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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물량팀’ 조선소를 배회하는 유령 노동자들

 

임용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반복되는 중대재해

 

#장면 하나.

2020년 2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건조 현장에서 일하던 물량팀 노동자가 15m 높이에서 실족사했다. 당시 재해자는 LNG선 탱크 내 트러스(작업용 발판 구조물)를 설치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재해 현장에는 안전그물망(추락 방지 안전시설) 설치도, 안전관리자 배치도 일절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사고 당일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작업에 착수해서는 안 되는 환경이었다고 노조 관계자는 증언했다.

 

#장면 둘.

2021년 5월 어버이날 아침,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사내하청업체 ㄱ사 물량팀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원유 운반선(VLCC) 탱크에서 용접작업을 하던 중 20m 높이에서 추락 사망했다. 재해자는 2006년부터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일했고, ㄱ사에는 올해 2월 입사했다. 물량팀은 일감 위주의 단기계약을 맺는데 고인 역시 현대중공업의 공정계획에 따라 그때그때 일을 해왔다. 재해 당시에도 하청업체와 물량팀 노동자들은 원청이 정한 공기(공사기간)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어버이날에도 고인을 비롯한 하청노동자들이 평일과 다름없이 작업에 투입됐다.

 

#장면 셋.

2021년 6월, 전남 해남군에 있는 대한조선 물량팀 노동자가 기숙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고인은 사망 직전 5월 24일부터 31일까지 8일간 67시간을 근무했다. 대한조선은 올해 처음 석유화학제품 운반선(PC선)을 수주했는데, 초도 작업에 대한 매뉴얼이 마련되지 않아 공정이 지연됐고 작업 속도를 만회하기 위해 물량팀을 서둘러 투입했다고 한다. 해당 지역 노조 관계자와 유족들은 고인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가 결국 과로사한 것이라고 보았다.

 

5 풀어쓰는 비정규운동_01.jpg

 

2020.02.24. 물량팀 노동자가 추락 사망한 재해 현장 앞에 추모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는 모습. [출처: 현대중공업지부]

 

세 가지 장면은 최근 1,2년 새 발생한 조선소 물량팀 노동자의 중대재해 사례를 간추린 것이다.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는 원ㆍ하청 자본의 민낯을 엿볼 수 있다. 세 장면에서 물량팀 노동자는 공히 ‘물량을 쳐내는 기계’에 불과했다.

‘하루 8시간만 일할 수 있는 권리’. 일손을 멈추고 8시간 노동제 쟁취와 만국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치는 이날도 일하다 죽어간 노동자들이 있었다. 2017년 메이데이 아침, 삼성중공업 크레인 붕괴 사고로 노동자 6명이 숨졌고 25명이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참사의 희생자들은 전부 하청업체 소속이거나 물량팀 노동자들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찔한 곳 투성이

 

배를 짓는 현장에서 어버이날에도 노동절에도 유령 노동을 하는 이들이 떨어져 죽고 깔려 죽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충돌, 협착, 폭발, 전도, 추락, 붕괴, 질식, 감전…. 조선소 현장에서 일어나는 재해 유형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실로 다양하다. 일터 도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중량물을 다루거나 각종 유기용제를 취급하는 일이 다반사이기도 하거니와 고소 작업, 밀폐공간 작업, 협소공간 작업 등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현장 여건을 빈번하게 마주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작업장 안에서 용접, 그라인더(사상), 도장 작업 등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혼재 작업’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그곳이 사방이 닫혀 있는 어두컴컴한 공간이라면, 또는 층층이 덧댄 발판을 딛고 상하 동시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면, 서로 다른 일을 한꺼번에 하면서 동료 작업자와 긴밀한 소통이나 협력을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다.

 

조선소의 어떤 현장을 가더라도 “안전이 최우선 다음이 품질력 향상, 다음이 생산성향상” 이라는 플랜카드가 걸려있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이다. 생산성 향상 최우선, 다음이 품질력 향상, 마지막이 안전제일이다.

 

- 최강호, 2014.2.「현장 근로자가 바라본 조선산업 고용구조의 문제점」

 

이러한 위험에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돼 있는 사람이 바로 조선소 하청 노동자들이다. 어느 현장 노동자의 증언처럼 조선소는 어딜 가나 생산제일주의 풍토가 만연해 있었다. 원청은 공기를 빠듯하게 잡았고 하청업체는 어떻게든 빨리빨리 일감을 쳐내는 게 관건이었다. 물량을 다급히 쳐내기 위한 속도전이 횡행하니 안전보건관리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속도전의 가장 큰 희생양은 ‘하청의 재하청’ 물량팀 노동자였다. 2017년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이후 발족한 ‘조선업 중대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는 조선업 중대재해의 원인으로 다단계 재하도급 실태를 지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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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의 재하청 구조

 

다단계 재하도급은 비단 조선소만의 문제는 아니다. 건설 현장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반복, 재생산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소든 건설사든 원청이 불법적인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양산하는 이유는 똑같다. 저가 수주와 공기 단축이 관행처럼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특히 일감은 적은데 경쟁 상대는 많은 ‘보릿고개’ 시절에는 계약을 따내기 위해 낮은 가격을 써 내는 저가 수주가 조선업계에서 보편적이다. 원청 자본은 저가에 낙찰된 선박 건조(또는 해양플랜트) 프로젝트를 통해 이윤을 최대 한도로 뽑아내고자 한다. 기왕 싼값에 배를 만들기로 선주와 계약했으니, 여기서 (원청이) 손해를 입지 않으려면 공사기간을 단축해 비용을 줄이는 게 최선이 된다. 노동집약적인 조선산업 특성상 공사기간이 길어질수록 인건비도 그만큼 상승할 것이 뻔한 까닭이다. 이렇게 해서 저가 수주 관행은 공기 단축 압박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원청 입장에서는 공사기간을 단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를 짓는 데 드는 하루 당 인건비 총액을 아끼는 것 역시 손실을 막는 방안이다. 당연히 직영(정규직 노동자)보다는 하청이, 하청보다는 하청의 재하청을 사용하는 편이 비용 부담이 적을 것이다.

이 때 원청은 직영 인원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한편 하청업체와는 ‘단가 후려치기’(기성금 삭감)를 통해 도급계약을 맺는다. 하청업체는 등골이 휘지만, 그렇다고 갑의 횡포에 함부로 대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누군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닌데 하청업체 사장도 내심 억울할 것이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통상 일감 단위로 계약을 맺는 조선소 하청업체들은 원청에서 맡긴 일의 완성을 위해 본공(하청업체 상용직)과 물량팀을 저가에 부려먹으면서 공기 단축을 채근한다. 속도전에 동원되는 처지 면에서 하청 노동자들은 본공과 물량팀의 구분이 없다. 다만 물량팀은 이 속도전에 가장 ‘특화’된 기능 인력들이 선박 건조 작업의 7할 이상을 차지하는 취부, 용접, 그라인더(사상) 업무를 팀 안에서 나누어 맡아 주어진 공사기간 내에 할당 임무를 ‘처리’한다. 그래서 물량팀은 하청업체 본공보다 일을 완수하기까지 더 짧은 시간이 부여된다. 또한 상시 물량팀이 있는가 하면 돌발 업무만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이른바 ‘돌관팀’(돌격하여 관철한다는 뜻)도 있다. 물량팀의 사명 자체가 ‘빨리빨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질은 불법파견

 

조선소 물량팀 노동자는 재해 위험뿐만 아니라 상시적인 고용불안 속에 놓여 있다. 이들의 고용형태는 △팀원들이 팀장과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팀장이 개인사업자로 등록해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고 일감을 제공받는 경우, △별도의 근로계약이나 도급계약을 맺지 않고 하청업체 관리자의 작업 지시를 받는 경우(돌관팀은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등 다양하다. 외관상 계약형태가 어떻든 간에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 사실상 원청에서 수행해야 할 업무가 구두계약을 포함한 갖가지 이상한 방식의 계약을 거쳐 외주화된다. 그 과정에서 퇴직금, 4대보험, 연장ㆍ야간ㆍ휴일수당 등 법정가산수당의 권리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2015~16년 최악의 불황기가 도래했을 때 조선산업을 맨 밑에서 떠받치고 있던 물량팀은 가장 손쉬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다. 안 그래도 쪼개기 계약을 통해 조선소 이곳저곳을 떠돌며 일하던 물량팀 노동자들은 계약 해지를 통해 단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명백한 불법파견인 다단계 하도급의 양산 결과는 참혹했다. 구조조정 시기 고용불안과 임금삭감, 임금체불에 직면한 물량팀 노동자들은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많은 물량팀 노동자들이 플랜트나 건설 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지난 8월 금속노조 조선분과와 조선업종노조연대가 조사 발표한 자료(「조선산업 인력문제와 대안」)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현대미포조선, 삼호중공업, 삼성중공업, HSG성동조선해양, 한진중공업, STX조선 8개사에서 일하는 원ㆍ하청 노동자 수는 2019년 1월 10만1천여 명에서 2021년 5월 말 기준 9만7백여 명으로 줄어들어 10%가량의 감소세를 보였다.

올 들어 국내 빅3 조선소를 중심으로 선박 수주 실적이 좋아졌다고 한다. 한동안 침체했던 조선업계가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며 반색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물량 급증에도 인력난이 예상된다는 우려가 뒤따르고 있다. 호황기에는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며 위험천만한 작업환경을 무릅쓰고 일하던 물량팀 노동자들이었다. 불황을 이유로 이들은 배 만드는 현장에서 가장 먼저 퇴출됐다. 그 많은 배를 이제 누가 짓느냐고? 그 많던 조선소 하청 노동자, 물량팀 노동자들의 존재를 지운 건 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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