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909] 동지들께 복귀 인사드립니다 / 박정상

by 철폐연대 posted Sep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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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서 지역에서 철폐연대 동지들은

 

동지들께 복귀 인사드립니다

박정상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철폐연대 회원)

 

   

정말 오랜만에 동지들에게 인사를 드리게 된 것 같네요. 햇수로 5년여의 시간을 담장 안 세상에서 살다 보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많이 망설여집니다. 사실 <질라라비> 원고 청탁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하이디스지회의 배재형 열사 투쟁 이후로 꼭 필요한 회의자료 이외에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옥중 생활 중에도 바깥 동지들에게 거의 편지를 쓰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글로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가 정말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동안 수없이 글로 남겼던 것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책임을 지고 실천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었고, 그러다 보니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무지 조심스러워지더군요. 하지만 출소 후 동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몇 자 적어보려 합니다.

 

햇수로 5년여의 기간, 되돌아보면 정말 어떻게 보냈는지 참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시간이었지만 동지들이 걱정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옥담 밖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마치 목적지도 없이 먼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행은 처음 자기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 새롭게 세상을 보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떠나 있다 돌아오니 바깥 세상이 참 많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는 게 두렵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8월 한 달은 휴식을 취하고 9월부터 다시 민주노총 경기도본부로 복귀할 예정입니다.

 

담장 안 세상에서 살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이 원칙을 지킨다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매사에 순조롭고 평안할 때는 누구나 원칙을 지키려고 하죠. 그러나 원칙을 원칙이게 만드는 힘은 어려운 상황, 손해를 볼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지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켜나간다면 그것이 언젠가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 원칙을 저버리면 그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다음부터는 ‘원칙 없는 사람’이란 낙인이 두고두고 따라다니겠죠.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지켜내는 것이 원칙이겠죠.

 

<논어>에 보면 ‘접인춘풍 임기추상(接人春風, 臨己秋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에게는 서리처럼 차갑게 하라는 뜻입니다. 옥방에서 오랜만에 <논어>를 읽었는데 참 마음에 와 닿는 문구였습니다.

항상 나보다는 동지들을 생각하며 활동하려 합니다. 긴 담장 안의 세월, 정말 동지들이 있어 견뎌낸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글을 쓰다 보니 두서없이 주절거린 것 같네요.

 

 

 

진보를 꿈꾸며

 

현실의 고통은 항상 이상을 낳는다.

하지만 이상은 지금 이 곳에서 허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허상인 이상을 꿈꿀 때 비로소 진보를 잉태한다.

결국 이상이란 진보를 꿈꾸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고통은 꿈꾸던 진보를 구체적 현실로 본 적이 없다.

우리는 형식적, 상대적 진보를 꿈꾸어 온 것이 아니다.

진보는 근원적이어야 한다.

일단의 대중이 현재를 진보로 승인하는 찰라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래의 진보를 꿈꾼다.

그러므로 진보의 관념은 항상 착각과 투쟁하는 오래된 허상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다.

인간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시간은 존재했었다.

이미 존재하는 시간의 개념을 발견한 순간

진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우리는 시간의 존재성을 믿는다.

이를 우리는 역사라 한다.

또한 우리는 진보를 믿는다.

시간은 순환하지 않는다.

시간의 끊임없는 축적이 곧 진보다.

하지만 진보는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우리는 역사로서의 시간과 미래의 진보를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는 직접 미래를 가리키지 않는다.

진보의 시침과 분침은 항상 이 곳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는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다.

 

 

담장 안 생활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며 쓴 시입니다. 이 글로 저의 생각을 전달하며 동지들에게 복귀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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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24. [출처: 사회변혁노동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