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904] 노동현장의 심리적 위기상황과 대처 / 허윤제

by 철폐연대 posted Apr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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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노동현장의 심리적 위기상황과 대처

허윤제 (충남노동인권센터 노동자심리치유사업단 ‘두리공감’)

 

 

“고위험군은 언제 분류가 되나요?”

“빨리 업무에 복귀시켜야 하는데 언제부터 가능한가요?”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위기개입 과정에서 사측으로부터 가장 먼저 받는 질문들이다.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이 죽는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제대로 애도할 시간은커녕 그로 인한 심리적 충격에서 벗어날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 노동자들의 현재다.

 

내가 몸담고 있는 ‘두리공감’은 충남노동인권센터의 사업단으로서 노동자의 마음 건강을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한 심리치유사업을 하는 곳이다. 노동탄압, 해고로 인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노동자들이 술에 의지하고 동료나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해 두해 사업을 하다 보니, 곳곳에서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 그들 중 대부분은 업무 중 겪은 ‘외상사건’으로 인해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었다.

‘외상사건’이란 홍수‧지진과 같은 자연재난, 전쟁, 폭발, 화학물질의 유출과 같은 인적재난으로, 갑자기 예기치 않게 일어난 끔찍한 일로 인해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사건들을 말한다. 이런 외상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 신체적 또는 심리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는데 이때의 심리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를 ‘심리적 위기’라고 한다.

 

 

노동 현장에서의 심리적 외상사건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외상사건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태안화력 김용균 노동자 사망, 대전한화공장 폭발사고로 인한 노동자 사망과 같은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 또는 심각한 신체 손상의 경험 또는 목격이다. 최근 종종 일어나는 과로사와 사업장 내부에서의 자살도 이에 해당한다.

산업재해는 주로 사업장에서 안전시설이나 사전 안전조치의 미비로 인한 사고인 경우가 많다. 태안화력의 사고도 2인 1조 문제만이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위험한 현장임에도 안전보호 장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더욱 문제인 것은 노동 현장의 환경을 개선하지 않음으로써 반복적으로 비슷한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충남의 한 공장에서 한 노동자가 또 사고로 사망했다. 2010년 이후 이번이 세 번째 사망사고다. 세 번째 같은 사고가 이어지자 노동자들은 예전의 사고 장면이 자꾸 떠오르며 그때의 비명소리,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던 ‘살려 달라’는 목소리가 너무 괴롭다고 호소하고 있다.

 

두 번째 노동 현장의 외상사건은 노동탄압, 구조조정, 부당징계‧해고 등 조직에 의한 폭력, 고객이나 상사의 괴롭힘, 성폭력, 인격의 침해 등 언어적·심리적·물리적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노동자의 경제적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 존엄과 안녕을 해친다.

구조조정은 회사의 경영상 불가피하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한다. 직장 내 괴롭힘의 경우도 조직문화에 따라서 피해사실이 인정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며 회사가 가해자에 대해 징계 등의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 적극적이지 않고 은폐하거나 축소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에게 휴직을 권고하거나 심한 경우 가해자의 편을 들기도 해 2차, 3차의 피해를 낳기도 한다. 더욱이 상사의 지속적인 괴롭힘은 엄연히 폭력임에도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실체가 가려지기도 한다.

 

세 번째는 폐업, 파산, 부도로 인한 직장상실로 현재 한국 사회의 사회보장제도, 재취업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실업은 삶의 기반을 잃었다고 여길 정도의 커다란 불안을 초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심리적 위기의 증상들

 

외상사고를 경험하게 되면 다양한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심장박동수가 증가하고 혈압이 올라가며 불면이나 악몽, 두통이나 복통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식욕의 변화, 만성피로를 동반하기도 한다. 불안, 우울, 예민함, 죄책감과 수치심, 분노 등의 감정을 겪기도 하고 기억력 감퇴, 의사 결정의 어려움을 경험하거나 반복된 외상사건의 기억이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대인관계가 위축되고 활동이 감소하며 분노, 잦은 다툼, 알코올이나 약물 사용이 증가할 수도 있다.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의 자결은 장기간 투쟁을 했던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큰 슬픔과 분노를 일으켰다. 당시 자꾸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자신이 두려워 스스로 폐쇄병동을 찾아간 이도 있었으며 그 순간 함께 있어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하루 종일 분양소를 떠나지 못한 이도 있었다.

태안화력 사고 당시에는 사고 현장을 수습해야 했던 노동자, 같은 공정의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회사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이후 일하는 것이 무섭고 자꾸 사고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는 호소를 많이 했다.

상사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인해 업무 중 실신을 하고 결국 휴직을 한 상태로 두리공감을 찾아온 한 노동자는 대인기피, 우울, 분노를 경험하고 있었다.

 

 

2 2016.7. 유성기업의 가학 노무관리와 관련한 임시건강진단 시행 요구 1인시위 [출처 김형석(금속노동자)].jpg

2016.7. 유성기업의 가학 노무관리와 관련한 임시건강진단 시행 요구 1인시위 [출처: 김형석(금속노동자)]

 

 

위기개입과 심리적 응급처치

 

위기개입은 심리적 위기를 초래한 상황으로부터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인 안전을 확보하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재해로 인한 부상이 있거나 심리적 외상으로 인한 급성스트레스가 심한 경우에는 적절한 병원진료를 안내하고 △정서적 안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심리상담이나 이완방법을 알려줌으로써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외상사고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증상들에 대한 안내를 통해 자신 또는 동료가 경험할 수 있는 심리적 상태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작업도 중요하다. △다음으로는 지지체계를 확보하는 일이다.

노동 현장 외상사건의 많은 경우 법적 문제를 동반하곤 하는데 이런 경우 피해자와 생존자를 도와줄 법률전문가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안전을 위한 장소가 필요하기도 하고 진료를 위한 의료기관, 전문적인 심리상담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들도 필요하다. 이러한 지지체계를 모으고 적절히 배치하는 것도 위기개입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지지체계는 심리적 위기상황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회복하는 데 아주 큰 효과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당한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주고 아픈 것을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것이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증상은 외상사고 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만 모든 피해생존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며, 피해생존자는 모두 정신적인 문제를 겪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외상사고의 생존자로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때문에 생존자를 피해자로만 인식하고 문제 해결 과정에서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직장 내에서 괴롭힘이나 성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안전조치로 피해자를 휴직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막상 가해자를 징계하는 것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피해자가 직장에서 배제되거나 복직을 하려 해도 가해자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 2차 피해를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피해 보상까지의 전 과정에서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듣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그런 과정 자체가 피해자들의 심리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며 안전의 확보는 위기개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트라우마 예방을 위해

 

중대재해로 인해 다치거나 사망에 이르는 사건은 계속 발생하고 있다. 감정노동자들의 스트레스, ‘양진호 사건’과 같은 직장 내 갑질이라고 부르는 폭력 상황도 마찬가지다. 심리적 위기는 장기간 경험하게 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발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발생하는 상황에 비해 그 사건으로 인한 심리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관심이 적다. 그러다 보니 그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노동자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대한 산재신청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2017년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어 트라우마 대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대재해로 인한 사망사고 발생의 경우에만 한정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두리공감이 8년간 심리적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을 만난 경험과 여러 연구들을 바탕으로 ‘노동 현장의 심리적 위기대응 매뉴얼’을 만든 이유다. 아직은 위기상황과 대응에 대한 개괄에 불과하며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위기대응 매뉴얼을 잘 다듬어 훌륭한 매뉴얼을 만들고 위기개입이 정말 잘 이뤄진다고 해도 노동 현장의 위기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없이 계속적으로 외상사고들이 반복된다면 트라우마는 결코 예방될 수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