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07] 재난의 약한 고리로부터 변화의 연대로 / 남웅

by 철폐연대 posted Jul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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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인권

 

재난의 약한 고리로부터 변화의 연대로

 

남웅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대책본부

 

 

 

 

‘터질 게 터졌다’

 

코로나19 국내 확진자가 나왔던 2020년 초입부터 인권운동과 시민사회는 질병이 초래할 상황들을 재빠르게 예상해야 했다. 미지의 질병에 누구라도 감염된다면, 언론과 정치인들은 그 집단을 표적함으로써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전가할 것이 자명했다. 특히 그것이 인수 감염 전염병일 경우 접촉이 곧 오염이 되어버린다는 경계는, 그간 혐오의 여론몰이 속에 부당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해온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취약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니, 이미 질병이 창궐한 시점부터 바이러스가 최초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에 대한 혐오와 편견은 각종 음모를 만들며 국내 거주 중인 중국인과 중국동포에 대한 따가운 시선으로 연결되지 않았던가.

 

전염병이 창궐하면 국가는 빠르게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정보에 접근하고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사회구성원들이 예방수칙을 지키도록 장려하고 감염되었을 경우에는 치료를 받고 안전하게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자 기본이다. 이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정부는 대중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했지만, 거리를 두자는 요청에는 몇 가지 조건들이 전제된다. 먼저 사적 공간뿐 아니라 학교와 일터에서도 나의 온전한 시간과 공간이 주어져야 한다. 유흥업소와 수용시설 등 음지화된 장소나 사람들이 모여드는 학교와 교회,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접촉가능성이 높을 것이므로 노출될 수 있는 환경들을 수정하며 이들에 대한 도덕적 낙인과 비난을 방지해야 한다. 질병을 비롯한 재난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곧 일상에서부터 인권과 안전의 가치가 보장되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언론과 방역당국은 초기 확진된 이들의 정보를 과도하게 노출했다. 확진 소식을 알리는데 이들의 나이와 성별과 사는 아파트 이름까지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신천지 확진자가 늘면서 언론과 몇몇 지자체들은 질병보다는 특정 종교를 가십처럼 취재하고 이들을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들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남들과 다른 종교를 갖고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을 때, 이들은 공격의 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공공의 노력에 배제되는 이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이거나 언론과 지자체의 전파집단으로 표적당한 이들이었다. 감염된 이들의 정보가 과도하게 노출되었고 이는 곧 감염인뿐 아니라 특정 집단의 당사자들까지 공포의 대상으로 낙인찍는 효과를 부풀렸다. 언론과 방역당국은 이들의 삶을 고립시켜 사회적 소수자로 밀어 넣는 동시에 이전부터 존재해온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낙인과 조리돌림을 강화했다. 이들을 가로막는 것은 자신들을 둘러싼 삶의 취약한 환경이었고 이들을 향한 사회의 혐오와 낙인, 차별과 배제였다. 재난은 사회의 약한 고리를 절망적으로 비춘다.

 

만약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이런 걱정을 긴급하게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적어도 위기 상황 속에서 인권운동이 고군분투하고 부침을 겪으며 위기에 대응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홈리스와 이주민이 재난지원금에서 배제되는 일이나, 장애인이 검진과 지원의 접근에 있어 문턱에 막혔을지라도 이를 개선하기 위한 직접적인 방안들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질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소수자 집단을 향한 혐오로 전치되며 질병의 두려움을 타인에 대한 비난과 증오로 여론 선동하는 것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약한 고리의 집단들

 

신천지 확진자가 늘어난 시점에 집중된 종교에 대한 혐오는 신도에 대한 낙인으로 이어졌다. 이는 가난한 여성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로, 콜센터 노동자들로 이어졌다. 이들을 향한 언론의 증오 선동은 이들을 이웃이 아닌 비난의 대상으로 비추기 급급했다. 내게 주어져온 일상의 조건들은 질병이 도래하면서 삶을 극도로 고립시키는 장치들이 되었다.

 

5월의 긴 연휴 동안 사람들은 길었던 사회적 거리두기의 피로와 긴장을 다소간 풀며 나들이를 가고 사람들을 만났다. 누군가는 오랜만에 오픈한 클럽을 가고 술집을 갔다. 문제는 연휴 이후였다. 이태원 클럽에서 확진자가 나오자마자 <국민일보>는 ‘단독’을 앞에 달고 ‘게이클럽’을 명시했다. 뒤이어 너 나 할 것 없이 클럽에 대한 온갖 내용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터질 게 터졌다.’ 기사의 첫 문장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터져버린 것은 다름 아닌 재난을 빌미로 자행하는 낙인찍기와 조리돌림이었다. 클럽 확진자가 수면방까지 갔다는 동선이 노출되면서 기사들은 질병에 대한 예방보다 게이들의 만남과 장소를 파헤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질병을 빌미로 혐오를 자행하고 성적 보수주의를 전파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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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12.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대책본부 출범 기자회견 모습 [출처: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대책본부]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곧바로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 대책본부’를 출범했다. 질병의 위기는 단지 공중보건의 문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게이 커뮤니티에 오랜 시간 뿌리내린 HIV/AIDS 낙인은 외부의 도덕적 비난뿐 아니라 내부의 단속과 트라우마를 심어왔다. 게이 남성들의 클럽과 어플을 통한 만남뿐 아니라 찜방과 사우나 등을 통한 만남 전반에 걸친 낙인의 무게는, 만남의 문화 자체를 음지화해온 역사로 남았다. 그것이 커뮤니티 내부에서부터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혀 공론을 모색하고 만들어온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여기에 들이닥친 코로나19가 불러온 증오 선동은 커뮤니티의 만남은 물론, 이들이 오랫동안 일궈온 공동체를 흔들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확진자가 되어 동선이 공개되거나 이태원을 다루는 언론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자가 격리를 하게 된다면, 곧장 혐오의 표적이 되고 아웃팅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는 단순히 내가 성소수자임이 타의에 의해 노출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연휴라고 방만하게 클럽을 다녀오고, 찜방을 갔다는 것은 성소수자임을 노출하는 단순한 우려를 넘어 문란하고 방만한 성소수자라는 도덕적 잣대가 부여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이’ 업소를 보란 듯 노출하는 언론들은 늘어나는 조회 수에 자신의 선전선동 능력을 흡족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사자는 관계가 가로막히고 생계의 위협이 된다. 언론들은 “질병 예방을 위해서는 성소수자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가져오며 이들 문화의 신상을 낱낱이 살피는 듯 했다.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성소수자는 바로 당신의 지근거리에 살고 있는 이웃이고 지역의 사회구성원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것은 정보보다 위협으로 비쳤다. 몇몇 지자체장들은 확진자의 동선을 자기 개인 SNS 계정에 보란 듯 선전했다. 방역에 앞장선 정치인으로 비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지역 구성원의 고통을 이용한 당신들은 자신에게 대표권을 부여한 시민을 모욕했다.

 

대책본부는 출범 직후 방역당국과 소통하고 언론모니터링을 매일같이 진행했다. 성소수자 정보를 과도하게 노출하고 가십거리로 삼는 것은 질병 예방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음을 알렸다. 검진을 받고 자가 격리를 하거나 치료를 받고 회복하는 과정에 개인의 정보가 과도하게 노출된다면 누구라도 쉽게 예방과 치료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시민사회는 이미 HIV/AIDS 인권운동을 통해 개인의 인권과 프라이버시 보호가 질병 예방에 있어서 제일 기본임을 배웠다. 익명검사가 시행되고 정부가 나서서 차별과 혐오 반대 메시지를 낼 수 있던 것은 대책본부의 요구 이전부터 평등과 인권을 말해온 시민사회의 오랜 주장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정치적이고 실무적인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태원 확진자 발생 초기 성소수자 목록을 달라고 요청했던 방역당국이 ‘혐오와 차별은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던 것 또한 인권운동이 오랜 기간 노력해온 결과였다.

 

대책본부는 언론과 방역당국뿐 아니라 커뮤니티를 향한 소통도 시도했다. 찜방이나 사우나와 같이 게이 남성들의 성관계가 이뤄지는 공간은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공간이자 만남의 문화였다. 하지만 전염병에 취약한 밀접접촉들이 빈번한 공간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기 쉬운 환경을 조성한다. 그동안 황색 저널리즘이 엉터리 르포를 하고 성적 보수주의를 선동하는 도구로만 소모된 역사 또한 방관할 수 없었다. 찜방을 이야기하자는 목소리는 더 이상 피하지 말자는 권유이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결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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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와 어플에 게재된 자발적 익명검사 시행 광고 [출처: 코로나19 성소수자 긴급대책본부]

 

 

예방과 방역 너머 사회변화를 향한 의지

 

대책본부의 발 빠른 활동을 바탕으로 많은 시도들이 이뤄졌다. 주요 만남 어플리케이션에는 익명을 보장하는 자발적인 검사 독려 광고가 실렸고, 위기 속 성소수자의 구체적인 목소리와 요구들이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 방송에 담겼다.

 

생각해보면 위기가 터진 상황이 도래하고 나서야 성소수자를 호명하고 협상주체로 인정하는 듯한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다. 오랜 시간 문을 두드렸지만 침묵해온 이들이 자신들의 안전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제야 성소수자를 호명하는 것이었을까. 그마저도 성소수자는 입에 올리지 않은 채 혐오와 차별이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다소 수세적인 문장으로 갈음하면서 말이다. 허나 그것은 절실한 기회이기도 하다. 질병 예방과 안전이 보수주의의 프레임에 갇히게 될 때 위기 이후의 상황은 이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위기를 바탕으로 삶의 취약한 부분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책본부의 활동은 질병 위기 속 성소수자의 안전만을 도모하기 위한 노력에 국한할 수 없다. 성소수자를 향한 낙인은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제도적 배제로 연결되었다. 이태원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국적이 노출되고 표적이 되는 미등록 이주민은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금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등의 또 다른 약한 고리를 흔들고 있다. 쿠팡 노동자들의 확진이 나온 이후 이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부각되고 있다. 그 와중에 사측은 소비자들을 안심시키기 급급한가 하면,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눈총과 혐오가 곳곳에서 나오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이태원을 다녀온 인천의 확진자는 ‘거짓말 환자’가 되었다. 이태원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은 공중보건 차원에서 비판받을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왜 숨길 수밖에 없었을까. 혹여 아웃팅되어 사회적 커리어가 끊기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책본부는 인권 사각지대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 외에도 이들이 심중에 품고 있는 음지의 감정들에 말을 걸고 싶었다. 위기 속에서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체감하면서, 긴급 대응 활동은 그저 지금의 상황을 봉합하기 위한 활동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결의한다. 취약한 고리를 계속해서 위협하는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활동은, 나아가 차별에 맞서고 평등과 인권을 주장하는 오랜 운동 위에 있음을, 안전을 지키는 우리의 운동은 사회적 혐오와 낙인, 차별과 배제 속에서도 사회를 지탱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 있음을,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임을 다시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