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05]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하는 질문 / 몽

by 철폐연대 posted May 12,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보통의 인권

 

누구와 함께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하는 질문

 

•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달라진 우리는 당신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 (2018)

‘일상의 남성카르텔, 우리가 부순다’ (2019)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주요 운영자와 공범자들이 구속되고 사건 수사에 대한 뉴스가 끊이지 않는 요즘,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를 향해 외쳤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가시화된 미투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중심적인 성문화를 뒤흔들며 일상의 변화를 촉구하는 운동이었다. 미투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장소가 직장, 대학, 학교와 같은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폭력이 여성들의 삶에서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를 폭로했고, 故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양진호 웹하드카르텔, 정준영 단톡방 등으로 이어진 사건은 겸찰․경찰을 비롯한 남성카르텔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왜곡하고 은폐해왔던 주범임을 지목했다. 피해자로 남길 거부한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착취에 맞서 싸우는 주체가 되고자 했고, 그 힘으로 강간문화가 지배하는 남성중심적인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7 보통의 인권_01.png

 

 

‘n번방이 보여준 남성연대, 우리가 부순다’ (2020)

 

그리고 작년 말부터 한국사회를 뒤덮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다시금 여성들의 분노를 소환했다. 여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끔찍한 범죄’에 분노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이 범죄가 ‘경악’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100만 회원을 자랑했던 ‘소라넷’ 사이트에서 불법촬영물이 버젓이 공유되고 성폭력이 영웅시되었던 몇 년 전과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 공분이 끊이지 않는 현재는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이 ‘공분’은 어떤 세계를 부수고, 어떤 세계를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가.

 

텔레그램 성착취가 가능했던 디지털 조건

 

작년부터 언론보도를 통해 실상이 알려진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지금까지 문제제기 되어온 디지털 성범죄들이 축적되어 나타난 새로운 유형의 범죄다. 범죄자들은 주로 해킹 또는 사칭으로 여성의 개인정보를 확보하고 신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여성들로부터 성착취 촬영물을 얻어내는 수법을 썼다. 그리고 이를 다시 텔레그램이라는 메신저 채팅방에 입장한 남성들과 공유하거나 판매하면서 피해를 확산시켜왔다. ‘박사방’, ‘n번방’, ‘고담방’, ‘여중생․여고생방’, ‘여교사방’, ‘지인능욕방’ 등 수많은 텔레그램 방의 이름과 26만 명으로 추정되는 가해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규모, 피해의 확산 정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디지털 성범죄의 특징을 보여준다.

 

텔레그램의 경우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어서 수사망을 피해가기 쉽다는 점 때문에 정준영 단톡방 이후 범죄자들의 대체재로 등장했다. 범죄자들은 실제로 만나지 않고서도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얼마든지 성착취를 공모할 수 있었고, 수시로 성착취물과 대화를 삭제하고 방을 폭파한 후에는 새로운 비밀방으로 이동하는 등 흔적을 비교적 쉽게 지울 수 있었다. 몰카나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로 불법촬영물을 생산하고, 기존 촬영물에 피해자의 얼굴이나 특정 신체 부위를 편집·합성·가공한 ‘딥페이크(Deepfake)’ 방식의 지인능욕 성착취물을 제작했다. 성착취물의 유통과 판매는 거래내역을 파악하기 쉽지 않은 암호화폐만을 이용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범죄수익을 쌓아올리는 방식이다.

 

우리가 흔히 성폭력으로 떠올리는 방식이 주로 오프라인 공간에서 물리력과 권력을 이용해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면, 디지털 성범죄는 온라인 환경과 디지털 기술과 매체들을 통해서 누구나 그 폭력에 쉽게 가담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 가해자는 실질적인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고, 그 피해는 지속적으로 반복될 뿐만 아니라 다수의 가해자에 의해 기간이나 공간의 제약 없이 확산될 수 있다. 성착취물의 생산-유통-소비-확산으로 이어지는 연쇄고리는 피해자가 한 명일지라도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해자가 존재할 수 있는 점을 드러내었고, 이는 ‘텔레그램 n번방 이용자 모두가 범죄자이자 공범자’라는 외침이 등장한 배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텔레그램 이용자 26만 명’이라는 숫자의 정확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이 범죄의 핵심을 비껴간 논쟁이다. 텔레그램 방에 입장해서 성착취물을 관람하고, 다운로드 받아 소지하고, 공유한 모든 사람이 이 범죄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은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에 따라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동의 없이 유포된 성적 촬영물을 소비하거나 소지한 사람은 처벌할 수 없었다. 웹하드와 단톡방, 텔레그램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성범죄의 카르텔은 바로 정확하게 이 조건 위에서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성착취물의 소비․소지한 사람 모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제도를 요구하는 이유는 바로 디지털 성범죄가 가능한 구조와 남성 카르텔을 깨지 않고서는 범죄의 확산과 함께 2차, 3차로 이어지는 끝없는 피해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요구는 가해행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당하다. 하지만 여성들이 무엇보다 성범죄의 카르텔이 유지되는 세상을 부수고 싶어 하는 핵심에는 ‘피해자’가 있다. 작년 처음으로 텔레그램 n번방 문제를 보도했던 한겨레의 오연서 기자는 혹시라도 자신의 신상정보가 알려지고 또 다른 피해나 보복을 두려워하는 피해자에게 ‘더 많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당신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피해자들은 나서서 자신의 피해를 말했고, 이는 언제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다른 여성들을 위한 용기이자 공익적인 행동이었다. 성착취물의 광범위한 유통으로만 유지될 수 있는 성범죄의 구조를 깨는 일, 더 이상의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예방 대책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회라면 이 용기에 응답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싸움을 계속 가능하게 하는 힘

 

“그들에겐 목소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요.”

 

범죄심리학자이면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비롯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이수정 씨가 영화 속 피해 여성들이 재현되어 온 방식을 진단하는 한 문장. 이 문장에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무너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성적 촬영물이나 자신의 개인정보가 유포되는 순간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 전체가 어떻게 훼손될 수 있는지, 어떤 낙인과 차별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해보기란 어렵지 않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성별화된 여성의 지위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디지털 성범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디지털 성범죄가 이루어지는 성착취물의 생산-유통-소비-확산의 연쇄고리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기제는 바로 유포 협박이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피해상담 통계를 보면 피해 유형 중 유포 협박 피해와 불안피해가 매해 일관되게 나타난다. 텔레그램 n번방의 피해자들이 계속되는 성착취물 촬영 협박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촬영물이나 신상이 유포되는 순간 다수의 가해자에 의해 빠르게 전파될 뿐만 아니라 무한대로 복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떤 불특정한 다수에게 공유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조건은 ‘혹시 저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않을까?’라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미 유포가 된 경우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고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재유포 될 수 있다는 온라인 네트워크의 특성은 피해자의 불안감을 다시 공포로 몰아넣는다. 자신의 모습이 담긴 촬영물이나 개인정보가 ‘더 광범위하게’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했던 피해자의 행위는 스스로를 탓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이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 자신의 신상이 공개되는 것을 ‘마녀사냥’으로 부르는 가해자, 자신의 가족과 지인이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억울한 가해자들이 저지른 범죄의 현실이다.

 

하지만 디지털 성범죄를 유지시키는 핵심 기제에 협박이라는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처벌법 상 유포 협박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올해 초 청와대 청원 20만 명에 이어 국회 입법청원 10만 명을 넘기면서 ‘1호 법안’이자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으로 기대를 모았던 성폭력처벌법 개정에서도 유포 협박에 대한 처벌이나 규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텔레그램 ‘박사방’의 운영자로 알려진 가해자가 검거 된 이후 지난 3월 24일 두 번째 국회 입법청원인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비롯한 사이버 성범죄의 처벌법 제정에 관한 청원’이 올라왔고, 하루 만에 10만 명의 동의를 얻었다. 지난 4월 15일에는 ‘텔레그램을 통한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 처벌 강화 및 신상공개에 관한 청원’까지 10만 명을 달성하면서 텔레그램 n번방 사건과 관련해 세 번의 청원이 성립되었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텔레그램 n번방에 분노하는 여성들은 할 수만 있다면 청원 시스템을 부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누군가는 당연히 누리는 안전과 일상을 여성들은 싸워서 얻어야만 하는 조건은 너무나 불공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계속하는 이유는 성적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 ‘인간으로 평등하게 존재하고 싶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시화하면서 싸워나가는 그 힘만이 여성의 존엄과 권리를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회는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외치는 여성들이 존재하는 한, 국회의 대응 역시 1호 법안을 졸속으로 처리했던 불과 몇 개월 전의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남성연대 위에서 성범죄를 키워온 사회의 책임

 

법제도의 공백만이 디지털 성범죄를 키워온 것은 아니다. 텔레그램 성착취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공포와 불안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어떤 여성이든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만능감에 취해 있었던 운영자와 이를 추종하고 자신도 그러한 지위에 오르고 싶다는 선망을 가진 남성 이용자 집단의 욕망에 기반해 있다. ‘박사방’을 운영했던 가해자가 체포된 후 자신의 행적을 ‘스스로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이라고 칭하고 이를 주목해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전형적인 반응을 확인한 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검거된 것이 아니라 멈춘 것이라는 자만, 악마화를 통해 다른 누구도 자신의 위치에 범접할 수 없다는 영웅 심리에 취해 있는 가해자의 민낯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부추기고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마치 디지털 성범죄가 특정한 가해자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어진 성범죄부터 텔레그램 사건까지 여성들이 문제제기 해 온 것은 바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착취가 해소되지 않은 채 은폐될 수 있었던 한국사회의 성차별적 구조, 이토록 사소한 문제로 주변화될 수 있었던 남성집단의 ‘강간문화’였다. 故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정준영 단톡방 사건 등은 가해 남성들이 여성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젠더권력은 비가시화 된 채로 마치 특권층의 비리나 연예인의 일탈처럼 처리되었다. 아무도 처벌받지 않거나 그 어느 누구도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은 상황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착취를 실행할 수 있는 권력이 있고 그런 위치에 있다면 크게 문제없다는 가장 관대한 처분을 약속한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결과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착취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되는 기반이 되었고, 여성이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성적 대상이자 놀이문화의 소재, 금전을 통해 거래될 수 있는 물품으로 여기는 남성문화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여성들이 그토록 부수고 싶어 했던 것은 남성문화에 기반해 디지털 성범죄가 이룬 거대한 산업구조였고, 디지털 성착취물의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로 성장시킨 온-오프라인 네트워크를 넘나드는 폭력적인 남성문화였다.

 

피해자가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졌다고 여기는 것, 여성들이 디지털 성착취의 피해 범위와 심각성이 ‘무한대’라고 인식하는 이유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어떤 폭력도 그 자체로 영구하지 않다. 피해가 끝나지 않는 이유는 ‘남자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라는 말로 피해자의 권리와 존엄을 해치는 상황을 이 사회가 ‘정상’으로 승인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해자에게는 지배욕을 강화함과 동시에 피해자와 이러한 피해를 지켜보는 여성들에게는 무력감을 주는 결과를 낳는다. 이용자, 소비자, 공범자인 남성집단에게는 면죄부를 발부하고 자신은 범죄와는 관계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앞서 피해자에게 용기 내어줄 것을 부탁했던 오연서 기자 역시 이미 무너진 피해자의 일상을 회복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웠다는 점을 고백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착취의 오랜 역사, 이를 가능하게 하는 편향된 젠더권력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피해자의 용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하지 않는다’로 바꾸어갈 수 있을까.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대중이 갖게 된 ‘여자라서 죽었다’와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분노, ‘나일 수도 있었다’는 죄책감에 우리 사회는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분노를 행동으로, 변화를 일상으로’

 

‘세간의 담론이 왜 버닝썬, 승리, 김학의, 장자연 같은 민망한 사건에 쏠리는가.’

 

작년에 지식인으로 불리는 한 사람이 일간지 칼럼에 쓴 글을 아직도 기억한다. ‘저 남부 지청쯤에서 해결해도 될 누추한 사건들’로 치부하는 인식의 문제가 그 한사람만의 몫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인식은 한국사회가 여전히 여성의 신체와 인격,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폭력을 ‘사회풍속을 어지럽히는 음란’의 문제로 여긴다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여성의 몸을 거래하면서 이윤을 창출하고 이를 통해 남성권력을 획득하는 권력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사회 역량의 한계, 이러한 폭력과 성착취 문제는 ‘사회정의’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키워온 근본적인 배경이다.

 

이런 사회에서 피해자들의 용기가 사회변화를 위한 공적인 기여로 여겨지지 못하는 것은 피해 여성이 경험한 피해를 증명하거나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착취가 여성 인권에 대한 침해의 문제로, 성평등과 민주주의를 해치는 폭력의 문제로,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공적인 사회문제로 인식되는지의 여부는 사회가 얼마나 피해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지에 따라 결과로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쏟아진 여성폭력 청원 요구에 미치지 못했던 정부의 대책, 디지털 성범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입법에 무관심했던 정치인과 국회,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해시태그로 기억될 만큼 남성권력의 수호자였던 검․경,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 해시태그 캠페인이 보여주듯이 가해자 중심의 편파적이고 미온적인 판결로 성범죄를 키워온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진 사법부, 성범죄 사안을 선정적으로 다루며 확대재생산했던 언론까지 모두가 ‘공범’으로 등장했다. 무엇보다 가해자와 자신을 분리하며 여성을 재화로, 성착취를 남성의 놀이문화로 정당화해온 남성집단의 맨얼굴이 26만 명이라는 수치로 가시화되었다. 끊이지 않는 사건들 속에서 다시금 세상을 바꿔가겠다고 결심한 여성들 외에도 많은 시민들이 함께 분노하며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을 부수기 위한 ‘대책’에서 우리가 누구와 함께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와 일상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변화할 수 없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대한 ‘공분’은 단순히 끔찍한 범죄에 대해 대중이 느끼는 분노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착취가 존재하는 한 우리사회에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공적(公的)인 분노이자 문제제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이해 속에서 우리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른 약속을 할 수 있고, 피해자는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언젠가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잘 맞게 생겼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경찰관은 부하 경찰들의 집단 진정으로 징계절차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최근 ‘개발자 꿈꾸던 모범생, 부따 강훈의 이중생활’이라는 기사를 쓴 한 기자는 가해자에게 이입하는 효과를 낳는 가해자 중심의 서사라는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사를 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텔레그램 방에 있던 26만 명이 가해자라는 게 말이 되냐며 조롱하는 남성들에게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남성들 역시 적지 않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모든 청원에 다 서명했다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의 이 세계를 부수겠다고 약속한 더 많은 사람들의 행동으로 디지털 성범죄가 ‘사회정의’ 문제로 여겨지게 하는 것,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한국사회의 상식적인 관계 양식이자 법제도라는 틀에서 책임으로 작동되게 만드는 것. 나는 우리가 함께 이러한 흐름을 대중적으로 만들어내고 실제 결과로 맞이하게 되는 그때, 가해자의 얼굴보다 피해자가 목소리가 더 많은 힘을 가질 수 있는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