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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운동을 생각한다

 

인권운동의 눈으로 본 정규직화 투쟁의 의미와 한계

랄라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정당한 권리 vs 무임승차,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까?”

 

잘 만들어진 노동이란 궁극적으로는 자본이 요구하는 스펙을 갖춘 노동, 나아가 그 스펙을 갖춘 과정에서 자본에 쉽게 길들여질 준비가 된 노동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점점 변화해 간다(『일하기 전에 몰랐던 것들』 류동민. 웅진 지식하우스. 2013.).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잘 만들어진 ‘노동’자가 되기 위한 노력은 오늘도 끊임없다. 잘 만들어진 ‘노동’자가 되어야만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그야말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노오력’하면 능력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차등대우를 해준다는 능력주의,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란 ‘공정함’의 신화는 이것보다 더 공정한 경우가 어디 있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서로의 출발점이 다르거나, 혹은 출발선이 만들어진 조건에 대해서 탓하지 않는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배제된 채 모든 문제는 ‘노오력’하지 않는 개인의 문제로 돌아온다.

 

“처음부터 정규직을 뽑는다고 공지하고 뽑았어야 공정한 경쟁 아닐까요? 계약직으로 들어와서 로비와 투쟁으로 무기계약직 되고 이제 정규직을 요구하는 건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기회의 불평등이라 생각됩니다. 첨부터 정규직으로 뽑았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도전했을 겁니다.”

교육공무직법 관련 네이버 지식in 답변 중.

 

사람들은 비정규직을 착취하고 차별하는 현재의 구조를 평등과 공정이라고 여기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투쟁을 불편하게 바라본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무수한 관문을 통과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사람들이 볼 때 ‘공정하지’ 않고, ‘내가 들어갈 자리를 빼앗긴다’ 여기기 때문이다. 더 많은 기회를 열어놓고, 안전망이 되어줘야 할 사회의 문제로 시선을 돌리기보다는 노력하지 않고 무임승차하려는 ‘억지 부리고, 떼쓰는 사람’ 탓으로 돌린다. 취업하기 어려운 사회, 사회안전망이 취약해 취업 후에는 떠나기도 더더욱 어려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은 자본이 길들이기도 전에 스스로 길들여져 버린, 잘 만들어진 ‘노동’자를 만들어냈다.

 

비정규직 투쟁 20년이라 한다. 세월이 무색하게 비정규직 차별은 더욱 공고해지고, 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걸음은 여전히 더디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전환 요구에 정정당당하지 못한 도둑놈 심보라 이야기하는 손가락질은 더욱 거세졌다. 노동자와 노동자의 갈등, 차별이 익숙해져버린 사회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 문제는 어떤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까?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 요구 VS 무임승차’라는 프레임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앞으로 새로운 20년, 비정규직 운동의 새로운 프레임을 짜야 할 시기는 아닐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오래된 갈등, 새로운 유행 - 노동자는 하나인가?

 

정규직 노조 노동자들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들과 같은 노조에 가입하고자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일 것이다. 기아차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얼마 전엔 자동차판매연대가 금속노조에 가입하려는 시도가 저지되기도 했다. 다수의 노동자들이 연대하지 않는 노조는 노조가 아니라고 소리를 높였으나, 현대기아차 정규직 판매 노조원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그들이 위협했다고 맞섰다. 연대를 숙명으로 하는 노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더 이상 노조이길 거부하고 스스로를 한줌의 이익집단으로 전락시키며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구덩이를 팠다(“‘귀족노조’ 조롱, 새로운 노동운동 위한 주문” 목수정. 레디앙. 2018.3.19.).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명제는 오래 전 ‘노동자는 하나일까?’라는 질문으로 옷을 바꿔 입고, 노노갈등이란 해묵은 이야기들은 복고풍처럼 매년 새로운 유행으로 다시 돌아온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전환에 보호자처럼 나서거나, 1사 1노조에서 비정규직을 쫓아내고, 비정규직을 해고의 방패 삼는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사례는 너무 익숙하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 대한 왜곡과 모욕, 비방 등 차별의 가해자가 정규직인 경우도 허다하다. ‘노동자 VS 노동자’라는 대결구도는 자본과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기에 아주 효과적이다. 정부와 자본에 책임을 묻기도 전에 교섭 주체를 놓고 갈등해서 힘 빠지게 하거나, 정규직의 방패막이로 비정규직을 앞장세우고, 정규직 전환에 대한 온갖 왜곡과 비방 들을 선전하는 등 노동자 스스로 권리를 후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규직 VS 비정규직의 대립뿐 아니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취업 노동자 VS 미취업 노동자의 대립 역시도 마찬가지다. 공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정규직 전환에 무임승차하려는 이들이 미취업 노동자들 입장에서 얼마나 문제적이라 느낄까? 우리가 책임을 요구해야 할 것은 정부와 자본이어야 하는데, 서로를 탓하고 책임을 묻기에만 급급해졌다.

 

언젠가부터 노동자 집단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동자 개인적으로 움직이도록 노동의 정책들이 변화하고 있다.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노동 존중도 개별 노동자의 권리 신장을 주요하게 여기며 집단적 권리로서 노동존중을 호명하지 않는다. 물론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유효하나, 집단의 권리가 배제된 채 개별 노동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노동자를 개인화하고 파편화시키는 하나의 전략일 뿐이다. 노동자들을 개인화․파편화시키는 전략을 통해 노동자 VS 노동자의 갈등이 더욱 증폭되고 있고, 민주적이라 자부하는 노동조합 역시도 비껴나가지 못했다. 연대와 민주주의가 골간이 되어야 하는 노동조합의 역할이 부차적으로 밀려나고, 같은 노동자들에게 행해지던 정규직 노동자의 폭력과 차별에 단호하지 못했던 민주노총의 탓도 크다. 대공장 눈치보기, 반성과 토론이 사라진 문화, 변화 없는 오랜 관습들이 동료노동자로서, 동료시민으로서 나누어야 할 최소한의 존중을 무너뜨리고 있다. 먹고살기 힘든 시대, 고용형태가 신분이 되고, 신분에서 파생된 권력이 단결과 연대를 가로막는 이 시대. 물론 시대의 탓도 있겠지만 노동운동의 내부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민주주의와 평등을 기반으로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재구성하기 위한 진부하지만 늘 현재진행형인 고민들을 멈추지 말았으면 한다.

 

 

비정규직 철폐! 권리의 운동으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필라델피아 선언의 으뜸 원칙이다. 인간을 존엄하게 대한다는 게 한마디로 뭐겠는가? 사람을 사물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인력’이 아니라 ‘인간’으로, 노동력의 거래를 다른 물건처럼 ‘사고 파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는 ‘인력’으로서 ‘경제적 보상’만 받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다([인권문헌읽기] 국제노동기구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1944). 류은숙. <인권오름>. 2016.12.7.).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는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닐까? 72년 전 필라델피아 선언의 원칙은 여전히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먹고살기 어려워진 시대에 노동자는 스스로 상품이 되어버렸다. 좀 더 좋은 상품이 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다. 권리를 요구하기보다는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고,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이 정도쯤은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노동에 대한 인식 속에서 권리를 요구하는 것,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더라도 해결 방법을 찾기 쉽지 않다. 이것이 무슨 권리의 침해인지, 어떤 노동법 위반인지,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언어는 빈약하고 법은 너무 멀다. 직장 갑질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가장 손쉬운 말로 등장했다. 갑질은 언어에서 극명히 드러나는 적대적 문제의식 하에서 갑질을 행하는 가해자의 가혹한 행위와 피해를 받는 을의 고통, 을에 대한 사회적 공감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을은 피해자로서 위치하지만 노동자로서 호명하지는 않는다. 자본과 노동의 오래된 구조적 모순과 노동권으로 상황을 재정의할 수 없는 틈 속에서 노동자는 사라진 채 을만이 남았다.

 

한국 사회는 오랜 기간 지속된 노동을 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노동의 권리를 설명하는 언어는 빈약하고, 노동운동은 문화적 힘(정부의 정책을 상대하고 이야기할 힘과 노동자들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힘은 다른 차원이라 생각된다.)을 갖지 못했다. 노동의 관점에서 자신의 상황을 정의 내릴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노동자라는 한 인간을 다양한 삶의 각도에서 조명하고, 그것을 노동운동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모두가 노동을 하지만 노동자라 호명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석과 그에 따른 대안 마련이 시급한 것은 아닐까. 노동자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박탈감, 모멸감, 자존감 훼손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 나가보면 어떨까. You Only Live Once, ‘욜로’(‘인생은 한 번뿐이다’를 뜻하는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를 말한다.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욜로족은 내 집 마련, 노후 준비보다 지금 당장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취미생활, 자기계발 등에 돈을 아낌없이 쓴다. 이들의 소비는 단순히 물욕을 채우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충동구매와 구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라는 문화적 흐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욜로족이라 일컫는 이들도 노동자일 텐데 말이다. 물론 트렌드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 노동자들이 주목하고, 고민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운동의 방향을 바꿔 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 막바지에,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찾는 노동조합이 아니라 내 삶, 권리를 위한 당연한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비정규직 철폐하고 정규직화 쟁취하자!” 이 구호를 함께 외쳤던 수많은 동지들은 어디 갔을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정규직이 되어 어떻게 살고 있을까? 비정규직 투쟁의 목적은 정규직으로의 전환만이 아니라 좀 더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 전환이 되더라도 투쟁의 주체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함께 외쳐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비정규직 철폐하고 정규직화 쟁취하자!”는 삶을 바꾸자는 구호가 아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신분을 바꾸자는 의미였을까? 일터에서 비정규직을 없앤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는 더 자르기 쉬운 일용직과 계약직들이 채워지고, 고용형태만 변경되었을 뿐 차별은 여전히 그대로인 새로운 직종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철폐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오랜 구호에 담긴 뜻을 재정의하고, 새로운 고민들을 채워 넣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슬픔 같은 건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한 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참여한 한 노동자의 발언이다.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달라지지 않았다. 부정부패한 거대권력을 끌어내렸던 유의미한 싸움이, 일상의 민주주의까지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정함의 역습이 사회를 지배하고, 공정해야만 자격을 부여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권력을 끌어내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모두의 평등과 연대를 위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직종이 늘어나고, 사용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늘어난 직종만큼 착취의 방법은 다양해지고, 노동자로 살아가기는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일상에서의 고통을 하소연할 수 없는 이들이 직장갑질119를 통해 억울함을 토해내고 있다. 현재 처지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단한 오늘 하루를 버텨낼 공감의 힘을 만나고 싶은 기대도 있을 것이다. 지금 시대에 필요한 노동운동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 지친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곳, 공감과 격려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그것이 직장갑질119여도 좋고, 노동조합이어도 좋다. 내가 겪은 오늘의 일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존중받지 못한 현실이 문제라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소통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말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노동의 문제로 정의하는 힘을 가질 때, 권리 침해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정규직, 비정규직 등 고용형태로 노동자를 나누고, 장애인․이주노동자․여성․청소년 등 정체성으로 노동자를 나눈다. 하지만 다양한 고용형태와 각기 다른 정체성은 다름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차별의 대상이 되기 쉽다. 자본에 의한 절묘한 통제방식으로 자리잡아버린 차별의 공식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용형태와 정체성은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노동자로서 나의 위치에서 느끼고 있는 불합리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서로의 맞닿아 있는 부분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부차적으로 취급되는 청소년의 노동권과 현장실습생의 권리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성소수자의 노동권과 장애인의 노동권 역시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듯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과 권리 들을 연결하다보면 연대의 촘촘한 그물망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개별화․파편화시키는 자본에 맞서 우리의 연결 지점을 찾아내는 일. 서로를 연결하고 노동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인권운동도 함께 고민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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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1.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 되돌아보기” 워크숍 현장 [출처: 철폐연대]

 

[편집자부] 이 글은 2018년 10월 31일 진행된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워크숍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 되돌아보기”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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