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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바닥 일기

 

 

돌봄과 인권을 생각하며

 

 

류은숙 •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돌봄’을 공부하게 된 것은?

 

위기는 ‘무지’를 깨뜨려 준다. 내가 말하는 ‘무지’란 당연히 알고 행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문제 삼지도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내가 뭐하러 그런 것까지 알아야 돼?’란 무지의 태도가 뭉쳐질 때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이 운이 되고 각자 알아서 해야 할 일이 돼 버린다.

 

코로나19로 불거진 돌봄 위기는 우선 나의 무지를 깨닫게 했다. 인권활동가들이 여기저기 위기 현장에 대응하느라 분주했고, 나 또한 그 다급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숨차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주 많이 자주 끄집어낸 말이 ‘돌봄’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돌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게 위기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위 ‘K-장녀’로 불리는 삶을 50년 이상 살아 온 내게 각종 돌봄은 몸으로 체감되는 것이었다. 그게 얼마나 독박이고 생채기를 내고 소진을 부르는지 잘 알기에, 안 할 수 있으면 되도록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개인적이고 성별분업적이고 피하고 싶은 것으로만 돌봄을 생각해 왔던 것이 나의 첫 번째 무지였다.

 

위기의 한편에서는 ‘전환’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졌다. ‘돌봄사회로의 전환’은 그중 대표적인 것이다. 돌봄에 대해 ‘벗어나고파’에만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돌봄 사회에 대한 상상이 가능할 리 없었다. 상상이 불가능한 상태, 그것이 두 번째 무지였다.

 

여기저기서 돌봄 위기에 대응한다는 각종 구호들이 경쟁을 벌이고 이런저런 정책들이 쏟아졌다. 실제 체감과는 상관없이 말로는 돌봄 시대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요란함은 하던 대로의 틀 안에서 A라는 정책과 B라는 정책이 다투는 것이지, 틀 자체를 갖고 분투하는 사람들의 소리는 ‘비현실적’이라고 내치는 것 같았다. 돌봄을 여성화하고 시장화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홀대하는 등 하던 대로의 틀 안에서 돌봄 위기는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 틀을 깨고 나가자는 사람들이 도리어 허황되다고 공격받는 상황에서 ‘틀을 깨자는 사람들과 나도 같은 생각이오’라고 보탤 만한 개념과 실천이 없다는 것이 세 번째 무지였다.

 

돌봄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이런 무지를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물론 혼자가 아니었고 비슷한 위기의식을 가진 동료들이 그 긴급성을 인정하고 함께해서였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기존의 것을 깨는 과정이 필요하다. 돌봄을 공부하면서 내가 익숙하게 여기던 인권의 통념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을 주체로 내세운 권리를 넘어서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전제로 한 존재들 간의 관계로서의 권리를, 국가권력에 의해 매개되면서 ‘관리’와 ‘통치’로 변하는 것이 아닌 국가의 책임성을 제대로 묻는 권리를 찾고자 했다.

 

관심을 갖게 되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된다.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숱한 돌봄시설의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됐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내 사무실 근처에는 얼마 전 요양병원이 들어섰다. 그 병원 자리에는 수십 년 전 입시 단과학원이 있었다. 한 교실에 150여 명의 수강생을 받았고, 건물 한 층에 화장실이 한 칸뿐이고 등받이가 없는 나무 걸상이 전부였지만 수강생들이 넘쳐났다. 그런 학원 건물이 몇 차례의 변신을 거쳐 요양병원으로 착지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저출생 고령화의 현상이다. 그런데 흔한 사회적 인식은 ‘학원’은 미래를 위한 투자로, ‘요양병원’은 손실로 생각하는 것이다. 같은 돌봄 내에서도 아동을 돌보느냐 노년을 돌보느냐 또는 장애인을 돌보느냐에 따라 그 위상과 대응이 다르다. 국가에 의해 매개된 기존의 돌봄은 ‘돌 볼 가치가 있다/없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냐’, 소위 ‘정상과 규범에 맞는 몸이냐 아니냐’, ‘의존성과 자율성은 대립한다’ 등 철저한 이분법을 안고 있다. ‘안타까우니까 돌봐야지’라고 할 때, 그 돌봄은 이미 그런 이분법을 전제한 틀에서 출발한다. 개별적인 헌신과 상관없이 그 틀 속에서의 돌봄은 부차적이고, 시혜와 동정 또는 낙인, 무기력, 자율성이나 권리와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 사회적으로 함께하는 돌봄의 출발은 그런 이분법을 질문하고 그 틀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런 이분법에서는 틀을 바꿀 생각 없이 A가 낫냐 B가 낫냐는 식의 고만고만한 정책 비교뿐이고, 구멍(사각지대)이 지적될 때마다 대충 보완하는 정책들이 남발되는 식이다. 그 수혜자가 되려면 엄격한 자격 심사를 거쳐야 한다.

 

돌봄의 틀을 바꾸는 게 근본적인 필요이다. 이때 토대가 되는 것이 인류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다. 인간은 과연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인가? 모든 사람은 취약하지 않은가? 누구나 취약성으로 연결된 존재이기에 의존하지 않는가? 의존의 비대칭성은 있어도 의존에서 예외인 존재는 없다. 보편적이기에 의존은 일방이 아닌 상호의존일 수밖에 없다.

 


3. 본문사진.jpg

김영옥·류은숙의 책 『돌봄과 인권 - 돌봄으로 새로 쓴 인권의 문법』 표지.

 

 

왜 ‘돌봄과 인권’인가?

 

3년여 연구 활동의 결과로 나온 책의 제목이 『돌봄과 인권』이다. 왜 직접적으로 ‘돌봄권’이라 하지 않고 ‘돌봄과 인권’이라 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어떤 돌봄인지, 어떤 권리인지를 따져 보지 않은 채 돌봄권으로 건너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성차별적이고 상품화된 돌봄, 필수적 가치가 아닌 부차적인 취급을 받는 돌봄을 문제 삼지 않은 채 ‘권’을 붙일 수는 없다. 또한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으로서의 주체, 그런 개인들 간의 계약으로 보는 권리관을 그대로 둔 채 돌봄권이라 한다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내 돈 내고 내가 사는 상품을 둘러싼 판단거리가 된다. 그런 상품을 구매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시혜와 위기관리와 통제로서 찔끔 제공되는 돌봄과 권리는 연결될 수가 없다. 돌봄과 인권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사유하자는 것, 나아가 기존의 돌봄을 인권으로, 기존의 권리를 돌봄으로 재구성해 보자는 것이다. 돌봄과 인권에서 중요한 것은 ‘과’이다. 둘을 연결할 때 어떻게 연결하느냐, 실마리를 무엇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을 근간으로 삼았다. 취약성의 개념은 아주 부정적으로 사용돼 왔다. 취약성의 부정적 사용은 한마디로 ‘평등한 권리의 주체에서 배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억압과 통제의 구실로 삼는 세력만이 아니라 좀 더 나은 복지 또는 권리를 요구하는 쪽에서도 취약성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임시변통으로 사용되거나 자율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된 측면이 적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취약하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삶이 불가능하다. 이런 보편적인 취약성에 대응하고자 인간은 각종 사회제도를 만들어 왔다. 그런데 그런 제도가 또 취약성을 만들어 낸다. 성·인종·계급·장애 등을 더 특수하게 취약하게 만들고 억압적으로 관리한다. 취약성에 대한 정부의 무책임은 정치적으로 정당화되곤 한다. 소위 ‘보통’(취약하지 않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무관심 내지 암묵적 동의로 억압적 통치를 뒷받침한다. 특정 취약성에 대한 억압적 통치를 ‘남 일’, 또는 ‘안타까운’ 사연으로 소모하면서 ‘무임승차자’, ‘도덕적 해이’라는 틀로 심판하려 하기 때문에 특정 취약성에 대한 정부의 차별적 통치는 오히려 정당성을 확보한다. 취약성으로 분류된 개인이나 집단은 권리가 아닌 시혜의 대상이고 노골적인 차별이 동반된다. 그 과정에서 병리화되거나 낙인이 찍히고 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 도구가 된다. 엄격한 자격 기준은 특수 취약층이 제도적 우산 아래 들어가기 어렵게 만들고 사각지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지지부진한 땜질 정책을 남발하게 한다.

 

반면 취약성을 달리 이해한다면, 다른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취약성을 보편적인 토대(누구나 취약하다)로 삼고 접근하면 모든 사람을 연결하는 연대의 가능성이 있다. 누구나 연결된 존재로 사유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고 그런 일이 저절로 되는 건 아니다. 취약성에 대한 반응은 잔인하고 모욕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정치적 접근과 연결돼야만 가능한 일이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돌봄에 대한 집단적·사회적 책임을 사회적 제도와 실천에 새겨 넣는 것이고 이를 위해 사회구성원들이 돌봄 문제를 해결해 가는 방법을 가리킨다. 더 좋은 돌봄 사회를 위해 사회구성원들이 권리와 책임을 만들어 나가는 일련의 행위들이 정치적인 것이다. 인권 개념과 인권 운동은 돌봄을 정치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취약성을 어떤 식으로 가시화하고 어떻게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공적의제로 삼게 만드느냐, 돌봄의존에 대한 낙인과 돌봄의 시장화에 저항하면서, 또한 개인 탓, 개인 책임 문화에 저항하면서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관계에 맞서는 언어로서 취약성을 어떻게 사유하고 실천하느냐가 과제이다.

 

“돌봄은 영역별로 분리해서 고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영역과 활동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얽혀 있는 총체적인 묶음이요 다발”이라는 것이 공저자인 김영옥 선생님의 말이다. 서로의 위치와 역할은 다르지만, 공통의 지평으로 연결을 도모하는 것이 개별적이자 집단으로서의 돌봄에 대한 무지를 깨치고 돌봄 사회를 상상할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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