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404]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 517일간의 투쟁과 패배 / 김혜진

by 철폐연대 posted Apr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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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직 투쟁 돌아보기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 517일간의 투쟁과 패배

 

 

김혜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2001년 3월 29일 새벽,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 198명이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움직임으로 목동전화국에 진입한다. 그러나 곧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었고, 노동자들은 옥상까지 밀려 올라갔다. 사다리차로 옥상에 진입한 특공대에 의해 노동자들은 하나둘씩 끌려 나왔다. 이 투쟁의 결과로 6명이 구속되었고, 62명이 불구속기소 되었으며, 나머지 전원이 10일간의 구류를 선고받았다. 198명의 조합원이 흔들림 없이 전화국을 점거한 이 사건으로 한국통신계약직 투쟁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사회적 논의도 시작되었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이 이토록 절실하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조조정, 정규직 노조의 배제와 거부 

 

한국통신1)은 공공부문 구조조정 정책에 따라 대규모 구조조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화 가설과 선로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있는 계약직 노동자들도 구조조정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은 2000년 2월 ‘한국통신계약직협의회’를 결성하고 한국통신노조 가입을 위한 면담을 진행한다. 이때는 사업장단위의 복수노조가 인정되지 않았고, 한국통신노조는 계약직을 조합가입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계약직 노동자들이 독자노조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규직노조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희생자 구제기금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 사이 사측은 계약직 노동자들의 계약기간 만료 이후 1~3개월짜리 단기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고용불안이 계속되던 시기였으므로 구조조정에 대응하기 위해서 노조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은 2000년 3월 31일 한국통신계약직노조를 설립한다. 하지만 복수노조라는 이유로 노조설립신고필증을 받을 수 없었다. 계약직노조는 노조 합법화를 위해 한국통신노조의 규약을 개정하여 계약직 노동자들을 조합가입 범위에서 제외하도록 요구했다. 이 요구는 2000년 10월 11일 임시대의원대회에 와서야 받아들여졌고,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10월 14일에 합법적인 노조로 인정받는다.

 

노동조합은 구조조정 관련하여 사측과 교섭을 진행했지만, 사측은 교섭을 해태하고 노조 간부들을 징계해고하는 등 노조를 탄압했다. 그리고 2000년 12월 31일부터 계약직 노동자 7,000명을 해고하고 도급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조합원 700여 명은 쟁의조정을 거쳐 12월 13일부터 3일간의 파업에 돌입하고 상경투쟁을 진행했다. 한국통신 정규직노조도 구조조정에 대한 조합원의 불안감과 투쟁 의지에 밀려 12월 18일 파업에 돌입하고, 2만 명이 명동성당에 결집한다. 계약직노조는 이 파업에 연대파업을 결의하고, 12월 19일에 1박 2일 상경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정규직노조는 계약직 노동자들과의 공동투쟁을 거부했다. 결국 계약직노조는 명동성당에서 발길을 돌려 고려대학교로 농성 장소를 옮겨야 했다. 

 

투쟁의 결의, 목동전화국 점거농성 

 

계약직노조는 다시 대오를 추슬러 12월 27일부터 3차 상경투쟁에 돌입하고, 28일에 기습적으로 본사 점거투쟁을 진행한다. 그러나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끌려 나온 조합원들은 이날부터 본사 앞 노숙농성투쟁에 돌입한다. 조합원들은 침낭과 비닐 한 장에 의지해서 거리에 몸을 뉘었다. 혹한의 추위가 계속되자 조합원들의 토론을 통해 일단 노숙투쟁을 마무리하고, 2001년 1월 2일부터 4차 상경투쟁을 하기로 결정한다. 1월 2일부터 16박 17일의 상경투쟁을 하면서 1월 15일 한강대교 아치 고공농성을 진행하는 등 선도투쟁도 진행하였지만,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귀향했다. 노동자들은 결국 1월 30일 5차 무기한 상경투쟁을 결의하고, 본사 앞 노숙투쟁을 진행하게 된다.

 

이때는 대우자동차 투쟁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구조조정 저지투쟁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통신계약직의 투쟁도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이었지만 비정규직 투쟁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은 3월 초 전국순회투쟁을 통해서 내부 조직력 강화와 연대에 힘을 쏟았다. 조합원들은 광주의 캐리어노조와 이랜드 투쟁, 그리고 대우자동차 투쟁 등에 헌신적으로 연대했다. 조합원들이 함께 투쟁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공권력과 계속 부딪치면서 전투력을 높였고, 연대투쟁의 경험을 축적하면서 조합원들은 단련되었다. 투쟁의 전망을 조합원들이 함께 토론하면서 수위 높은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을 공유했다.

 

전화국 점거와 같은 수위 높은 투쟁을 소수가 아닌 다수가 결정하고 함께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한국통신계약직 조합원들은 그 일을 해냈다. 조합원들이 직접 점거투쟁을 결정했고, 2박 3일간 핸드폰도 지니지 않고, 카드도 쓰지 않고 보안을 지켰다. 그런데 이 투쟁을 성사시키는 데 보안이 중요했던 것만큼 연대를 조직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상급단체나 이 투쟁의 지원 단위인 공동투쟁위원회는 당사자들의 결의만큼 투쟁을 확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비정규직 투쟁의 의미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보안이 중요했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점거투쟁은 조합원들만의 고립된 투쟁이 되었다. 공공연맹과 공동투쟁위원회2)는 경찰서 항의방문, 선전전, 공공연맹 주최의 규탄집회를 기획했으나 이것 외에 더 확산된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큰 결의 속에서 수위 높은 투쟁을 결행했지만, 교섭이 진전되지 않았고, 조합원들 내부에는 조금씩 회의론도 고개를 들게 된다. 그리고 간부들의 구속과 사법처리로 노동조합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7. 본문사진.jpg

2001.02.15. “2001년 2월 15일 송파전화국 앞,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노숙농성을 벌이던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은 이날 오전에 각 전화국으로 나뉘어 집회를 하고, 오후에 다시 본사 앞에 모였다.” [출처: 노동자역사 한내]

 

 

114 분사 저지투쟁 

 

한국통신 사측은 계약직 노동자 7,000명을 정리해고한 이후 2차 구조조정에 돌입한다. 114 전화안내 업무를 분사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계약직에 이어 여성 정규직 노동자 4,000명이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다. 2001년 4월 14일 114안내협의회는 114분사저지투쟁위원회로 전환하여 투쟁태세를 갖추었으나 사측은 5월 3일 기습적으로 이사회를 열어 분사 계획을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정규직노조 이동걸 위원장이 쟁의발생결의를 무산시켰지만, 114 정규직 노동자들은 즉각적인 총파업투쟁을 조직하고 분당 본사 로비점거농성에 돌입한다. 쟁의발생결의 무산으로 무단결근 처리가 된 악조건 속에서도 114 정규직 노동자 500명은 한 달간 로비농성을 강고하게 이어갔다.

 

목동전화국 점거농성 이후 내부를 추스른 계약직노조는 5월 초부터 114 노동자들에게 공동투쟁을 제안하고 연대의사를 밝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헌신적인 연대를 지속하면서 114 조합원들과의 신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114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114 계약직 조직화를 위해 전국거점투쟁에 돌입한다. 114 계약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투쟁의 힘이 상승했다. 그런데 직무대행을 임명하고 사퇴했던 정규직노조의 이동걸 위원장이 5월 31일 복귀를 선언한 후 농성해산 명령을 내리고, 정규직노조 지부장에 부서장까지 500여 명이 구사대로 돌변하여 분당 본사 파업대오를 강제해산한다. 이에 114 파업대오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여성조합원들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는 가운데 6월 3일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114분사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졌다. 114 분사저지투쟁의 정당성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6월 9일 이동걸 위원장은 114 정규직과의 합의 없이 분사에 직권조인을 한다. 이후 정규직노조는 김임규 비대위 체계가 되었고, 투쟁은 이어져서 6월 11일 “114 분사철회를 위한 한통노동자 총단결 총투쟁 결의대회”가 성사된다. 114 계약직 230여 명을 조직하여 파업에 결합시킨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의 성과였고, 매우 감동적인 첫 공동투쟁이었다. 그러나 김임규 비대위는 6월 16일 회사와의 협상자리에서 이전 직권조인안과 별 차이 없는 합의안에 도장을 찍고 114 투쟁을 일방적으로 마무리하였다. 구조조정 저지투쟁을 위해 공동투쟁을 만들어 갔던 계약직노조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2차 투쟁 준비와 무산, 그리고 노조의 깃발을 내리기까지 

 

114 분사저지투쟁 이후 조직이 이완된 가운데 노조는 다시 조직을 추스르고 투쟁에 나서기 위해 불성실한 경총과의 4차 교섭을 결렬시키고, 7월 25일 다시 투쟁을 선포한다. 비정규직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을 결의하고, 의원회관 옥상농성 등 단계적 선도투쟁을 배치하면서 9월 2일 2차 점거투쟁을 준비했으나, 9·11테러로 인해 부득이 투쟁을 연기했다. 다시 10월 31일 국회 본회의장 기습농성 등 단계적으로 투쟁을 끌어 올리며 11월 11일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인 10일을 점거일로 상정하고 준비태세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공동투쟁위원회도 투쟁을 전국화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간담회를 조직했고, 1,000인 실천단을 폭넓게 구성하여 연대를 확산하게 된다.

 

그런데 점거를 실행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30여 명의 진입조 조합원들과 지원을 준비하고 있던 연대단위는 2차 점거 직전 계획 유보를 통보받았다. 사측이 교섭 의지를 밝혔다는 이유에서였다. 노조 내부에서는 더 이상 조합원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피해최소화 논리가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노조는 11월 13일 총회를 열어 교섭안에 ‘종업원지주회사’ 안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회사는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노조는 이 교섭안을 철회하고 다시 수위 높은 투쟁을 결의했다. 하지만 이미 노조는 ‘정규직화 쟁취’라는 자기 목표가 무너진 상황이었고, 이후에는 도급을 수용하자는 입장, 돈을 받고 정리하자는 입장도 공공연하게 제출되었다.

 

해가 넘어가도 교섭은 시간만 끄는 양상이었다. 이에 2002년 4월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점거투쟁을 다시 결의한다. 그리고 4월 8일 점거를 위한 산개투쟁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때의 점거투쟁은 사실상 교섭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측에서 약간의 반응만 보여도 점거투쟁은 계속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4월 8일 투쟁은 12일로, 15일로, 다시 18일로, 27일로 연기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지쳐 갔고, 방치되거나 무기력했다. 교섭의 주도력도 놓쳐 버렸고 결국 도급화라는 회사의 안을 수용한다. 투쟁을 지속할 힘을 소진한 계약직노조는 2002년 5월 12일, 총회를 열어 “조합원들에게 도급업체 취업을 알선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년 동안 고용을 보장하도록 노력하는 대신, 노조는 자진 해산한다”는 내용의 노사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노조는 깃발을 내렸고 투쟁은 종료되었다.

 

한국통신계약직 투쟁의 의미와 한계 

 

한국통신계약직노조 517일의 투쟁 동안 노동자들은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정부의 중요시설인 목동전화국을 점거했고,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 농성을 했으며, 맹추위 속에서 본사 앞 노숙농성을 했고, 국회 본회의장 2층에서 뛰어내려 한국통신 계약직 문제해결을 외쳤다. 그리고 대우자동차투쟁 등 여러 투쟁에 헌신적으로 연대해 왔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수위의 투쟁, 연대투쟁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이 과정을 조합원들이 함께 논의하고 결정해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합원들이 민주적으로 토론하고 결정했기 때문에 점거농성이라는 높은 수위의 투쟁을 대중투쟁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든 투쟁을 했으면서도 이 투쟁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형성되지 못하면서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만의 고립된 투쟁이 되었고, 이후 교섭 과정에서 지치고 힘들어지면서 ‘더 이상 조합원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피해최소론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민주성은 퇴색되었다. 점거투쟁도 조합원 전체의 결의 대신 선도투로 전환했고, 그러면서 조합원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전술, 조합원과 충분히 상의하지 않는 기획들이 생겨났다. 조합원들이 대상화되면서 함께 싸우고 함께 결정하는 기풍은 퇴색되었다. ‘조합원을 위해서’라는 결정이 때로는 조합원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을 한국통신의 긴 투쟁이 보여 주었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에 맞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을 하고자 했다. 2000년 12월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때 함께 연대하기 위해 파업을 조직하여 명동성당에 달려갔다. 하지만 거부당했다. 2001년 114 분사저지투쟁에도 114 계약직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파업에 동참했고 공동투쟁을 구축했다. 그러나 정규직노조는 한국통신계약직노조를 배제한 채 114 분사와 관련한 일방적 합의를 했다.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에게 큰 두려움을 안긴다. 그러다 보니 고용의 안전판을 찾게 되고, 가장 열악한 노동자들부터 희생시키게 된다. 이런 방식의 구조조정 대응은 결국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적 힘을 무너뜨리게 된다.

 

한국통신은 민영화를 위해 단계적 구조조정을 했다. 우선 계약직 7,000명을 정리해고한 후 도급으로 전환했고, 그 이후 114 여성노동자 4,000명을 분사했다. 그리고 민영화로 나아갔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싸워야 했지만, 정규직노조는 공동투쟁을 거부하고 비정규직이나 여성노동자를 구조조정의 안전판으로 삼았다. 그 결과 노조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영화의 제목은 <이중의 적>이다. 한국통신이라는 사측과만 싸운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구조조정의 안전판으로 삼고자 하는 정규직 노조와도 싸워야 했다.

 

지금 구조조정은 일상화되어 있다. 더 이상 집단적인 노동자들의 힘을 기억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을 자신과 다른 집단으로 상정하고 그들을 안전판으로 삼기 원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공공부문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반대하고, 그런 반대 행동을 민주노조운동이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 오히려 조합원들의 요구라는 이유로 그런 행위를 수용하기도 한다. 결국 그것은 노조의 힘을 무너뜨리고 조합원들은 회사의 눈치를 보며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몰두하게 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투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던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시 되새겨야 하는 이유이다.

 

그 당시 민주노조운동은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잘 몰랐다. 비정규직은 매우 낯선 단어였고 비정규직의 투쟁도 낯선 투쟁이었다. 많은 이들이 대우자동차 투쟁에 집중하고 그곳이 ‘구조조정에 맞서 싸우는 전선’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7,000명이 정리해고된 한국통신계약직의 투쟁은 개별 사업장의 투쟁이라고 치부했었다. 모두가 ‘비정규직 문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지금, 과연 비정규직 투쟁에 민주노조운동이 힘을 다하고 함께 연대하고 있는가. 여전히 개별 사업장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지 않은가. 플랫폼, 프리랜서 등 새롭게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불안정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여전히 낯설어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비정규직 투쟁은 무수한 말의 성찬과 다르게 여전히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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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1년 체신부에서 분리하여 공공기관이 된 한국통신은 2001년 12월 KT로 회사명을 변경하였고, 2002년 정부 소유 지분이 전량 매각되면서 민영화되었다.

2) “비정규직 철폐와 한국통신계약직 노조 투쟁승리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는 3월 14일 출범하였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비정규직 투쟁임에 착목하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하는 온전한 구조조정 저지전선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에 맞서는 독자적인 사업을 기획하지 못하고 한국통신계약직 노조의 투쟁 지원에 머무르게 된다. 특히 이 시기 대다수 노동운동단체들이 대우자동차 투쟁을 지원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던 시기라서 한국통신계약직 공투위는 참여단체도 많지 않았고 그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