, 목숨 건 늙은 노동자의 단식농성, 선택 받은 자와 남겨진 자, 먹잇감을 찾아 매일처럼 찾아오는 정치인들, 꾀죄죄한 하우스 생활인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던 기자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각종 연대 덕분이었다. 생면부지의 다양한 사람들이 하우스를 찾아왔고 응원의 물품들이 하우스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 힘으로 90여 일 만에 공장에 전원 들어갈 수 있었다. 공장에 들어가면 끝나는 줄 알았다. 우리의 소중한 요구안이었던 주간연속2교대제가 잠시 늦어졌을 뿐인 줄 알았다. 임금인상이 조금 늦어지는 것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회사에서는 조합원들을 강성과 온건으로 분류했고 교육과 격리가 시작되었다. 쫓겨났던 3개월 동안 공장에서는 어용노조를 출범시켰고 전 조합원 징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창조컨설팅이라는 노조파괴 전문가가 기획하고 실행했다. 금속노조원에게는 중징계가 내려졌고 사측에 머리 숙인 어용노조원들에게는 단체협약에도 없는 약한 징계가 내려졌다. 금속노조원 중 27명이 해고되었고, 106명에게 월급 없이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출근정지 이상의 징계가 이루어졌다. 
현대자동차가 직접 개입해서 금속노조를 와해시키고 어용노조원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회사는 징계에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빼줄 테니 어용노조로 넘어 오라는 등의 개별면담을 실시했다. 술을 사먹이고 노래방까지 모시고 다니는 등 각종 차별행위와 회유와 협박을 실행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감시카메라와 몰래카메라가 반겼고 철수하지 않고 남아있던 용역깡패들이 카메라들 들고 따라 다녔다. 사무직 직원들은 금속노조원들에 대해 휴대폰을 몇 번 봤는지, 화장실은 몇 번 갔는지, 물 마시러 몇 번을 갔고 누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노조사무실에는 몇 번을 갔는지 관찰일지를 썼다. 이를 바탕으로 경고장을 남발했고 월급을 삭감했으며 징계가 다시 횡횡했다. 
영동공장과 아산공장을 합해서 300여 명 노동자에 대한 고소고발의 건수가 1,300건이 넘고 소송건수가 200건이 넘는 것을 보면 탄압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급기야 사측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어용노조원 중 한 명이 목숨을 끊었고 사무직 직원 중 한 명이 기계에 압사당해 목숨을 잃었으며 출근을 앞둔 산재노동자가 출근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2016년 3월 17일, 징계하겠다는 서슬 퍼런 출석요구서를 받아든 한광호라는 젊은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 

 

2016년 3월 17일!
한광호가 목숨을 끊은 날이다. 우리는 주저 없이 그를 열사로 추대했고 열사투쟁이 시작되었다. 서울 시청광장에 농성장을 차렸고 경찰들은 비닐 한 장, 깔판 한 장의 반입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매일처럼 쓰레기봉투를 뒤집어쓰고 앉은 채 온몸으로 3월의 추위를 견디며 아침을 맞았고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70여 단체들이 유성범대위라는 이름으로 아픔을 같이해주기 시작했다. 한광호를 죽인 진짜 주범은 현대차 정몽구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으로 상여를 메고 100리길을 서럽게 달려 농성장을 옮겼다. 그렇게 시작된 열사투쟁에 회사놈들은 자기가 스스로 죽은 것이지 회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며 회사에 차려놓은 분향소마저 철거했고 20년을 넘게 근무한 노동자의 죽음에 침을 뱉었다.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의 투쟁은 처절했다. 전체 조합원들이 순환파업을 통해 길거리 잠을 다시 자기 시작했고 매일처럼 10-20명씩 연행되는 등 온갖 서러운 투쟁들이 계속 되었다. 온몸을 내던진 오체투지로 서울 시내를 건너고, 급기야 “박근혜 퇴진! 유시영 구속!”을 외치며 사상 처음으로 청와대 근처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2016년 12월, 한광호는 아직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 정몽구가 박근혜에게 바친 201억 원은 노조파괴를 비호하는 군자금으로 쓰였고 열사를 온전히 보내고자 하는 조합원들은 냉장고처럼 차가워진 날씨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다. 그러나 열사는 아직도 냉동고에 있다. 
아등바등 달려온 6년의 해고 세월! 참 길고도 험했다. 겨울이 호되게 춥다는 것을 알았고 여름이 몸서리치도록 덥다는 것을 체험했다. 길바닥 잠이 익숙해졌고 길거리 생활이 익숙해졌다. 수없이 행진을 했고 수없이 길바닥을 기었다. 정치인들에게 머리도 조아렸다. 이제 법원에서는 유시영의 죄가 인정되어 선고만을 남겨놓고 있고 적들이 그토록 어렵게 세웠던 어용노조는 회사의 지배․개입 하에 만들어져 설립이 무효라는 판결을 했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동안 큰아들은 중학교 1학년에서 지금 수능시험을 치르는 성인이 되어버렸고 그동안 그는 늘 혼자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치른 토익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맞아 대원외고에서 러브콜이 왔었고 영어성적이 우수해서 영어시험에서 세종을 포함한 충청남도에서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때도 난 늘 투쟁이라는 단어에 내몰려 아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아비 잘못 만나 학원 한 번, 과외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혼자 준비했던 수능시험이 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가 다시 아비가 되어 느낄 아비에 대한 기억은 무엇일까? 
난 오늘 이곳 시험장에서 나의 아비가 느꼈을 가난에 배인 아픈 감정들을 오롯이 느끼고 있다. 지금 서울에서는 유성조합원들을 포함한 200만 명의 군중들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다. 속절없이 내 마음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추적추적 빗물로 내린다.


 

‘유성투쟁’거리의 6년_도성대-질라라비201701.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