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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서 지역에서 철폐연대 동지들은

 

파업으로 바뀐 인생, 사랑하는 철도노조를 떠나며

이철의 (정년을 맞은 철도노조 조합원, 철폐연대 회원)

 

 

나는 2019년 연말로 정년을 맞았다. 1977년 12월, 고등학교 3학년 때 철도에 들어왔으니 햇수로 43년을 철도 노동자로 살아왔다. 그동안 손에 꼽기 힘들 만큼 여러 번 파업을 겪었다. 때로는 조합원으로, 때로는 간부로, 그리고 어떤 때는 주동자가 되어 파업의 책임을 져야 했다. 파업을 하며 받은 징계를 말하자면 감봉부터 정직, 해고까지 종류별로 다 있다. 가장 무거운 징계인 해고를 세 번 겪었다. 한 번은 10년 동안 해고자로 있었고 두 번은 노동위원회나 재판을 통해 복직을 하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노병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파업을 했다. 올림픽을 50여 일 앞둔 1988년 7월 26일의 일이었다. 한겨울이면 물통에 살얼음이 얼고 한여름이면 40도를 넘어가는 기관차에서 기관사들은 소처럼 일했다. 기관사들뿐 아니라 차량정비, 선로정비, 역무원, 여객전무나 차장, 전기원 등 모든 철도 노동자들이 한 달 300시간에 육박하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한심한 노동조건에 시달렸다. 그 중에 소통이 가장 잘되는 기관사들이 먼저 들고 일어선 것이다. 기관사들은 숙소에서 서로 만나고 중간역에서 승무교대를 한다. 기관차에 있는 무전기는 동료를 격려하거나 파업 명령을 전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때 우리 노조는 완전히 어용노조로 철도청장이 그랜저를 타면 위원장도 그랜저를 탔다. 위원장실 넓이와 철도청장실 넓이가 같아야 노사대등이라고 하였다. 어용노조의 행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생략하기로 하자.

 

조합이 정부와 철도청 편이므로 평조합원이던 기관사들이 스스로 지도부를 만들어 파업했는데 나는 이때부터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1차 지도부는 3일간 농성 끝에 사퇴하고 2차 지도부는 파업을 선언한 뒤 무너졌다. 3차 지도부를 구성했는데 나서는 이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대변인을 맡았다. 대변인으로 활동한 지 겨우 여섯 시간, 토론회 두 번, 기자회견 한 번, 진상조사차 온 국회의원 면담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진압이 들어와 경찰에 잡혀갔다. 그때 헬멧을 쓰고 청카바를 입었던 백골단 경찰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모두 눈물만 흘렸다. 평조합원들은 훈방이 되고 나는 입건되어 이틀을 더 잡혀 있었다. 그때 백일이 지난 큰아이를 업고 아내가 면회를 왔다. “보아하니 신혼이구만, 애하고 부인을 생각해서라도 얌전히 살아야지.” 조사한 경찰이 좋은 말로 달랬지만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어용노조 놈들, 두고 봐라. 너희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들은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철도는 넓고 활동할 사람은 적었다. 자연히 가정은 뒷전이 되었고 노동조합을 민주화하는 게 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이발하는 것도 귀찮아 머리카락을 바싹 잘랐다. 민주노조를 쟁취하면 길러야지 했는데 습관이 되어 점점 짧게 자르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1989년 노조 총선거에서 기관사쪽 지부들에 파업 참여자들이 지부장으로 당선되었다. 그중 민주파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대여섯 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철도의 현장조직에 가입했다. 역무원들이 주축인 현장조직에 기관사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현장조직의 규약이 너무 강하고 규율이 강하였으므로 새로운 현장조직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기관사쪽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35명이 참여한 ‘민들레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기관사 외 전체 직종을 아우르는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건설을 둘러싸고 현장조직과 갈등이 생겼다. 현장조직쪽에서 기관사쪽만 조직대상으로 하라고 권한 것을 뿌리쳤기 때문이다. 나는 성격이 외골수인 데다 비타협적이어서 그대로 밀고 나갔다. 전위조직(당시에는 구성원들이 현장조직을 전위조직이라고 하였다.) 산하에 현장조직이 있는 게 당연한데 왜 반대하느냐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조직에서 징계를 받았지만 새로 만들어진 민들레회 활동에 집중하였다. 민들레회는 철도청과 어용집행부의 탄압과 회유로 어용화되는 기관사쪽 지부들을 갈아엎는 주축이 되었다. 그 전위조직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한편 대중조직으로는 민주파 지부를 중심으로 전국기관차지부협의회(약칭 전기협)를 건설하였다. 처음에는 지부협의회였으나 나중에 회원제 조직으로 바꿔서 사실상 제2노조 역할을 하였다. 조합원들은 철도노조 조합원이면서 전기협 회원이 된 것이다. 나는 전기협의 교선국장, 선전홍보국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과 선전을 책임지게 되었다. 수도권에 민주파 지부 10곳이 모여 서울민주지부협의회(서민협)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에서도 나는 교육과 선전을 맡게 되었다. 내가 속한 지부에도 소모임을 만들어 직장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했다. 그 소모임은 철도청에서 대부금을 주는데 뒷돈을 받는 관리자를 쫓아내기도 하였다. 유인물을 만들어 지방청에 주차된 차량마다 끼워놓았던 것이다. 누가 했는지 아직까지도 알려진 일이 없는데 공소시효가 한참 지났으므로 비로소 밝힌다. 내가 속한 지부와 전기협 및 서민협에서 실무를 맡고 현장조직에서 정책을 맡았다. 민들레회에서도 교육과 선전사업을 하고 지부 소모임, 천주교가족모임(가톨릭노동장년회)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해냈으니 젊고 건강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골초로 한참 때는 담배를 하루 세 갑도 피웠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고집이 세고 자기 확신이 강해서 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았다. 그런데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란 일이 있다.

 

1994년 파업에서 나는 주동자가 되었다. 철도는 여전히 한국노총에서도 손꼽히는 어용노조였는데 전노협 산하의 서울지하철, 그리고 갓 노조민주화에 성공한 부산지하철과 연대파업을 벌였다. 1988년 파업 때 아무것도 몰라서 연대 온 재야단체를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하지만 1994년에는 의식화가 다되어 “연대할 수 있는 곳하고 무조건 연대하라”는 결의를 할 수 있었다. 공동파업은 생각보다 위력이 컸다. 말 그대로 교통대란이어서 아내가 면회 오기 힘들 정도였다. 철도와 지하철이 함께 파업하니 지하철은 물론 도로까지 완전히 막혔던 것이다. 구속되어 있는 동안 전기협은 공중분해되고 주력 간부들은 모두 해고되었다. 64명이 해고되고 140여 명을 비연고지, 다른 직종으로 전출시키는 그야말로 발본색원의 탄압을 받았다.

내가 해고되자 아내는 문구점을 시작으로 미용기술을 배워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가장은 우유배달이나 트럭운전을 한다고 했지만 본심은 노조민주화 사업에 있었다. 집안에서 학원이나 고물상 운영 등을 권했지만 “복직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부친과 큰 갈등을 겪었다. 도중에 감옥을 또 한 번 갔다 왔더니 아내가 “도저히 이대로 살 수는 없다”고 하여 귀농을 결심한 일도 있었다. 현장이 시베리아 벌판처럼 얼어붙어 가망이 없어 보였다. 고향 부근인 충남 청양에 가서 농민회 분들을 만났는데 “젊은 노조간부가 오면 대환영이다. 땅은 얼마든지 빌릴 수 있으니 언제라도 내려오라”는 말씀이었다. 간단한 살림을 차에 싣고 떠나려는 순간 현장조직 선배 한 사람과 후배가 찾아왔다. “우리가 생계비를 모아 줄 테니 가지 마라. 당신이 가면 누가 활동하겠냐”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짐을 풀고 현장조직 사무실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현장조직인 노민추에서 60만 원씩 생계비를 받았다. 노민추는 1994년 파업 패배 뒤 결성한 조직으로 내가 의장을 맡고 있었다.

 

2001년, 후배들이 드디어 노동조합에 민주노조의 깃발을 세웠다. 직선제로 규약을 개정하는데 4명 구속과 해고자 10여 명, 비연고지 전출 수십 명을 내는 힘겨운 싸움이 필요했다. 동료들 위에 군림하던 노동건달 선배들을 싸그리 몰아내니 감개가 무량했다. 하지만 웬걸, 그때부터 철도노조는 끊임없는 투쟁과 파업으로 정부와 싸워야 했다. 철도를 민영화하거나 주요 사업을 외주화하려는 공격이 어느 정권하에서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2001년 철도․발전․가스노조의 연대파업, 2003년 민영화 저지파업, 2006년 임금 및 단체협약 쟁취파업, 2009년 단체협약 해지에 맞선 민주노조 사수파업, 2013년 수서발 고속철도 민영화 저지파업, 2016년 연봉제에 반대한 74일 파업, 그리고 2019년의 임금 인상 및 특별단체 협약 쟁취파업…….

 

 

2 2006년 미조직 및 비정규직 특별위원회 대표 시절 [출처 필자].jpg

2006년 미조직 및 비정규직 특별위원회 대표 시절 [출처: 필자]

 

 

나는 2004년 해고된 지 10년 만에 복직이 되었다. 복직하자마자 서울지방본부 연대사업국장을 시작으로 노동조합의 실무 간부를 맡아 2016년까지 여러 보직을 역임했다. 그중 2006년 본부조합의 미조직 및 비정규직 특별위원회 대표를 맡아 기간제 노동자 정규직화와 KTX 승무원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활동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해고 기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내가 믿는 대로 행동하니 실망이나 후회할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KTX 승무원 280명이 정리해고되어 복직을 하지 못하니 중압감과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투쟁이 장기화되자 조합원들은 차례로 떠나갔고 나중에는 간부들도 하나씩 자리를 떴다. 결국 초기 간부 30여 명 중 끝까지 남은 이는 한 명뿐이었다. 나는 재판 끝에 복직하고 조합원인 KTX 승무원들은 해고상태로 있으니 자괴감으로 먹지 않던 술도 마시게 되었다. 정규직 노조에서는 지도부가 책임지고 구속되거나 해고를 당하면 되는데 비정규직 투쟁은 말 그대로 싹쓸이 해고를 당했던 것이다.

 

2008년 추석 무렵, KTX 승무원들이 서울역 철탑농성을 마지막으로 투쟁을 접었다. 자회사에 취업하라는 회사와 노동조합의 합의안을 거부했던 것이다. KTX 승무원 투쟁이 무너지자 나의 활동도 함께 무너졌다. 나는 노동조합과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KTX 승무원 투쟁을 지키지 못하고 해고상태로 버려두었다는 자괴감에 빠져 활동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몇 년간 혼자서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녔다. 평생 바쁘던 인간이 활동을 포기하자 시간이 남아돌았다. 등산과 걷기는 건강을 되찾아 주었고 탁구는 직장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늘었다.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 중국어를 시작했다가 중국 여행도 많이 다녀왔다.

 

2015년 대법원이 이해할 수 없는 판결로 재판을 뒤집자 KTX 승무원들은 노동조합으로 돌아왔다. 나도 후배 본부장에게 부탁하여 철도노조 서울본부 전임으로 복귀하였다. 몇 년간 방황 끝에 “운동이란 사람에게 연대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하자. 그리고 어려울 때 버티려면 가능한 여유 있고 즐겁게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쨌든 KTX 승무원들은 철도 노동조합의 지원과 지원대책위를 중심으로 한 사회․노동단체의 지원, 그리고 스스로의 투쟁으로 복직을 쟁취하였다. 2차까지 100여 명이 복직하고 3차 70여 명이 2019년 연말에 마지막으로 복직했다. 그사이 나는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년 무렵에 노동조합은 파업에 들어갔다. 철도노조와 후배들이 선배의 정년을 축하하기 위해 파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뿌듯했다. 후배들이 파업으로 송별회를 해주는구나. 고맙다 민주노조야, 이제 미련도 없다. 조용히 홀가분하게 떠나주마.

 

 

3 복직한 KTX 승무원들과 함께 [출처 필자].jpg

복직한 KTX 승무원들과 함께 [출처: 필자]

 

 

정년을 하면 시골에 가서 닭을 키우고 농사를 조금 지어 자급하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노동운동은 평생 할 일이 아니다. 나도 철도에서 대책 없이 강경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나이가 들어가니 점점 신중해지더라. 노조 간부들이 신중해지면 무엇에 쓰나. 세상을 뒤엎거나 바꾸는데 노조 간부나 활동가 들이라면 대책 없이 강경해야 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과격함이 있어야 한다. 50이 넘고 60이 넘어서 그렇게 과격한 노조 간부가 있나? 나는 별로 볼 수 없었다. 초심을 잊고 기득권에 안주하거나 명망을 좇아 헤매는 이들도 많이 보았다. 한때 열심히 했던 동료나 선후배 들이 이상하게 변해가는 것이 서글펐다. 마음 놓고 이야기 할 사람들이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몸을 있어야 할 곳에 두어야지 아무 데나 굴리면 안 된다. 버들치는 상류에서 살아야지 썩은 물에도 견디면 이미 버들치라 할 수 없다. 가난하게 살고 병들더라도(늙었으니 병들거나 죽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선택한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련다. 실천하지 않으니 운동에 대한 평가나 발언도 하지 않을 것이다. “활동하지 않으면 발언하지 않는다”가 나의 활동관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아나코 생디칼리즘이 맞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아나키스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다가 세 번째 구속 중에 그런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나는 대중 활동가였으므로 굳이 밝히지는 않았다.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밝혀도 된다.

 

철도를 떠나며 할 말은 별로 없지만 후배 동지들에게 한마디만 전한다.

“사랑하는 철도노조여, 민주노조의 깃발을 영원히 휘날려라. 하지만 그 패배자의 백기 같은 노동조합 깃발 좀 제발 바꿔라. 모름지기 민주노조라면 새빨간 붉은 색이나 핏빛을 닮은 검붉은 색의 깃발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피어린 투쟁에 빛나는 철도노조가 백기를 휘날리며 파업을 하다니, 생각만 해도 어색하고 웃기지 않는가? 그리고 덩치에 걸맞게 연대 좀 잘해라. 언제부터인지 연대하지 않는 철도노조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적어도 삼년에 한 번은 파업으로 뉴스를 시끌시끌하게 할 철도노조이기를 희망한다. 후배 간부들은 나이가 들어도 대책 없이 강경하고 과격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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