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02]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 이용덕

by 철폐연대 posted Feb 10,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비정규운동을 생각한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이용덕 (노동해방투쟁연대(준) 조직국장, 톨게이트 요금수납노동자 직접고용과 자회사정책 폐기를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억울하게 당한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힘이 난다

 

“이 일 시작할 때 30대였고 지금은 50대가 됐다. 청춘을 다 바쳐 일했다. 그런데 해고 통보하는 데는 20초도 안 걸렸다.”

소모품이었다. 도로공사와 용역업체들은 정말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했다. 그들은 왕처럼 군림했다. 저들은 1~2년마다, 심지어 몇 개월마다 재계약해야 하는 노동자의 불안한 처지를 철저히 이용했다. 한 노동자는 동료가 울면서 퇴사한다고 했을 때 자신은 잘리지 않을 것 같아 속으로 기뻐했다는 경험을 털어 놓았다. 매일 용역업체 사장에게 돌솥으로 밥을 지어 아침을 차려줘야 했던 조합원도 있다. 임금은 최저임금 안 줘도 찍소리 못했다. ‘설사 아니면 화장실 금지’, 노동조건은 처참했다. 온갖 갑질과 성희롱을 당해도 참아야 했다.

한 노동자는 억울하게 당한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힘이 난다고 했다. 이 체제는 노동자들을, 특히 비정규직·중소영세 노동자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억압하고 착취하고 있는가? 그러나 노동자들은 영원히 당하지 않는다. 단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노동자들은 우렁차게 일어섰다. 그리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모든 걸 던졌다. 노동자계급의 힘을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노동자계급의 힘을 똑똑히 보라고 명령하듯이.

 

 

1 2019.12.10. 톨게이트 오체투지에 함께하는 필자 [출처 철폐연대].jpg

2019.12.10. 톨게이트 오체투지에 함께하는 필자 [출처: 철폐연대]

 

 

선을 뛰어 넘는 투쟁, 모두가 놀란 투쟁!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대부분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중년의 여성 노동자들이다. 장애인도 많다. 실업자가 넘쳐 나는 세상에서 가뜩이나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여성 노동자들이, 장애인 노동자들이 해고를 각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해고를 각오했다. 작년 6월 시범영업소부터 해고가 시작되고 6월 말 1,500명 대량해고가 기정사실이 되었을 때도 노동자들은 기죽지 않았다. 물론 설마 하는 마음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해고를 안 당하기 위해서 매달린다면 결국 선택지는 자회사거나 기껏해야 해고 인원을 축소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시범영업소 순회투쟁을 하며 조직력을 키웠고 해고할 테면 해고하라는 마음으로 본격적인 투쟁을 준비했다. 보통은 어떻게 하면 해고를 당하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하는데 투쟁을 선택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선을 넘는 투쟁, 모두가 놀란 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해고 이전의 불법파견 승소 판결이 자신감을 갖게 한 중요한 요소이긴 했다. 하지만 절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덩치 큰 용역업체’일 뿐인 자회사의 실체와 본질을 명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가 옳다, 직접고용이 옳다는 확신은 노동자들의 뼈저린 노동과 경험 자체에서 나왔다. 하나 둘 자회사를 거부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이제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던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노동자들은 거침이 없었다. 수십 명의 노동자들이 서울요금소 캐노피를 점거했다. 무더위, 장마, 태풍, 외로움, 경찰과 도로공사의 농성 방해를 이겨내며 백 일 가까이를 버텼다. 캐노피 점거와 함께 청와대 효자치안센터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많은 연행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계속 투쟁을 펼쳐 나갔다. 경찰이 농성 장소를 늘려주지 않자 노동자들은 다음날 아침 기습적으로 청와대 담장 앞으로 진출했다. 경찰의 청와대 저지선이 뚫린 것이다. 경찰은 바로 노동자들이 잠잘 수 있는 공간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심장인 본사를 점거하다

 

8월 29일 대법원 판결의 취지는 투쟁 중인 조합원 1,500명 전원을 직접고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강래는 대법 판결에서 다룬 304명만 직접고용할 거라며 조합원들을 갈라치기했다. 그조차 원래 하던 업무가 아니라 환경 정비 등 다른 업무로 발령할 것이고, 거주지에서 먼 다른 지역으로 발령할 수도 있으며, 수납업무를 하고 싶으면 자회사로 가라며 톨게이트 노동자의 요구를 깡그리 무시했다. 세종시에서 이강래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노동자들은 기자회견을 다 지켜보지도 않고 바로 김천에 있는 도로공사 본사로 달려갔다.

본사 점거는 톨게이트 투쟁의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노동자들은 구사대와 경찰을 뚫고 본사 진입에 성공했다. 노동자들의 과감함, 결단력, 전투의지는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다.

노동자들은 김천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 순서로 달려나갈 준비를 미리 했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본관으로 돌진했다. 구사대를 뚫고 진입에 성공했다. 일부는 20층 사장실에 가기 위해 계단으로 뛰어올랐다. 막힌 노동자들은 2층 로비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구사대와 경찰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노동자들을 밀어내려 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절규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절박한 상황에 몰린 노동자들은 상의를 탈의하면서까지 거세게 저항했다. 점거투쟁을 단호하게 지도한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박순향 부지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죽거나, 끌려가거나, 직접고용 가거나 세 가지 가운데 하나”. 정부는 농성 시작 3일 만에 공권력을 투입하려 했으나 노동자들의 기세에 놀라 물러섰다.

그 이후에도 농성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경찰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노동자들을 막았다. 도로공사의 사병이었다. 노동자들은 바깥에 있는 동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경찰과 거친 몸싸움을 벌였다. 경찰은 수시로 성희롱까지 저질렀다. 대차게 싸운 노동자들이 김천경찰서장의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불굴의 용기, 뜨거운 동료애가 김천 본사를 점령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감동 받았다. 민주노총도 9월 23일 김천 본사에서 대의원대회를 열고 ‘공권력 투입 시 연대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정부는 진압 작전이 아니라 고립 전략을 선택했다.

 

 

‘을지로 중재안’을 비롯한 온갖 갈라치기를 계속 거부하다

 

노동자들의 완강한 투쟁이 길어지자 정부는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를 내세워 투쟁을 정리시키려 했다. 을지로위원회는 쓰레기 중재안을 들이밀었고 한국노총 톨게이트노조가 받아들였다. 합의안의 핵심은 “2심 계류 중인 수납원은 직접고용하되, 1심 계류 중인 노동자는 1심 판결 결과에 따른다. 1심 판결 결과까지는 임시직으로 일한다”는 내용이다. 2심 계류자와 1심 계류자를 분리시키면서, 조합원들을 갈가리 찢어 놓고 법적 판결만 기다리는 수세적 처지로 몰아가는 내용이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단칼에 거부했다. 쓰레기 안에 분노하며 동료를 버릴 수 없다고 결심한 톨게이트노조 조합원들 일부가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노동자들은 쉼 없는 투쟁에 지쳤지만 투쟁을 이어나갔다.

김천 본사 농성만으론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노동자들은 서울에서의 투쟁도 결의했다. 이강래를 넘어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를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승리의 열쇠는 정부와의 싸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7일 김현미, 이해찬 사무실을 점거했다. 광화문에 농성장을 차렸다. 노동자들은 계속 청와대 면담투쟁을 진행했다. 거의 매일 철벽을 뚫는 심정으로 경찰벽을 뚫기 위해 싸웠다. 연행을 각오한 투쟁이었다. 경찰은 도명화 지부장 연행 포함, 총 4번 노동자들을 연행하면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노동자들은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를 계속 확대했고 지금 20곳 이상의 사무실을 점거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줄기차게 연대와 집회에 참석했고 마사회의 비리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죽음으로 항거한 문중원 열사의 투쟁에도 열심히 연대했다.

 

 

3 [출처 필자].png

[출처: 필자]

 

 

내리막길에서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정부와 도로공사는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비정규직 투쟁의 중심, 아니 전체 노동자 투쟁의 중심이 된 톨게이트 투쟁이 미치는 영향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회사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계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강래는 후안무치하게 사표를 내고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 청와대는 사표를 수리해줬고 더불어민주당은 이강래를 총선 출마 적격판정 대상자로 선정했다. 이강래가 나온 정식교섭은 지난 12월 11일 한 번뿐이었다. 12월 6일 김천지원 불법파견 승소 판결에서도 2015년 이후 입사자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도로공사와 이강래는 갈라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2015년 이전 입사자만 직접고용하겠다는 기만적인 입장을 계속 내놓았다.

도로공사는 올해 1월 9일에도 2015년 이후 입사자들을 배제시키겠다는 입장을 전달하더니 도명화, 유창근 동지가 단식에 들어간 지난 1월 17일 기습적으로 사실상 똑같은 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2015년 이후 입사자도 일단 직접고용하되, 추후 판결에 따라 패소한 노동자는 직접고용을 해제한다는 내용이다. 노동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5년 이후 입사자 포함 전체가 직접고용되어야 한다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법원 판결이 아니라 투쟁으로 1,500명 직접고용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왔다. 혼신을 다한 투쟁으로 불법파견 승소를 이끌어냈고, 자회사 정책의 진실을 알렸다. 뜨거운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힘이 모자라 원래 요구의 상당 부분은 복귀 이후로 미뤄둔 상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연대했지만 이 투쟁의 중요성에 비하면 그 연대는 부족했다. 특히 톨게이트를 비롯해 자회사에 맞서 싸우고 있는 많은 사업장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민주노총의 지도력은 너무나 부족했다. 톨게이트 투쟁을 전체 노동자의 투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노동자운동의 지도력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점을 뼈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조합원들은 6개월 동안 모든 걸 바쳐 투쟁했다. 지친 게 사실이다. 12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교섭에 매달리면서 투쟁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가 함께 직접고용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투쟁하고 있다. 도명화, 유창근 동지의 단식이 계속되고 있다. 아직 투쟁이 끝난 게 아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거대 공기업인 도로공사의 온갖 탄압과 갈라치기를 뚫고 쉼없이 전진했다. ‘없어질 일자리’ 운운하며 자회사 정책을 밀어붙인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놀라온 투혼을 보여줬다. 비정규직, 가난한 여성, 장애인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변하며 대담하고 헌신적인 투쟁으로 직접고용 쟁취, 비정규직 철폐의 길을 열었다. 투쟁이 어떻게 끝나든 이 빛나는 역사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한 톨게이트 노동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민주노조를 몰랐다. 연대를 몰랐다. 처음 싸움이다. 누가 이렇게 싸울 수 있을 줄 알았겠는가? 도로공사 관리자들은 한 달이면 다 백기 든다고 우리를 비웃었다. 그러나 하나로 뭉친 노동자의 힘은 이처럼 강하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다른 노동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

 

 

 

※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투쟁의 공간을 농성장에서 현장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2월 1일 결의대회를 통해 싸움의 일단락을 지었습니다. 이 글은 1월 21일에 쓰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