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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질라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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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로 가는 순례길, 전국자동차판매연대노조 이야기
손소희 (지역사회노동자운동지지모임, 철폐연대 회원)

 

 

<질라라비>에 매월 투쟁사업장 소식을 글로 적어 보내야 한다. 사드반대 투쟁 현장인 성주 소성리를 지켜야 하는 나로선 노동자 투쟁에 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나의 연대를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내게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투쟁에 진심어린 만남과 연대를 실천하지 못한 소식 전달의 두께는 얄팍하기 그지없다. 나의 연대는 깃털처럼 가볍다. 

 

1 전국자동차판매연대노조 김선영 위원장 [출처 장진영].jpg전국자동차판매연대노조 김선영 위원장 [출처: 장진영]

 

함께 싸울 때 힘이 커진다 
 

‘노동자-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위원회’(이하 공투위)의 광화문 고공단식농성장을 사수하기 위한 27일은 치열했다. 투쟁현장에 매일같이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다. 공투위 소속은 아니었지만 한결같이 저녁문화제 때면 제일 앞줄의 오른쪽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사진으로 올라왔다. 전국자동차판매연대노조(이하 판매연대)의 김선영 위원장이었다. 
그날, 고공단식농성을 올라가던 4월 14일에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날은 광명에서 조합원 간담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빨리 광화문으로 오라는 급한 연락을 받고 영문도 모른 채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여섯 명의 동지(김혜진, 이인근, 김경래, 오수일, 고진수, 장재영)가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폐!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광화문 광고탑으로 올랐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노숙농성 할 준비를 해서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끝까지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한 며칠 결합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곳을 떠나선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광고탑에 올라간 여섯 명의 동지들이 내려올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고공단식농성을 하는 곳에 판매연대의 내용이 들어간 현수막이 걸려있거나, 요구가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정규직 철폐’라는 사회적 큰 의제를 가지고 싸워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판매연대 노동자들이 열심히 싸우고 연대하다 보면 언젠가 자동차판매 노동자들이 겪는 아픔이 사회에 더 많이 알려져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선영씨가 공투위를 알게 된 것은 3월 2일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였다. 그전에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공투위의 다수 동지들이 금속노조 대의원대회가 열리는 충주까지 달려왔다. 판매연대의 금속노조 가입 승인을 현장안건으로 발의한 날이었다. 금속노조 가입을 승인하라는 피케팅과 선전전을 하는데 공투위 동지들이 힘을 쏟는 모습에 선영씨는 노조활동 이래 처음으로 동지애와 연대의 큰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에 힘입어, 공투위가 전국의 투쟁사업장을 찾아다니는 순회투쟁을 한다는 소식에 스스럼없이 판매연대 조합원들과 함께 버스에 탑승했다. 3월 20일부터 전국을 순회하는 4박 5일 동안 투쟁사업장공동투쟁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영씨 생각에는 대부분이 비정규직이거나 정규직이라도 쫓겨난 소수의 노동자들이 개별로 싸워서는 어려울 것 같았다.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흩어져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모아서 함께 싸우자는 것에 동의하였다. 판매연대는 양재동에 위치한 현대차 본사에서 매일 일인시위를 한 지가 1년이 넘어가고 있다.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현대차 본사도 신경 쓰거나 위협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절박한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투위 참여를 결정하였다. 물론 조합원 설득이 쉽지 않았다. 우리 사업장 문제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동안 싸워오면서 개별사업장 문제가 개별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나 뻔했다. 

 

노동조합의 깃발을 꽂기 위한 여정, 열두 고개 길
 

판매연대가 노조를 결성한 것은 2015년 8월이었지만, 그 이전부터 노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선영씨의 현대차 대리점 근무경력은 15년이다. 처음부터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벌어진 격차는 심각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노조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현대차와 계약을 맺은 대리점의 소장은 원청의 정규직 영업사원 출신들이 원청사 퇴직처리를 하고 대리점을 받아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대리점 소장의 판매사원에 대한 인권침해가 심각했다. 대리점 소장의 폭언과 폭행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시시때때로 들어야했고, 폭행도 스스럼없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적을 올리기 위한 보상약속은 이행되지 않는 것이 태반이었다. 
선영씨는 경기도 안산의 중앙대리점 소속 사원이었다. 한 대리점의 영업사원은 10~15명 수준이었다. 최대 20명 정도였다. 선영씨는 신입사원 때부터 노조를 만들 생각에 민주노총에서 상담을 한 적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노조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4년 전부터였다. 민주노총을 찾아갔다.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상근자와 만나 상담을 했다. 노조를 만드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자동차판매 대리점마다 상조회가 있었다. 상조회장에게 처음부터 노조를 만들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정보 공유와 친목 도모를 위해 온라인 밴드를 만들어서 사이버 활동을 시작했다. 사람들의 호응은 미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밴드에서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부산사람이었다. 놀랍게도 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의 처우가 매우 열악하고 차별도 심각해서 비정규직 노조를 만드는데 도와야겠다는 사람이었다. 반가웠다. 모이자는 데로 당장 달려갔다. 처음 모임은 10명도 채 안되었지만 부산, 충주, 서울 등 전국에서 노조를 만들자고 용기를 낸 사람들이 모였다. 모두 노조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몇 번 모임을 하고는 다시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상근자를 찾았다. 전국적으로 노조를 만들자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금속노조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밴드에는 수백 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안산과 경기지역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서 금속노조의 본조로 가야한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리고 금속노조 본조의 미조직비정규직사업실(이하 미비실)로 선영씨를 연결해주었다. 미비실에는 자동차판매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담당자가 생겼다. 전국을 돌면서 비밀리에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등 안 가본 곳 없이 찾아다니면서 노조를 준비하는 회의를 했다.  
선영씨의 바람은 노조를 금속노조의 지회로 설립하는 것이었다. 금속노조는 지회 설립을 반대하였다. “당신들끼리 노조를 만들어 일단 규모를 키워서 금속노조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때도 왜 금속노조 지회 설립을 반대했는지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노조를 많이 해본 선배들이라 믿고 충고를 따랐다. 

 

2015년 8월 22일 노조를 설립하였다. 조합원은 50명으로 시작했다. 주로 경기도와 수도권에서 조합 가입이 되었다. 다른 도시는 소수로 가입했다. 월요일 출근했더니 임원으로 뽑힌 10여 명이 소속된 각 대리점마다 발칵 뒤집혔다. 대리점마다 임원 사퇴를 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협박에 1주일을 버텨내지 못하고 임원들은 다 탈퇴를 하고 만다. 위원장과 사무처장만 남았다. 대리점에는 현대차 원청으로부터 위원장과 사무처장에 대해서 해고지침이 떨어졌다.  
위원장이 된 선영씨는 계속 출근을 했다. 소장은 매일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해댔다. 일주일이 지나자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뒤통수를 때리고, ‘귀싸대기’를 때리고, 계단에서 머리를 박고, 시간이 지날수록 폭행의 강도는 세졌다.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한 모습으로 선영씨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노조를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견뎌냈다. 
아침 출근길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 했다. 자동차판매 노동자에게 해고는 사번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당장 해고를 당한 상태는 아니었다. 잘 견뎌내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였다. 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을지로위원회가 현대차로 연락을 취했지만 회사는 경악을 할 뿐 바뀌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대리점 소장은 더 미친 듯이 펄쩍 뛰어대고 “국회로 출근하라.”며 더욱 악랄하게 탄압을 자행했다.
선영씨가 근무했던 15년 동안 일어났던 수많은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언론사에 제보했다. 어디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KBS의 기자를 소개받아서 노조를 만들어 매일같이 폭행당했던 것을 제보했다. 동영상이 있었다. 바로 대리점에 설치된 CCTV였다. 

 

8월 22일 노조를 설립하고 9월 내내 대리점 소장으로부터 폭언과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현대차 원청에서 폭언‧폭행 근절지시가 내려왔다. 현대차는 판매연대 위원장을 해고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 대리점 감사를 시작했다. 원청에서 감사를 실시하면 판매사원들의 개인통장 사본을 제출해야 한다. 부인의 통장까지 다 내놓아야 한다. 다행히 선영씨는 문제 될 게 없었지만 다른 사원이 지적을 당하게 되면서 3주간 영업정지를 당한다. 결국 2016년 1월 15일 영업소는 폐쇄를 당한다. 

지금까지 현대차지부(현대차 정규직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으로 대리점이 폐쇄하게 될 시에는 인근 대리점으로 고용승계가 되어왔다. 그러나 선영씨가 속해 있던 안산 중앙대리점은 전 사원이 노조에 가입한 곳이었다. 단 한 명도 타 대리점에 고용승계가 되지 못했다. 
다른 대리점에서 선영씨 동료를 채용하고 싶어도 현대차 원청에서 채용을 못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대리점 소장이 “좀 기다려보자. 노조 문제가 좀 잠잠해지면 괜찮지 않겠냐?”고 해서 1년간 그 대리점으로 출근을 했지만 사번을 받지 못해 유령직원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소장이 채용의지가 있어도 원청인 현대차가 채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소장들의 증언이다. 
광주의 신안대리점도 판매사원 전원이 노조에 가입하고 소장에게 단체협약을 요구했다. 3일 만에 대리점은 문을 닫았다. 소장의 말에 의하면 “귀때기가 떨어질 정도로 원청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그 정도로 판매사원 관리는 대리점 소장의 몫이 아니라 원청사의 철저한 관리감독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조 가입이 늘어나는 만큼 사건사고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조를 만들기가 무섭게 해고도 비일비재했다. 금속노조에 가입을 요청했다. 금속노조는 판매연대가 조직전환 총회를 하고 금속노조에 가입한다는 것을 중앙집행위원회에 보고했다. 2016년 5월에 판매연대는 조직전환 총회를 개최하여 금속노조 가입을 결정한다. 금속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판매연대 총회에 참석해서 투쟁사를 하고, 깃발을 맞춰주었다. 금속노조 조끼도 맞췄다. 금속노조 신문의 기사로도 실렸다. 금속노조에 가입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웬걸! 현대차지부의 판매위원회가 판매연대의 금속노조 가입을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 이유는 “회사 쪽에 대리점의 할인판매 등 불법 영업에 대한 규제와 대리점 폐쇄를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가입은 위원장의 전결사항이지 회의의 의결사항이 아니었다. 금속노조 위원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판매연대의 가입 승인을 안 할 수 없으나 정규직의 반대에 부딪혔으니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선영씨는 농담으로 “추석을 넘기는 건 아니죠?” 라고 했고, 금속노조 위원장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지만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두 번의 큰 명절을 넘겼다. 아직도 가입 승인은 감감무소식이다. 2017년 3월 2일 금속노조 대의원대회에서 현장발의 안건으로 올라갔지만 현대차지부 판매위원회의 격렬한 반대를 뚫지는 못했다.

 

‘쓰잘데기 없는’ 금속노조 가입 승인 논란은 자본에게 유리한 고지를 넘겨주는 꼴
 

금속노조에 가입을 했는데 승인이 나지 않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판매연대 스스로도 이런 불미스런 사건을 소문내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라고 생각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2016년 11월 중앙위원회에서는 당연히 승인될 거라 기대했다. 금속노조 조직실에서 승인한다고 큰소리를 쳤기 때문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현대차지부 판매위원회의 반발로 안건은 다뤄지지 않았다. 배신감이 컸다. 
조직전환 총회를 했던 5월 21일 이후 300명 조합원들의 산별기금을 3개월에 걸쳐서 납부했다. 금속노조에 가입한다는 것이 현장에 소문나면서 조합원 수는 100명이나 더 늘어났지만 가입 승인 건이 흐지부지 되면서 내부의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현장은 불안했다.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100명도 넘는 해고자가 발생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금속노조 가입문제로 시간을 끌면서 자본에게 유리한 고지를 넘겨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해고자는 다섯 명이 남아서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해고자들은 택시, 대리운전, 공장으로 하나 둘 떠나갔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더 나은 조건의 현장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돌아온 것은 해고였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노조는 책임을 져 줄 형편이 못 되었다. 선영씨는 조합원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할 노릇이었다. 현재는 250명의 조합원이 남아있다. 해고된 조합원이 탈퇴를 하지 않고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겠다는 의사가 있어서 그나마 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금속노조가 가입을 승인하든, 하지 않든 판매연대는 이미 금속노조의 조합원이다. 2016년 5월에 산별기금을 납부했다. 그리고 올해 5월부터 250명분의 조합비를 납부했다. 조합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산별기금을 납부했던 계좌로 조합비를 납부한 것이다. 매월 조합원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금속노조는 가입 승인된 경우만 조합비를 납부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납부된 조합비는 보관하겠다고 답이 왔다. “금속노조가 금고도 아닌데 왜 돈을 보관하겠다고 하냐?”고 선영씨는 웃음을 짓는다. 더 이상 쓸데없는 논란에 휩싸여서 자본에게 시간을 벌게 해주는 일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대리점의 판매노동자들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현대자동차 배지를 가슴에 달고, 명함을 돌리면서 현대에서 생산된 차를 판매해왔다. 현대차는 대리점 판매노동자들의 업무 전 과정에 개입해왔다. 사원증 발급과 취소로 판매노동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겁박했다. 
판매연대 노동자들이 긴 시간 동안 금속노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결하여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현대차지부 판매위원회의 반발로 금속노조 가입 장벽을 걷어내지 못했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해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노동자는 하나다.” 라는 지표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금속노조로가는순례길, 전국자동차판매연대노조이야기_손소희-질라라비20170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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