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210] 작은 사업장 노동자와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 / 임용현

by 철폐연대 posted Oct 0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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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작은 사업장 노동자와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

 

 

임용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1. “일하는 사람 누구나 쉴 권리가 필요해”

 

세계인권선언 제24조는 “모든 사람에게는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 휴가를 포함하여 휴식과 여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 누구나 휴식과 여가를 충분히 누릴 권리가 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권리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일터에서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을 잘 배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더구나 요즘 들어서는 일하는 장소와 시간에 덜 구애받는 디지털 플랫폼노동이나 원격업무가 점차 확산됨에 따라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의 경계도 무너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시다시피 적정한 쉼은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에서는 휴가와 휴식을 노동자의 권리로써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휴식에 관한 권리는 결코 시간상의 문제로만 국한할 수 없습니다. 근무 중 휴게시간이 제아무리 잘 지켜진들 쉴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다면 휴게시간은 단지 일손을 멈춘 시간에 그칠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일하는 사람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제도적 근거는 얼마나 잘 마련되어 있을까요?

 

5. 본문사진1.jpg

 

2022년 8월 고용노동부가 발행한 ‘휴게시설 법령 주요내용 해설 가이드’ 표지.

[출처: 고용노동부]

 

 

2.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의 내용

 

지난 8월 18일부터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규정을 담은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되었습니다. 기존 산안법에는 기업의 휴게시설 설치를 권고하는 내용 정도가 있었을 뿐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제재할 수 있는 규정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개정 산안법에 따른 시행규칙의 개정 및 시행이 있기 전까지는 “노동자들이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휴식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을 갖추어야 한다”는 ‘산업안전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만 존재했던 겁니다. 새 법령에 의하면 정부가 정하는 휴게시설 설치·관리 기준을 위반할 경우 일정한 직종과 규모의 사업주는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됩니다.

 

휴게시설 설치·관리 대상과 그 기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볼까요?

 

정부는 산안법 시행령 제96조의2에 따라 휴게시설을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사업장 요건을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휴게시설 미설치 시 제재 대상으로 △ 상시 근로자 20명 이상을 사용하는 사업장(건설업의 경우에는 공사금액이 20억 원 이상인 사업장) 또는 △ 상시 근로자 10명 이상을 사용하는 사업장으로서 전화상담원, 돌봄 서비스 종사원, 텔레마케터, 배달원, 청소원 및 환경미화원, 아파트 경비원 및 건물 경비원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직종의 근로자가 2명 이상인 사업장의 사업주로 한정했습니다.

 

또한, 휴게시설의 구체적인 설치 및 관리기준(산안법 시행규칙 제194조의2)도 명시했는데요. 휴게시설의 바닥면적은 최소 6㎡ 이상이어야 하며, 만약 둘 이상의 사업주가 ‘공동휴게시설’을 마련할 시에는 사업장 숫자에 6㎡를 곱한 면적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동휴게시설이란 산업단지 내 입주기업이나 마트, 백화점 등 대형유통센터 내 입점업체 사업주가 다른 사업주와 공동으로 설치·운영하는 휴게시설을 뜻합니다.) 그리고 휴게시설의 바닥면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최소 2.1㎡를 넘겨야 합니다.

 

새 법령에서는 휴게시설 내 온도와 습도, 조도(밝기) 기준도 정해 놓았습니다. 적정 온도(18℃~28℃)를 항시 유지해야 하고, 체감온도와 불쾌지수에 영향을 미치는 습도 역시 적정한 수준(50%~55%)을 벗어나선 안 됩니다. 또한 휴식에 방해되지 않는 수준의 은은한 밝기를 유지(100~200Lux)해야 하고, 창문이나 환풍기 등을 통한 환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편, 휴게시설 내 반드시 갖춰야 할 비품들도 있는데요. 가령 의자(단, 휴게시설을 온돌 등 좌식으로 설치·운영하는 경우는 예외), 마실 수 있는 식수 설비가 대표적인 필수 비품입니다.

 

 

5. 본문사진2.jpg

“우리 공장 쉬는 공간입니다. 휴게실은 아니고 이것저것 필요 없는 물건 놓아두던 곳인데 밥 먹고 잠깐 앉아서 쉴 정도는 됩니다. 지붕이 있어서 비를 맞지는 않습니다.” - 반월시화공단 노동자들이 보내온 휴게실태 사진과 한 줄 사연 중. [출처: 월담노조]

 

 

3. 권리 목록에서 배제되고 누락된 것들

 

정부가 하위법령에서 정한 기준을 보면 여러 부분에서 미흡함이 발견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보장해야 할 ‘휴게권’을 사업장 규모에 따라 차등, 분할한 것입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8월 배포한 「휴게시설 설치 가이드」에 의하면 “사업의 종류와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사업장에 휴게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면서도 의무설치 적용대상에서 20인 미만 사업장 등은 제외하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에도 그 적용을 1년 유예하고 있어 실제 휴게시설 의무설치 규정은 2023년 8월에 이르러서야 효력이 발생합니다. 이 같은 규정으로 인해 작은 사업장이 밀집해 있는 산업단지 노동자 등은 일터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권리로부터 배제되었습니다. 작은 사업장일수록 저임금 장시간 노동, 낡고 열악한 작업환경의 문제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쉴 수 있는 공간은 절실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반월시화공단노동조합: 월담’이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진행한 ‘쉴 권리 캠페인’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반월시화공단에서 일하는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은 제대로 쉴 공간이 없어 작업장 구석, 화장실 옆 계단, 공장 담벼락, 길가 경계석, 개인차량 안, 회사 마당 등에서 쉬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매우 빈번하게 목격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작은 사업장일지라도 사장실이나 고객응대실을 갖추고 있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 항상 ‘사장님’과 ‘고객님’만 사람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사람답게 쾌적한 곳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할 권리가 당연히 있습니다. 사업장의 크기를 기준으로 휴게시설 의무설치 대상을 가르는 차별적인 정책은 꼭 시정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최소면적 기준의 문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앞서 살펴본 바닥면적 6㎡, 높이 2.1㎡의 휴게시설 공간이 두 발 뻗고 휴식을 취하기에 적당한 크기로 여겨지시나요? 이 정도 면적 기준은 기껏해야 2평 정도여서 의자와 정수기, 냉난방기 등 휴게시설에 반드시 갖춰야 할 비품과 설비 등이 차지하는 공간을 제외하면 서너 명의 사람이 이용하기에도 매우 협소합니다. 이번에 시행되는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에 따르면 휴게시설의 최소 설치면적 기준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 사업체 규모 및 해당 시설을 이용할 노동자 수에 따른 별도 기준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사업장 노동자 수가 100명이든 1,000명이든 6㎡짜리 공간만 마련하면 처벌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노동계는 정부가 ‘산안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 및 시행규칙 일부개정령안 입법예고’를 발표할 때부터 노동자 1인당 단위면적 기준을 도입하라고 줄곧 요구해 왔지만, 정부는 이러한 상식적인 요구조차 본체만체했습니다. 휴게시설을 동시에 이용하는 인원의 잠재적 수효를 면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업장 내 모든 노동자의 휴게권 보장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휴게시설의 위치 규정 또한 논란의 대상입니다. 시행규칙에서 휴게시설은 “(노동자가) 이용하기 편리하고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고 “△ 화재·폭발의 위험이 있는 장소, △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장소, △ 인체에 해로운 분진 등을 발산하거나 소음에 노출되어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장소”로부터 떨어진 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공동휴게시설은 각 사업장에서 휴게시설까지의 왕복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휴식시간의 20퍼센트를 넘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도 ‘휴식시간의 20퍼센트’가 점심시간까지 산입한 휴게시간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작업 중 짬짬이 휴게시간만을 의미하는지 불명확합니다. 또한 작업장소와 가까운 곳의 기준 역시 사업주의 입장에 치우쳐 해석될 여지가 높습니다. 이같이 애매모호한 기준은 노동자보다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수 있어 제도의 실효성을 떨어지게 만듭니다.

 

독일의 사례를 한번 살펴볼까요? 독일은 작업장령(Arbeitsstättenverordnung)에서 노동자의 안전 및 건강보호를 위한 세부 규정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휴게시설 위치와 관련된 항목에서는 “접근성이 편리하고, 도보로 안전하게 도달해야 하며, 5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어야 하고, 거리는 100m를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동자가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휴게시설을 설치했을 때 휴게시설의 설치 목적은 비로소 달성될 수 있습니다.

 

4. 맺는말

 

위에서는 주로 휴게시설 미설치 시 처벌 대상 사업장의 기준, 휴게시설의 면적과 위치 기준의 문제점을 짚어 보았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내포하고 있는 공통적인 시사점은 모든 노동자들이 쉴 수 있는 여건을 실효적으로 보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정부의 휴게시설 설치 의무화 제도는 권리의 공백 상태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휴게시설의 부재는 일손을 놓고 잠시나마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야 할 노동자들을 정처 없이 배회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휴게시간의 자유로운 활용은커녕 작업 재개를 위한 대기시간으로 변질되는 사례가 작은 사업장 등지에서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부는 사업의 종류와 규모, 여건 등에 따라 합리적인 휴게시설 설치·관리 기준을 마련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모든 노동자에게 평등하게 보장해야 할 휴게권을 갖가지 구실을 들어 박탈 또는 유예한 조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작은 사업장이라 할지라도 휴게실은 의무적으로 설치되어야 하며, 사업장 규모상 도저히 휴게실을 설치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공동휴게시설을 설치하는 등의 방법으로 정부와 지자체, 사용자단체는 열악한 휴게실태 개선을 위해 모든 책임을 다해야만 합니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쉴 권리’는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보장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인권의 요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