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401] 1999~2000년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 / 김혜진

by 철폐연대 posted Jan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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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규직 투쟁 돌아보기

 

 

1999~2000년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

 

 

김혜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최초의 비정규직 투쟁이 무엇일까 물으면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건설노동자들은 80년대부터 꾸준하게 투쟁을 해 왔다. 1994년에는 신경영전략이라는 이름으로 하청화가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조의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사내하청만 놓고 보면 1996년 6월 마산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서 하청업체 노동자 60명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그해 10~11월에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상선에서 노동자 70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고, 1997년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광주공장)에서는 하청노동자 200명이 해고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1999년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이 최초의 비정규직 투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정규직이 대량해고 되었고, 비정규직의 제도화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저항이 있었으며, 다양하게 확산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찾기가 진행된다. 이 투쟁은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투쟁이다. 비정규직이 보편화되는 상황에서 자신을 ‘비정규직’으로 규정하여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내며 투쟁을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투쟁 흐름 앞쪽에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결성과 투쟁이 있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결성 과정과 탄압 

 

한라중공업은 1997년 12월 부도를 맞는다. 경제위기가 진행되던 무렵이었다. 부도 이후 채권단이 한라중공업을 운영하다가 1999년 8월 현대중공업에 5년간 위탁경영을 맡기기로 결정한다. 1996년도만 해도 한라중공업에는 60여 개 업체에 5,00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도가 난 이후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계속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1999년에는 24개 업체에서 1,300여 명 정도가 일을 하게 된다. 한라중공업 원청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방적으로 삭감하고, 하청업체들은 200~400% 정도 지급되던 상여급도 반납했다. 원청이 기성금을 제대로 주지 않고 어음결제가 빈번하여 임금체불도 심각했다. 사내하청 노동자 전면 철수 소문도 돌았다.

 

이에 한라중공업 사내하청에서도 노조 결성 움직임이 생겼다.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쫓겨나기 전에 노조를 만들고 투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에 속한 활동가가 사내하청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활동가와 지역활동가 그리고 현장에서 조직된 활동가들이 모여 사내하청 노조 출범을 준비하게 된다. 당시에는 대다수 기업 단위로 노조를 결성했지만, 업체별로 노조를 설립할 경우 원청의 계약해지나 업체 철수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노조를 준비하는 활동가들은 한라중공업 공장 안의 모든 비정규직을 가입 대상으로 삼고, 원청을 상대로 투쟁하자는 의지를 담아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사내하청 노조를 준비하는 노동자들은 1999년 3월 ‘한라중공업사내하청노동조합 준비모임’ 명의로 총 7차례 현장 내 선전전을 진행한다. 그리고 1999년 3월 28일에 7명의 발기인으로 ‘한라중공업사내하청노동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3월 29일 영암군청에 설립신고서를 접수하고 ‘체불임금 완전청산’, ‘무급휴직 철폐’ 등을 핵심 요구로 하여 현장에서 결성 보고대회를 개최한다. 현장 보고대회에 대한 방해가 있었지만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 간부들이 지원하고, 노조 간부들이 현장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결성 보고대회를 무사히 치러낸다. 그런데 영암군청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설립신고필증 발부를 꺼렸고, 노동자들은 영암군청 항의농성을 하면서 3월 31일 설립신고필증을 받아 냈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는 결성되자마자 심각한 탄압을 당했다. 노조를 결성한 다음 날인 3월 30일, 하청업체 사장과 직반장으로 구성된 구사대가 노조 임시사무실이 있는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를 침탈한다. 이들은 노조 사무실의 기물을 부수고 사내하청 노조 간부 4명을 납치하여 봉고차에 싣고 달아난다. 납치차량을 몸으로 막은 한라중공업 노조 조직부장을 그대로 치고 뺑소니를 했고, 노조 조직부장은 중상을 입는다. 하청노조 위원장은 해남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고 교선국장을 납치한 이들은 한라중공업 해복투 동지들의 추적과 신고 끝에 검거되었으며, 다른 두 명의 간부를 납치한 자들은 영암파출소에 자진출두하여 납치극은 마무리되었다.

 

한라중공업은 하청업체를 동원하여 사내하청 노조 간부들을 납치한 동안 사직서와 조합 탈퇴를 강요했다. 납치극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라중공업은 3월 31일에 노조 간부들이 소속되어 있는 업체를 계약해지한다. 그리고 현장 조합원이 없다는 핑계로 4월 1일부터 사내하청 노조의 현장 출입을 통제하고,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 방문도 가로막았다. 지역 단체들과 금속연맹 소속 노조로 구성된 항의방문단이 지역 노동부에 항의집회를 개최하고 한라중공업에도 출입을 허용할 것을 요구했지만 한라중공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사내하청 노조는 현장출입을 요구하며 서문 앞 농성에 돌입한다. 경찰의 방해로 천막도 치지 못한 채 노숙농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노동부 항의방문과 선전전, 연대집회 등을 진행했지만 한라중공업은 노조를 업무방해와 무단침입으로 고소 고발하고 1억 3,000만 원의 손해배상도 청구한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투쟁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현장을 떠나야 했지만, 남아 있는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체불임금과 무급휴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라중공업 내 폐기물을 운반, 수거하고 선별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서남종합환경 노동자 16명 전원이 6월 15일 노조에 가입하고 분회를 만든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체불임금을 청산하라는 것, 미지급 상여금과 누락된 특근수당 등 일체의 임금을 지급하고 무급휴가를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작업환경 개선에 대한 요구도 있었다. 정해진 작업시간 준수, 산재 처리, 작업보호구 지급 등의 요구였다. 이런 요구만 봐도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은 작업복이 지급되지 않아 쓰레기장에 버려진 작업복을 주워서 빨아 입기도 했다고 전한다.

 

노조는 ㈜서남종합환경과 교섭에 나서 산재 처리와 체불임금 건을 해결하였다. 그렇지만 역시 한라중공업 사측은 조합원에게 노조 탈퇴를 종용하고, ㈜서남종합환경과 도급계약을 해지한다. 거리로 쫓겨난 서남종합환경분회 조합원들은 8월 10일 천막농성에 돌입하지만 고용승계를 이루지 못하고 투쟁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는 8월에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을 시작한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우선해고 되었지만,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구조조정도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9년 8월 20일 매각대상이던 플랜트사업부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면서 투쟁이 본격화된다. 한라중공업 노조는 8월 18일 전면파업을 선언하면서 72일간의 전면 점거투쟁을 진행한다. 파업지도부는 현장출입을 강력하게 통제하며 전 조합원 농성에 들어갔다. 이 투쟁은 구조조정에 맞서는 의미 있는 투쟁으로 평가되었으며, 많은 지지방문과 연대가 이어졌다.

 

사내하청 노조도 농성 장소를 현장으로 옮겨 함께 투쟁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는 ‘하청노조의 현장 출입이 교섭 결렬의 명분이 된다’는 이유로 농성 장소를 옮기는 것을 만류한다. 그래서 사내하청 노조는 농성은 함께 못 하더라도 ‘하청노조의 요구안을 정규직 노조의 교섭 내용에 포함해 달라’고 요청한다. 근로기준법 준수, 부당노동행위 근절, 체불임금 청산과 휴업수당 지급, 노조활동 보장, 지역노동자 우선고용, 정규직 전환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라중공업 노조는 ‘책임질 수 없으며, 실무협상에서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한다. 그리고 공장에 남아 있던 사내하청 노동자 400명은 9월 3일, 전면 무급휴가로 공장에서 모두 쫓겨난다.

 

한라중공업 노조는 1999년 10월 26일 합의를 통해 파업을 마무리했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도 더 투쟁을 이어 갈 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198일간의 천막노숙농성을 접고 투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당시 위원장이었던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김호근 위원장은 12월에 구속되고 투쟁은 소강국면이 되었다.

 

사내하청 노조는 2000년 5월 31일 다시 투쟁을 시작한다. ‘하청노조 인정’과 ‘노조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북문 앞에 천막농성장을 차리고 투쟁한다. 2000년 7월 17일, 삼호중공업노조와 사측은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천막농성과 관련한 합의에 이르게 된다. 그 내용은 삼호중공업과 협력업체, 사내하청 노조의 고소고발과 손해배상청구소송 취하, 사내하청 노조의 삼호중공업 노조 출입 허용이었다. 김호근 위원장에 대한 탄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7월 21일 김호근 위원장은 출소했지만 출입 허용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내하청 노조는 출입과 노조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했지만 투쟁은 한계에 부딪혀 결국 투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의 의미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의 조직과 투쟁은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새로운 투쟁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때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매우 낯설었다. 하지만 사내하청은 점차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그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어도 업체가 폐업되고 현장에서 내쫓기며 현장출입조차 봉쇄당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비정규직의 권리 보장을 위한 투쟁이 매우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노동운동진영에 각인시켰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의 조직과 투쟁 이후,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는 많은 활동가들이 사내하청 현장에 들어갔고, 2000년대 중반 이후 사내하청 조직의 확대에 기여하게 된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조는 대중적인 조직화에 실패했다. 사내하청 노조 결성도 쉽지 않은 데다가 구조조정 국면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조직되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업체가 여러 개더라도 한 공장의 사내하청 전체를 하나로 조직해야 한다는 점, 업체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청을 상대로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제기한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기업별 노조를 상상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지만 하청업체는 단지 중간관리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며 하청업체별 노조 조직을 뛰어넘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이후 조직된 사내하청 노조들도 이와 같은 형태로 조직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는 구조조정을 막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이후 사업장에 전면적으로 들어오는 구조조정을 막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1999년 한라중공업 정규직 노조의 72일간의 파업에 많은 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라중공업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전선을 분산시킨다는 이유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가 중요한 때였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동투쟁을 하지는 못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조조정이 다른 문제가 아니며, 공동투쟁이 민주노조운동의 원칙이어야 함을 제기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