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101] “노동자 역사 기록이 왜 중요하냐구요?” / 정경원

by 철폐연대 posted Jan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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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속으로

 

 

“노동자 역사 기록이 왜 중요하냐구요?”

-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인터뷰

 

인터뷰 ‧ 정리 임용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한내란 큰 물줄기 또는 한줄기 냇물이란 뜻이요.

여러 또랑물과 샛물이 하나로 모두어져 구비친다는 뜻입니다.

 

서울의 관악산 뒤에도 한내라는 물길이 있으며

황해도 구월산 기슭에도 맑고 티 없는 냇물이 있는데

그것을 한내 그럽니다."

 

백기완

 

“모든 시대의 지배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이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기반을 전유한 자본가계급은 당대의 정신적․사상적 기반 역시 장악하고 있다. 우리가 좀체 가진 자, 힘 있는 자를 대변하는 주류적 시각과 통념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이유도 결국 이 때문일 터. 그래서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겨지고 빛바랜 노동자들의 역사를 가지런히 펴서 차곡차곡 쌓는 작업은 누군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헌데 이 땅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의 기록을 한곳에 모으고 정리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은 방대한 작업이다. 그 장대한 여정의 첫걸음은 어떻게 뗄 수 있었을까.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를 기치로 노동운동의 역사를 수집, 보존하고 기록하며 공유하는 일들을 벌여나가는 단체, ‘노동자역사 한내’가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12월 15일, 한내라는 이름처럼 굽이굽이 휘어진 산길을 넘고 넘어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산자락 아래 자리한 한내 자료관을 찾아갔다. 노동자역사 한내 정경원 사무처장과 한 시간여 동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이런저런 궁금증을 연신 묻고 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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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역사 한내’ 정경원 사무처장. [출처: 철폐연대]

 

한내가 하는 일

 

그나저나 한내는 대체 어떤 일을 하는 곳이길래 이곳 일산동구 설문동에 연면적 200평에 달하는 건물을 지었을까.

 

“저희가 하는 일은 노동운동 자료를 수집해서 전산화, 보존하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연구나 교육․출판 활동을 통해 노동자역사를 대중화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저희가 2008년에 만들어졌으니 12년 정도 활동하면서 초창기 5~6년 동안은 아카이브 활동에 주력해 왔어요. 이게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다음에는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노동조합 조직사나 투쟁사에 집중해 왔죠. 그리고 최근 2~3년 동안은 노동자역사 교육과 이를 좀 더 현장에서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답사, 기행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내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료관(건물 일층 한편에는 사무처와 운영위원들이 일하는 사무실도 있다)뿐만 아니라, 제주4․3항쟁 역사기행과 학습 등을 꾸준히 진행 중인 한내 제주위원회를 두고 있다. 제주4․3항쟁 역사기행은 흔히 관광지, 힐링 명소로서 소비되는 제주가 아닌,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서 제주를 직접 보고 느끼는 프로그램이라고 정경원 사무처장은 말했다. 한내 제주위원회에서만 역사 기행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3년 전부터는 서울과 서울 근교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있는데, 사회주의운동사, 그리고 여성사회주의자들의 생애를 훑어보는 것과 더불어 ‘국가형성기’에 용산 같은 지역을 통해 제국이 어떻게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보는 프로그램 등을 서너 개 꾸려서 진행하고 있어요. 이 프로그램들은 시민단체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어요. 사회주의운동사 같은 답사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접하는 분들의 반응이 꽤 좋았어요.”

 

그러니까 한내는 단순히 사료를 보관하거나 전시하는 곳은 아니었다. 자료 수집과 보관은 물론, 노동자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역사기행, 출판 및 교육사업, 연구사업까지 정말 폭넓은 영역의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었다.

오늘의 한내가 있기까지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을지 도무지 상상이 안 갔다. 한내가 만들어진 배경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한내 창립의 바탕이 된 노동운동역사자료실

 

“한내가 정식으로 출범한 때는 2008년이지만, 이미 1995년 말부터 그 씨앗을 틔웠다고 볼 수 있어요. 1995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해산 과정에서 이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고민이 있었던 거예요. 6년이라는 짧은 활동기간이었지만 해방 이후 다시 복원된 노동운동 과정을 그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었죠. 그래서 <전노협백서>를 13권으로 만들었고 운동사 정리를 과제로 놓게 되었어요. 이 과정에서 전노협백서팀장을 맡았던 김종배 동지가 백서 출간 이후 ‘공공부문 노동조합 대표자회의’ 활동을 하던 중에 1999년 8월 교통사고로 운명하셨어요. 김종배 동지가 못 다한 일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으로 이어가야 했죠. ‘김종배 추모사업회’에서 그 뜻을 계승하기 위한 활동으로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을 열게 된 거예요. 4년 넘게 노동운동역사자료실을 운영했는데, 결국 재정문제 때문에 2003년 12월말 자료실을 닫았어요. 자료실에 보관했던 책자와 문서꾸러미들은 시골에 있는 지인의 창고 등 각지에 나눠서 쌓아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2007년 8월, 추모사업회 주체들이 다시 모여서 노동운동역사자료실 복원 사업에 착수하게 되었죠. 두 가지 문제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어요. 하나는 노동운동이 자기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대로 두었다가는 자료들이 훼손, 사장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였죠.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있었어요. 그래서 전노협 창립일에 맞춰 2008년 1월 21일에 발기인대회를 열고, 그해 8월 23일에 노동자역사 한내를 창립하게 된 거예요.”

 

정경원 동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부터 간단치 않은 일이라는 걸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뜻이 모이는 것만큼 재정을 마련하는 것 또한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상당한 재정과 인력이 투여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지만, 한내는 여태까지 활동을 이어오면서 독립적인 재정 원칙을 확고히 지켜왔다.

 

“외국의 유명 역사학자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했잖아요. 그런 멋있는 말까진 아니더라도 사실 재정의 독립성, 자주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란 굉장히 어렵단 걸 여러 사례를 통해 절감했어요. 예컨대 정부나 지자체가 민간에 위탁해 운영하는 박물관들이 많은데, 거기에서도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해요. 말하자면,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박근혜 정권 시절, 내지는 뉴라이트가 학계 주류로 있던 시기에는 사실 우리의 관점을 역사박물관에서 투영하기가 어려운 거죠. 그래서 이승만 정권 시절까지 정리하고 끝내는 박물관, 이런 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결국 누가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는 측면이 중요했던 것이죠. 그런 면에서 전태일 열사 정신, 광주 민중항쟁의 정신,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의미를 지키고 제대로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역사는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인식도 중요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재정적으로 좀 어려울 수 있어도, 많은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꾸려가면서 각자 힘을 보탤 수 있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도 컸죠.

다시 말해 자주성의 원칙을 지켜야 노동자역사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서 노동자역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독립적 재정 운영은 중요한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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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 건물 2층 문서고 내부 모습. [출처: 노동자역사 한내]

 

노동운동의 과거․현재․미래를 엮는 작업

 

이처럼 독자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한내의 노력은 역사의 주체로서 노동자가 자기 역사를 돌아보고 전망을 밝혀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내는 ‘노동자역사 바로 알기’,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를 기치로 지난 십수년간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 결과물이 수북이 쌓여 자료관의 중량랙(철제선반)과 모빌랙(이동식 서가)를 채웠다. 현재 한내 자료관에는 총 20만 건에 달하는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일반문서, 도서간행물, 사진필름, 그림도면, 영상음성, 동영상, 구술파일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 중에는 개인이 기증한 자료들도 많지만,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 진보정당에서 기증한 자료들도 상당하다.

한내 건물 2층을 빼곡하게 채운 64면 1,900칸의 모빌랙과 중량랙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의 일상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도서관 사서의 업무가 그러하듯, 한내 활동가들도 종일 자료 더미와 씨름하며 지내고 있진 않을까?

 

“물론 기본적으로 해야 할 단순한 작업들이 항상 있죠. 단지 자료를 모아놓은 게 아니라 그것들을 일정한 체계 속에서 목록화해야 하는 정리작업이 있어요. 그리고 스캔을 떠서 전자문서로 변환하는 작업도 있죠. 틈날 때마다 하염없이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냥 멍하니…(웃음). 이런 작업들이 사실 고통스럽기도 하고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운동의 자산이 되는 소중한 과정이죠.

그리고 각종 연구작업을 빼놓을 수 없어요. 조직사(노동조합사)나 투쟁사를 기록하는 작업의 경우에는 해당조직과 회의를 열어 토론도 해야 해요. 이건 단순히 인터뷰를 채록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운동사적으로 돌아봐야 할 지점에 대해서는 쟁점토론을 통해 어떤 기억을 어떻게 기록으로 남길 것인지 면밀하게 따져봐야 하니까요.

그리고 공부도 해야죠. 눈 오면 눈도 치우고.”

 

그랬다. 마침 인터뷰 전날엔 수도권에 첫눈이 내렸다! 한내의 수많은 작업 중에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업은 무엇인지도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전노협 자료를 정리할 때가 한내의 시작과도 같은 작업이었기 때문에 가장 뜻깊었죠. 개인적으로는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 투쟁백서를 만들었던 과정이 기억에 남아요. 비정규직 운동사의 초반을 이루는 한통계약직은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처절하게 불살라 없어지는 투쟁을 한 거잖아요.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축적하고 남기긴 했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누구도 우리를 기억해주지 못할 것 같다는 절박함이 당시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투쟁백서를 만들기로 했고, 노동자들의 생각과 고민을 담아내는 과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가끔씩 한통계약직 투쟁 자료를 전시할 때엔 당시 투쟁했던 친구들이 와서 엄청 기뻐하기도 했고요.”

 

노동자의 역사는 노동자 스스로!

 

어느덧 한내는 자료관의 위상을 넘어, 목표했던 노동역사박물관에 성큼 다가서고 있다. 노동역사박물관은 자료를 보관하고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노조운동의 자랑스러운 정신과 역사를 계승하는 토대로서 기능하고자 한다. 박제화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선배노동자들의 투혼이 깃든 공간으로서 박물관은 이제 막 출발선을 떠났다. 앞으로 이곳을 방문할 관람객들을 위한 안내 멘트도 특별히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일단 오시는 길이 험하단 걸 알고 오셔야겠죠. 험한 길이지만 오시면 분명히 느끼고 가는 게 있을 거예요. 하나는 ‘아, 이렇게 자료를 모아서 쓸 수 있구나’라는 걸 직접 보고 갈 수 있겠지요. 두 번째는 운동의 한 시기였던 전노협을 테마로 엮어놓은 전시실을 보면서 8,90년대까지 운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볼 수 있어요. 해설도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이 충분히 해드릴 거예요.

그러고 보니 카셰어링 서비스를 이용해서 여기에 온 젊은 동지들도 있었네요. 차 없으면 오기 불편한 곳이니까요. 3호선 삼송역이나 경의선 금촌역에서 마을버스로 20~30분이면 오지만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한내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의 양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20만 건에 달하는 기록물 중 상당수는 아직 노동자의 이야기로 주체화되지 못한 채 ‘재료’로 남아있다. 노동자역사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것 자체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이들이 더 많아져야 남겨진 자료들에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도 점차 그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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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 건물 1층에 위치한 전노협 전시실. [출처: 철폐연대]

 

“노동자의 정체성은 자본에 맞서 싸워왔던 선배 노동자들과 당대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잖아요. 이것을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자본은 그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의 역사를 왜곡하고 지워나가거든요. 한내는 사라져가는 노동자들의 기억과 투쟁을 기록으로 만들어가면서 노동자역사를 바로세우고자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단지 몇 사람만의 노력으로 가능한 게 아니잖아요.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자본의 탄압과 통제는 날로 교묘해지고 있어요.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회유하고, 파업 투쟁을 와해시키는 일종의 패턴이 전수되고 있는 셈이에요. 저들 나름대로의 매뉴얼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또 성찰할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특히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역사 공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노동자역사를 곱씹어야 할 이유에 대한 정경원 사무처장의 대답이다. 단지 한내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삶과 투쟁이 곧 노동자역사의 일부분임을 인식하고, 노동자 자기역사 쓰기를 소홀히 하지 말자는 것이다. 꼭 맵시 좋게 잘 다듬어진 글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역사는 노동자에 의해 기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스스로의 활동을 객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노동자역사 한내’가 잘 닦아놓은 터전을 이제 더 많은 이들이 함께 가꾸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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