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305] 인권운동사랑방 30년, 기꺼이 엮인 우리의 시간 / 민선

by 철폐연대 posted May 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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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인권운동사랑방 30년, 기꺼이 엮인 우리의 시간

 

 

민선 •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철폐연대 회원

 

 

 

내가 속한 인권운동사랑방이 올해 30주년을 맞았다. 사랑방 30년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어디에서 어떻게 운동을 해 나가야 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자원활동으로 문을 두드리며 엮인 이곳에서 상임활동가로 함께한 지 15년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절반의 시간을 함께해 온 것인데, 여전히 사랑방을 어떤 단체라고 설명하는 게 참 어렵다.

 

사랑방을 소개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이야기의 시작은 90년대 사랑방이 만들어진 시기로 거슬러 가곤 했다. 국가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한 이들을 지원하고 구명하는 역할로만 인권운동이 여겨지던 때였다. “누군가를 돕는 ‘좋은 일’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세상을 바꾸는 운동, 특정한 자격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운동, 그런 ‘새로운’ 인권운동에 대한 포부를 갖고 1993년 사랑방이 만들어졌대요.” 그해 활동가의 연행 속보를 날리며 시작된 팩스 신문 <인권하루소식>을 시작으로 굵직하게 해 온 활동들을 짚는다. “유예된 존재였던 어린이 청소년의 권리를 제기하고, 시설에서 감옥으로 ‘갇힌 자들의 벗’을 꿈꾸고, IMF 이후 사회권 실태 보고서 작업을 계기로 ‘인간답게 살 권리’를 무너뜨리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폭력을 폭로하며 권리 침해 당사자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어 왔어요.” 그렇게 지난 사랑방의 궤적을 짚고 현재 사랑방에서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이야기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마음이 쪼그라들곤 했다. 또렷한 발자국을 남긴 것처럼 보이는 과거에 비해 지금 사랑방이 어떻게 나아가고 있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하기가 어려웠다.

 

2013년 20주년을 맞으며 사랑방은 ‘대중의 힘을 변혁적으로 조직하는 운동’의 방향을 세웠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사랑방만이 아니라 우리가 놓여 있는 한국 사회 그리고 사회운동의 조건과 변화를 함께 살폈다. 인권 투사, 인권변호사가 대통령이 되고, 국가인권위원회 설립과 함께 인권이 제도화되는 흐름 속에서 2003년 10주년을 맞은 사랑방은 “인권운동, 어디로 가야 하나” 질문하며 ‘진보적 인권운동’의 푯대를 세웠다. 20주년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와 어떻게 운동을 해 나가야 할지 질문을 품는 시간이었다. 불안정 노동이 보편적인 삶의 조건이 되고 각자도생의 세계를 정당화하는 말로 권리가 넘쳐 나는 시대를 마주하며,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언어로 인권의 자리를 지키고 확장해 가야 했다. 노동권이 노동하는 모든 이들의 보편적인 권리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 균열을 내길 바라며 공단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던 걸음은, 재난참사 피해자의 목소리와 행동 속에서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밝히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현재 사랑방은 이 체제를 유지해 가는 주요한 기제로 차별의 구조를 드러내며 차별에 맞서 함께 싸우고 평등한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을, 기후위기를 또 다른 이윤 창출의 기회로 삼고 있는 자본과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의 대응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최일선 당사자들이 주체로 선 기후정의운동을 함께 해 나가고 있다. 의제와 영역을 가로질러 모인 이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어 가며 분투하지만, 이 체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사랑방 안팎에서 만나는 동료들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보수 기득권 정치세력에 더 이상 우리의 삶과 미래를 내맡길 수 없다고 선언하며 시작된 ‘다른 세계로 길을 내는 활동가 모임’에 함께하면서 변혁적인 사회운동의 전망과 질서를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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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인권운동사랑방 30주년. [출처: 정택용]

 

 

그 시간 위에서 맞이한 인권운동사랑방 30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앞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걸음들을 어떻게 꿰어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기꺼이 엮다’라는 슬로건을 정했다. 이야기, 질문, 시대를 키워드로 정리한 30가지 장면은 사람과 사람, 운동과 운동의 엮음과 엮임이 이어진 시간이었다. 앞서 사랑방이 만들어진 시기, ‘새로운’ 인권운동을 구상하며 그렸던 그림은 독자적인 단체가 아니라 운동의 인프라를 구축하며 이를 더 많은 운동과 나누는 것이었다고 한다. 3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고 활동의 목록도 달라졌지만, 운동과 운동을 연결하고 관계를 조직하는 운동을 지금 사랑방은 해 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더 너르고 탄탄하게 만들어 가고 싶다.

 

그런 바람 속에서 지난 3월 31일 ‘기꺼이 엮인 우리’가 한데 모이는 자리를 가졌다. 서로 엮고 엮이며 함께 만들어 온 변화를 기억하며, 그리고 다시 엮이고 엮어 갈 시간 속에서 해방의 깃발을 함께 세워 가길 기대하며 준비한 자리에 너무도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셨다. 30년 동안 함께 이 길을 내어 온 이들을 향해 깊은 고마움을 담아 힘껏 준비했던 노래를 부르면서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참 단단하고 든든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지금은 비록 흐릿하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함께 서 있는 길 위에서 더욱 많은 이들의 발자국이 포개지고 또 포개진다면 어느 순간 선명하게 새겨진 발자취를 볼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다시 기꺼이 함께 엮이며 발맞춰 힘차게 걸음을 이어가 보려 한다.

 

*

 

<기꺼이 엮다 - 인권운동사랑방 30년> 홈페이지

지난 30년 사랑방이 엮어 온 시간, 사랑방과 기꺼이 엮인 동료/후원인의 이야기, ‘기꺼이 엮인 우리’가 한데 모인 후원의 밤 소식을 홈페이지에서 만나 보세요.

https://www.30th-sarangba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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