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12]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한다 / 지수

by 철폐연대 posted Dec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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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인권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한다

 

지수 • 사회변혁노동자당 여성활동가/철폐연대 회원

 

 

 

작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많은 이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결정은 여성혐오에 맞선 투쟁, 미투운동, 낙태죄 폐지 투쟁 등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과 통제에 맞서 싸워온 이들의 투쟁의 성과였다. 여성들은 헌재 결정에 따라 국가가 더 이상 여성을 처벌의 대상, 출산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생명권과 건강권, 행복추구권을 가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첫 시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집 근처 병원에서, 사회적 낙인에 대한 걱정 없이, 비용에 대한 걱정 없이, 충분한 의료적 상담과 양질의 임신중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헌재 판결 이후 일 년이 넘도록 정부의 입법 보완과 의료 시스템 마련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단지 형법상의 ‘죄’만 사라졌을 뿐 현행 모자보건법 14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인공임신중절 수술 이외 범위와 그에 맞는 의료 체계에 대한 논의는 진행조차 되지 않았다. 여성들에게 임신중절시술의 접근성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입법 공백을 틈타 인공유산유도제 암시장만 커져갔다.

 

입법시한 3개월 앞두고 ‘낙태죄’ 부활시킨 정부

10월 7일, 정부가 내놓은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그야말로 여성들에 대한 배신이었다. 헌재가 요구한 입법시한을 고작 석 달 앞두고 내놓은 정부안은 낙태죄 폐지가 아닌 ‘존치안’이었다. 정부는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수 기간, 사회경제적 사유, 상담 의무 등 허용 요건을 추가 신설하면서 “위헌적 상태를 제거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낙태죄’ 유지를 골자로 한 정부안은 낙태죄를 형법상에서 없애라는 여성들의 요구에 대해 국가의 통제를 거두지 않겠다는 선언이었고, ‘주수제한·사유제한’을 명시해 임신중지한 여성에 대한 처벌기준을 더욱 ‘세분화’해 ‘관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낙태죄’의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살려낸 건 바로 문재인 정부였다. 정부안은 ‘임신중지의 허용요건’을 추가 명시하는 방식으로 269조, 270조 처벌조항을 유지하겠다는 것으로, ‘임신 14주 이내에는 처벌하지 않고, 임신 24주 이내에는 강간 등에 의한 임신이나 사회적・경제적 사유 등에 해당하는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즉, 허용범위를 명시해, 허용주수와 허용사유를 나누고, 24주 이후의 후기낙태에 대해서는 이유 불문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국가의 허락과 처벌의 구도는 여전히 유지된다. 특히 후기낙태의 경우, 주로 배우자의 폭력이나 여성과 태아의 건강상 문제, 임신에 대한 인지가 늦은 청소년 임신인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어떠한 의료시스템으로 도울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정부가 처벌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분노스럽기만 하다.

 

또한 정부안이 제시한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임신중지는 ‘상담과 숙려기간’을 의무요건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프랑스, 미국 버지니아주・일리노이주 등 상담의무화 제도를 시행했던 다른 나라에서도 심리적 부담, 시술 시점 지연, 의료비 지출 증가, 시술 위험성 증가, 건강권 악화 등의 이유로 폐지한 제도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자유권위원회, 세계산부인과학회 등에서도 거듭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 임신중지와 관련한 상담은 ‘의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인의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진행해야 하며, 정보를 전달하고 의료접근권을 보장하는 목적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통해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2016년, 보건복지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임신중지시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에 포함시키려고 했다. 이 같은 시도는 뭇 여성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는데, 이번에도 보건복지부가 모자보건법 개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임신중지는 임신 유지나 출산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의료행위’임에도, 여전히 국가는 이를 의사의 ‘양심과 신념’의 문제로 호도하면서 여성의 의료접근권을 크게 후퇴시키려 하고 있다. 여성들은 의사들의 진료거부 속에 상담기관과 의료기관을 찾아 전전해야 하는 더욱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한편, 이번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만 16세 이상 미성년자는 ‘불가피한 경우 임신의 유지‧종결에 관한 상담사실확인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면서, 만 16세 미만자에게는 ‘법정대리인의 부재 또는 법정대리인에 의한 폭행‧협박 등 학대로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경우 이를 증명하는 공적 자료와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의 임신 유지‧종결에 관한 상담사실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의무를 뒀다. 그러나 의료행위에 대한 동의 능력은 연령에 따라 제한될 수 없으며, ‘본인의 동의’를 기반으로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담사실확인서’를 받는 복잡한 과정에서 되려 임신중지의 적기를 놓칠 위험도 커 24주를 넘길 경우 처벌받거나 더욱 음성적인 방법으로 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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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8. “처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낙태죄’ 폐지하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기자회견 모습. [출처: 사회변혁노동자당]

 

‘낙태죄’는 여성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의 관리통제 방식

‘낙태죄’와 모자보건법 14조(임신여성이나 배우자가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이나 준강간 등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등의 사유에 한해 임신중지허용조항)가 함께 존속해 왔던 과정은 여성의 출산을 통제하면서 국가가 생명을 선별하고, 생산성 있는 인구만을 재생산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의 관리통제 방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은 핵심 관리정책이었고, 이 과정에서 평등한 삶의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의 책임은 방기되고 그 책임은 여성에게 전가되었다.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들에 대한 비난과 함께, 비혼여성과 장애여성 등 소위 정상가족 범주에 들지 않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비난 역시 공존했다.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도, 임신을 선택한 여성도 비난받았다. 사유리의 자발적 비혼모선언에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사회를 만든 건 국가였다. 자기 삶과 태어날 아이의 삶에 대한 숙고 끝에 이루어진 여성의 결정을 신뢰하지 않는 국가정책은 언제든 여성을 처벌 대상으로 올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비정상성에 대해 이 사회는 오랜 기간 침묵해 왔다.

 

안전한 임신중지는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여성의 생명과 건강에 관한 권리이자, ‘필수 의료행위’다. 그러나 그간 정부는 한 번도 피임과 임신중지를 필수적인 의료행위로 사고한 적이 없다. 보건복지부는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임신중지시술을 비도덕적 의료행위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로 여성들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식약처는 피임약 재분류 논란에서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 요구를 묵살했다. 모자보건법은 여성을 모성에 가두고, 임신과 출산하는 몸으로만 가정하면서, 국가가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등 여성의 재생산권 전반을 어떻게 보장할지, 의료접근권을 어떻게 확장시킬지에 대한 고민은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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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9.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통제 반대! 낙태죄 전면폐지 촉구!”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100인 선언> 기자회견 모습.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임신중지를 전면 비범죄화하고, 여성의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사회로!

10월 22일 폴란드 헌법재판소가 태아 기형의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법에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다시금 여성들의 투쟁이 타오르고 있다. 이번 위헌 판결로 강간,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임신 여성의 건강상의 위험을 제외한 모든 임신중지가 금지되면서, 분노한 여성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코로나 위기로 10명 이상의 집회가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바르샤바에서만 1만5천 명이 거리로 나와 헌법재판소를 규탄했다. 1956년 임신중지가 허용되었던 폴란드의 여성인권 수준은 매우 높은 편에 속했다. 학교에는 성교육이 도입됐고, 피임약에는 정부 보조금이 지급됐다. 그러나 1993년 폴란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폴란드의 임신중지권은 크게 후퇴했다. 다시금 분노한 여성들의 투쟁이 체제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게 하고 폴란드를 변화시킬 것이다.

 

캐나다는 1988년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형법 251조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이후 다른 개정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비범죄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치료적 임신중지 위원회’를 통해 승인을 받아야만 했던 절차는 많은 여성들을 후기 임신중지로 내몰았고, 이것이 여성의 ‘신체의 안전’을 해칠 우려에 주목한 판결이었다. 캐나다는 현재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 조항도 없고, 주수나 사유 제한, 의무상담제도나 숙려 기간, 제3자의 동의 의무 규정도 없다. 임신중지는 공공병원에서 제공하는 무상 의료서비스가 되었고, 캐나다 내 주정부들은 2015년부터 약물유산유도제를 무상공급하고 있다. 12주 이내 임신중지가 85.2%를 차지하고 있고, 21주 이상은 0.66%에 그친다는 캐나다의 통계수치는 실제 비범죄화로 인한 후기임신중지의 위험성이 얼마나 과장되어있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캐나다 등의 유의미한 사례들은 외면한 채 해외에서의 각종 규제조치들만 모아 짜깁기하는 방식으로 입법안을 마련했다. 이 나라에서는 3분기 구분과 처벌을, 저 나라에서는 상담 의무를, 다른 나라에서는 숙려기간을, 의사의 거부권을, 미성년자 규제를 끌고 왔다. 이 정도면 충분히 헌법재판소의 입법가이드라인에 충실한 입법안을 만들었다고, 여성들의 권리가 향상될 거라고 자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또다시 여성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면서 체제를 유지해나가려는 국가의 의도라는 것을.

 

처벌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고, 더 이상 국가의 허락도 처벌도 거부하겠다는 여성들의 투쟁이 다시금 진행되고 있다. 낙태죄는 형법에서 반드시 삭제되어야 하고, 모든 허용과 처벌요건, 의무상담제도나 숙려기간, 의사의 진료거부권, 제3자 동의 등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정부의 반동적 낙태죄 부활시도에 맞서 낙태죄를 전면 폐지시키고,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과 통제를 없애고 여성의 재생산권 전반을 권리로써 보장받는 그날까지 함께 투쟁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