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06] 고 이재학PD대책위원회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 윤지영

by 철폐연대 posted Jun 0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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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의 투쟁

 

고 이재학PD대책위원회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윤지영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철폐연대 집행위원

 

 

 

1. 사죄의 마음

 

이재학PD가 세상을 떠난 지 100일이 지났다. 100일이 되기 전에 그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제, 그러니까 5월 18일에도 5시간 가까이 진상조사위원회 회의를 벌였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 일정대로라면 5월도 넘기게 된다. 애타게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대책위원회 활동가들, CJB청주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의 동료들, 그리고 유가족, 누구보다 고 이재학PD께 죄송할 따름이다. 사죄의 마음으로 글을 연다.

 

 

2. 프리랜서 PD의 사망과 대책위원회 구성, 진상조사 합의

 

2020년 2월 4일 이재학PD가 목숨을 끊었다. 1심 판결문을 받은 직후였다. 그는 14년 간 일한 직장, 젊음을 갈아 넣은 CJB청주방송을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의 소를 제기했다. CJB청주방송은 그를 프리랜서로 규정했고, 그가 동료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자 프로그램에서 하차시켰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소송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송은 해법이 되지 못했다. CJB청주방송의 억지와 부당한 행동에 그는 한 번 더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고, CJB청주방송의 근로자가 아니라는 법원의 판단에 무너져버렸다. 고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다.”,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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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 이재학PD 대책위원회]

 

충북에서 먼저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진상을 규명해서 이재학PD의 명예를 회복하고 억울함을 해소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또한 방송국 비정규직 문제 해결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대로 지나간다면 또 다른 이재학PD가 안 나오란 법이 없었다. 이재학PD가 동료 프리랜서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상, 남아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이재학PD의 뜻에 따르는 중요한 사항이었다. 서울에서도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2월 19일에는 전체 <CJB청주방송 이재학PD 사망 진상규명·책임자처벌·명예회복·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대책위원회는 “방송사들이 아무리 시민과 노동자의 눈과 귀를 막아도 입까지 막을 수는 없다. 노동 착취의 구태에 빠진 방송사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대의 변화까지 되돌릴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청주방송이 위선과 기만의 가면을 집어던질 때까지 대책위는 끝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재학PD의 문제를 알리고 CJB청주방송을 규탄하는 활동이 이어졌다. 유가족과 언론노조, 대책위원회는 CJB청주방송에 진상조사를 강하게 요구했다. 마침해 2월 27일 CJB청주방송, 대책위원회, 유족, 전국언론노조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를 수용하고 진상조사위원회가 제시하는 해결 방안과 개선방안을 즉시 이행하며 이행 현황에 대해 진상조사위원회의 점검을 받기로 합의서에 명시했다.

 

 

3. 진상조사위원회의 활동

 

3월 3일 첫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사측 위원의 구성 문제로 첫 회의는 원활히 진행되지 못했다. CJB청주방송은 사측 추천 위원 3명을 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핑계로 시종일관 무책임한 태도로 진상조사에 임했다. 각종 자료의 제출과 소속 직원들에 대한 면담을 요청했으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3월 27일 부속합의를 하고 사측 추천 위원 3명을 온전히 꾸리고 나서야 CJB청주방송은 진상조사에 응하기 시작했다. 합의를 한 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진상조사위원회는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나는 간사로서 CJB청주방송에 자료 등을 요구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진상조사위원회는 2개의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1소위원회는 이재학PD의 노동자성, 해고 여부, 소송 과정에서의 위법ㆍ부당행위, 이재학PD의 사망 원인과 성격을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2소위원회는 CJB청주방송 비정규직의 실태와 직장 내 괴롭힘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 달 간 속도를 내어 진상조사를 벌였다. 비정규직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집단/개별 면담 조사를 진행했다. 비정규직 외에도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에 대한 면접조사를 벌였다. 각종 문서와 자료들을 확보하여 서면 조사를 실시하고 두 번에 걸쳐 현장조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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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23. 이재학PD 49재 추모 결의대회에서 발언 중인 필자 [출처: 김순자]

 

 

4. 진상조사를 통해 확인한 사실

 

CJB청주방송은 방송제작인력에 대한 수요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필요한 인력의 상당 부분을 프리랜서로 사용할 수밖에 없고, 업무의 특성상 개인의 자유로운 전문성과 창작성이 요구되므로 종속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는 비단 CJB청주방송만의 주장은 아니다. 모든 방송사가 이런 식의 항변을 한다. 그러나 방송제작현장의 프리랜서들의 경우에도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실질을 가지고 노동자성을 판단한다. 방송의 특수성이나 전문성이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배제할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원은 노동자성을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할 근거로 방송의 특수성, 전문성을 고려하고 있다. 이런 판단 기준에 비추어 따르면 이재학PD는 계약의 형식에 관계없이 CJB청주방송의 노동자였다. CJB청주방송에 전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했고, CJB청주방송에서 정한 노동력에 대한 대가 외에 수익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JB청주방송은 이재학PD가 동료 비정규직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자 담당하던 프로그램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업무를 없앴다. 부당해고를 한 셈이다. CJB청주방송은 이재학PD와의 소송에서 위법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재학PD를 위해 진술서를 써준 동료들을 질책, 회유하고 거짓된 사실관계확인서들을 증거로 제출했다. 위증을 하고 명백한 사실마저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 과정이 이재학PD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몸 바쳐 일을 했던 CJB청주방송으로부터 존재를 부정 당했고, 법원은 이러한 CJB청주방송에 손을 들어 주었다. 해고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판결을 기대하며 버텼는데 남은 것은 좌절과 부조리한 현실뿐이었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정하고 부조리한 상황은 이재학PD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CJB청주방송에는 많은 비정규직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가 이재학PD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참고로 CJB청주방송의 경우 정규직이 78명인데 비정규직은 42명이다. 정규직 대비 54%가 비정규직이다. CJB청주방송에는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이 존재한다. 프리랜서라 불리는 AD와 작가 직군이 있고, 불법파견이라 볼 수 있는 MD 직군과 CJB청주방송 자회사 소속 직원들이 있다. 경비, 청소, 운전, 행정, CG처럼 상시지속적 업무이지만 용역/파견 형태로 일을 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하는 일과 형태는 다양하지만 불안정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일을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CJB청주방송은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이야기했고, 그러한 주장이 합리적인 것처럼 호도했지만 결과는 불합리한 급여 기준, 주먹구구식 운영과 각종 차별로 나타났다. 괴롭힘과 성희롱도 빈번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다른 존재, 명령하고 하대해도 되는 존재로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바라며 혹은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불합리와 수모를 감당하고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재학PD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5. 진상조사위원회의 이행 요구 사항

 

진상조사위원회가 요구하는 첫 번째 사항은 이재학PD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에 대한 징계다. 진상조사위원회는 관련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양정을 하여 회사에 징계를 요구했다. 그러나 징계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CJB청주방송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재학PD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추모/명예복직과 항소심 과정에서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유족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CJB청주방송은 상시지속 업무의 경우 정규직화한다는 원칙 하에 비정규직을 최소화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계획을 수립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프리랜서 직군, 불법파견 노동자들, 기타 상시지속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정규직 전환을 할 때까지 고용을 유지해야 하고, 정규직 전환 후 이전보다 노동조건을 저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규직 전환 과정 및 노동조건 결정 과정에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참여도 보장해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간에 단일한 임금체계도 마련해야 한다. 주먹구구식으로 개별 비정규직마다 달리 운용되고 있는 채용, 업무 분장, 계약 해지 등의 방식을 일원화하고 정규직과 차이가 없도록 복리후생 등의 처우를 맞추어야 한다. 조직문화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성평등위원회, 고충처리위원회 등을 실질화해야 하고 비정규직이 추천하는 외부 위원을 참여시키는 등 비정규직 노동자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고 제대로 된 교육도 필요하다.

 

이번 진상조사는 CJB청주방송과 CJB청주방송 노동자들의 것만은 아니다. 전체 방송사와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시금석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상조사위원회는 관계 부처에 고용 건전성 기준을 강화한 재허가 조건, 표준계약서 현실화 방안, 방송제작 노동자의 고용보험 적용, 방송사와 비정규직의 상생방안을 CJB청주방송에 함께 제안할 것을 요구했다.

 

방대한 요구사항에 대해 CJB청주방송이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CJB청주방송이 응하지 않더라도 진상조사위원회는 다수결로 이행요구안을 통과시킬 수 있고, CJB청주방송은 진상조사위원회가 결정한 이행요구안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왕이면 합의를 통해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이행요구안이 제대로 집행되고 CJB청주방송 비정규직들도 자신감을 가지고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을 담아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