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910] 더 낮은 곳에서 모든 노동자와 함께, 녹산공단 이야기 / 김그루

by 철폐연대 posted Oct 1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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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정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전략과 실천

 

더 낮은 곳에서 모든 노동자와 함께, 녹산공단 이야기

김그루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녹산조직사업부장)

 

 

금속노조의 전략조직사업 대상지로 녹산공단 조직화사업이 선정되면서 2017년 12월부터 부산양산지부의 전략조직사업부장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출근길에 내가 탄 시내버스가 공단으로 진입하면서 창밖으로 철갑을 두른 듯한 공장들이 쫘악 펼쳐질 때면 늘 설레곤 했습니다. 꼭 해보고 싶었던 녹산공단에서의 조직활동! (아,,, 녹산공단 상근 1년 만에 더 이상의 설렘은…….)

녹산공단 전략조직화사업 3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슬로건도 하나 만들었습니다. “더 낮은 곳에서, 모든 노동자와 함께”. 대기업, 정규직, 남성, 정주민 중심의 노동조합에서 벗어나 영세한 작은 사업장, 비정규직, 여성, 이주민 등 소수자들과 함께하는 노동조합이 되겠다는 뚱뚱한 꿈을 담았습니다. 노동법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노동자들. 때론 노동자 아래에 있는 노동자들.

 

녹산공단과 주변 공단들은 1990년대 초 새롭게 조성되었고 지금도 새롭게 조성 중인 곳도 있습니다. 낙동강 하구와 진해 바다가 만나는 고요한 어촌마을을 흙으로 메우고 산을 깎아 반듯반듯한 공단이 되었습니다. 녹산공단은 조선기자재와 자동차부품 제조업 중심이다 보니 압도적으로 남성노동자가 많습니다. 타 공단에 비해 공단노동자들의 연령대가 높은 편이고, 이주노동자는 전체 6만 명 중 약 10%로 추산됩니다.

 

부산은 제조업이 꾸준히 쇠퇴해가는 도시입니다. 경남 지역이 생산기지가 되고 부산은 베드타운이자 소비도시화 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활동가는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전략조직화의 대상지가 꼭 녹산공단이어야 하나?”

부산에는 규모 있는 사업장이 거의 없고 녹산공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외로도, 타 지역으로도 가지 못한 영세한 소규모 업체들이 남아있는 것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그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고 봐집니다. 일자리를 바꾸어봤자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하고요. 부산 최대의 공단이자 열악한 소규모 사업장이 모여 있는 이곳이야말로 금속노조가 꼭 필요한 곳 아닐까요.

 

금속노조는 한국에서 대표적인 ‘산별노조’ 중 하나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금속산업 전반을 대표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내실 있는 산별교섭을 이뤄내려는 노조의 노력과는 별개로 실제 조합원들의 노동조건은 여전히 기업별로 구분됩니다. 게다가 영세한 사업장 노동자들은 금속노조 가입에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가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도 합니다.

 

“우리 회사는 너무 영세하고 작아서 노조 못 만듭니더.”

“회사에서 저 혼자만 노조에 관심 있는데 가입할 수 있능가예?”

“노조 가입하면 회사가 알게 되능교?”

“조합비 얼마나 합니꺼?”

 

1 공동식당 앞 선전전 및 직장내괴롭힘 실태조사 [출처 필자].JPG

공동식당 앞 선전전 및 직장내괴롭힘 실태조사 [출처: 필자]

 

 

공단에서 선전전을 할 때 받는 질문입니다. 더 낮은 곳에서, 모든 노동자와 함께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업장 단위에 갇히지 않고 지역 단위로 노동조합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관계없이 노조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이 쉽게 가입하도록 할 것입니다. 열악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함께 뭉쳐 권리를 찾고, 나아가 열악한 처지로 내모는 구조도 바꿔내는 힘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녹산노동자 희망찾기’라는 이름으로 수년째 지역의 여러 노동단체들과 정당이 함께 연대하고 있는데, 그 활동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다른 공단들도 공통적으로 진행하는 공단선전전은 저희들도 매주 점심시간에 공동식당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토요일 저녁시간에 공단마트 주변에서 이주노동자 선전전도 하는데 자주 하지는 못합니다.

매월 ‘공단노동자 산행’도 갑니다. 10~20명의 노동자들이 꾸준히 참가하고 있고 팀웍도 억수로 좋습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대해 우호적이지만 자신이 조합원이 되는 것에는 주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매주 일요일 이주노동자 한국어 교실도 엽니다. 퇴근 후 부산과 경남으로 흩어지는 정주노동자들과는 달리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은 공단에 남습니다. 한국어교실은 처음엔 한 개 반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입문반, 초급반, 중급반 3개 반이 있고, 수요가 있을 때는 자음모음반도 운영합니다. 하지만 한국어만 가르치기 위함은 아닙니다. 과거 야학하던 시절의 그 교실처럼 사회의 모순에 대해, 노동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깨닫는 시간이고자 하지만, 전혀 그리되지는 않네요! 그래도 노동교실 형태의 수업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체육대회와 1박 2일 캠프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합니다.

   

지난해 하반기 새롭게 시작한 활동들도 있습니다. 먼저 ‘공단노동자 퇴근길 한 잔’이라는 편안한 술자리 모임입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변호사도 함께해서 필요한 분들 노동상담도 진행합니다. 보통 공단노동자들은 “교육합니다, 상담합니다” 하면 잘 오지 않습니다. 술 한 잔 하자는 데에는 호응이 좀 있는 편이라 격월로 진행해왔습니다. 그런데 술 한 잔 하는 모임은 50~60대가 대부분이어서, 젊은 노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만나야 할지 고민이 좀 됩니다.

 

그밖에도 지하철 하단역에 판을 펴고 ‘퇴근길 노동상담’을 격주로 실시합니다. 평균 상담이 서너 명 정도인데 어쩔 때는 한 명도 없이 공치는 날도 있습니다. 퇴근길 노동상담은 공단노동자들의 편의성에 맞춘 것도 있지만, 평소 상담이 주로 전화상담이기에 대면상담을 통해 조직화 가능성을 모색해보자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직 특별한 성과(?)는 없지만, 올해 말까지 꾸준히 진행해보고 평가하려 합니다.

 

‘녹산공단 권리찾기 작은음악회’도 지난해 처음 시도했습니다. 점심시간 공단 내 공동식당 앞에서 게릴라 콘서트로 진행하고 공단행진도 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도였고 예산도 꽤 들였으나 노동자들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공동식당 아주머니께서 전하시길 “사람들이 너무 시끄럽다더라”, “음악소리가 커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카더라” 하셔서 쓴웃음을 지었더랬습니다. 공연 중일 때 바로 얘기를 좀 해주시지…….

   

올해는 신평공단 인근 지하철역 앞에서 퇴근시간대에 버스킹 느낌으로 진행해보려 합니다. 경직, 일사불란의 노잼 금속노조가 아니라 부드럽고 친근하고 경쾌한 느낌으로 다가가 보려고요. 그밖에 노동자 기타교실을 정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3기까지 진행했습니다. 다른 공단들 다 하는 카톡 오픈채팅 상담실을 저희도 열었고요.

 

녹산공단 전략조직사업 첫해인 지난해 저는 금속노조에 적응하느라 우왕좌왕하는 한편 기존 사업에 새로운 사업까지 더해지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업들을 늘어놓고 그것에 매몰되고 있는 건 아닌가, 사업은 많은데 조직화로 수렴되지 않는다” 녹산공단조직화대책팀(연대단위들)의 지난해 사업평가는 신랄했습니다. 그 평가에 격하게 동의했지만 다시 돌아가도 그 시기 저로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 같네요.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맡았더라면 더 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자학을 숱하게 하기도 했고요.

 

녹산에서는 아직 지역 단위의 노동조합 간판을 달지 못했습니다. 기존 노조활동가 몇 명이서 녹산지역지회 초동멤버로 일단 시작하자는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이곳 공단에서 일해온 사람, 일하고 있는 사람, 앞으로도 일할 사람과 시작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함께할 이들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사업에 매몰되고 있을 때 민주노총 서부산상담소에서 해고로 상담 받았던 두 사람이 금속노조 가입의사를 밝혔습니다. 녹산공단에서 일했던 이들은 3년 전 해고를 당했고 법적다툼 끝에 대법원에서도 부당해고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복직 후 회사는 한 명은 목포로 발령을 내려 했고, 다른 한 명도 원직이 아닌 시설관리파트로 배치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타협안을 가지고 일정한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회사 직원 380명 중에 2명. 지역노조를 고민하지 않았다면 금속 조합원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녹산공단 첫 조합원이 된 두 사람에게는 만화책 <송곳>을 선물했습니다.

 

두 조합원과 산행대장, 그밖에 두세 명 정도의 초동멤버를 주축으로 녹산(서부산)지역지회 준비위를 올해 안에 출범하려 합니다. 내년부터는 지역지회 이름으로 노동조합 함께하자는 걸 전면에 내세우고 파이팅 해야지요.

저는 요즘 부쩍 재미를 찾고 있습니다. 재미가 없으면 당최 몸이 움직이질 않더라고요.(나이 탓이 아니라!) 재미가 꼭 ‘깔깔깔’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알아가는 재미, 같이하는 재미, 새롭게 일구는 재미. 그런 재미 말입니다. 어쩌다 진지해지고 말았던 녹산공단조직화 3개년 계획의 슬로건에 하나 더 보태봅니다.

“더 낮은 곳에서 모든 노동자와 함께, 그리고 재밌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