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907] 68일 동안 슬쩍 들여다본 동유럽 / 권미정

by 철폐연대 posted Jul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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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서 지역에서 철폐연대 동지들은

 

68일 동안 슬쩍 들여다본 동유럽

권미정 (사회변혁노동자당 당원, 철폐연대 집행위원)

 

 

나는 세계여행의 꿈을 갖고 있었고, 2019년에는 가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1년 전부터는 “2019년에는 여행 갈 거야” 라고 널리 얘기해왔다. 그러나 여러 상황으로 인해 갈지 말지 생각이 많아졌고 고민 끝에 주변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2월 말에 상근활동을 정리했다.

푹 쉬겠다는 생각으로 떠난 여행이 아니었고, 목적에 비해 짧은 여행 기간과 언어 소통의 어려움으로 인해 부족함이 많았지만 많은 걸 보고 느꼈다.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을 보면서 경직성과 상상력의 빈곤도 떠올릴 만큼 생각하고 돌아보는 시간도 되었다.

 

 

도서관에서 시작된 여행

 

구 사회주의 나라들 중심으로 동유럽(실제는 중부 동부 유럽)을 가겠다는 생각만 했지 여행 계획은 세워놓지 않았다. 부랴부랴 3월 초부터 도서관에 도시락을 싸서 출퇴근을 하며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여행 경로는 다 정하지 못했지만 대부분 EU 회원국이고 서로 붙어 있으니 나라간-도시간 이동에 대한 걱정은 뒤로 미루고 싼 항공편을 먼저 찾아서 예매했다.

그리고 동유럽에 대한 역사책을 보고 블로그를 뒤지고 여행기도 읽고 팟캐스트를 듣다 보니 공부할 거리가 점점 늘어났다. 종교, 건축양식, 문화, 전쟁, 역사, 지리, ……. 아마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면 출발을 계속 미루면서 자료만 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보고 느끼려면 준비가 중요함을 여행 내내 느꼈다.

그렇게 나는 4월이 되기 전에 떠나겠다는 장담대로 3월 27일 체코에 도착했다. 그리고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8개 국가의 19개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6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 이제 화장실을 편하게 가겠구나’ 였다. 과거에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동유럽에서는 화장실에 갈 때 돈을 내야 하는데 얼마 안 되지만 그게 얼마나 아깝던지……. 그리고 한국 하늘을 보는 순간 ‘이제 맑은 공기와 하늘, 공원이 없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 여행은 동유럽을 제대로 알기엔 겉핥기였지만 강하게 남은 장면들이 있다(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아니다.).

 

 

담배, 개, 성당, 키스 그리고 장애인

 

흡연자 천국, 비둘기 세상, 한 집에 한 마리 이상의 개, 어디서나 성당과 키스 그리고 많은 장애인. 산책하고 길을 걷고 마트를 다니면서 든 생각이다.

실내 흡연은 많지 않지만 실외에서의 흡연은 당연한 권리라고 약속되어 있는 듯 서로 거리낌이 없다. 길을 걸으면서도 아이들과 같이 있는 곳에서도 담배를 피우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 옆에는 대부분 함께 다니는 강아지들이 있다. 그래서 공원에는 강아지 대변 봉투를 비치해둔 곳들이 많았다(구걸하는 이들의 다수가 강아지를 옆에 앉혀놓은 건 보기에 불편했다.).

그리고 성당은 도심의 중심에 있었고, 성당-교회-회당은 역사가 있는 관광지였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키스하는 사람들을 보는 건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과 달리 나의 궁금함은 길에서 자주 보게 되는 장애인들이었다. 호스텔 12인 혼성방에서도 혼자 자신의 나라를 여행하는 장애인을 만났다. 바깥 생활공간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만나는 경우가 적은 한국 사회와 달리 그곳에서 장애인은 일상에 늘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과 생활권이 최소한 한국보다는 보장되어 있고, 장애에 대한 인식이 한국 사회와는 다를 것이라 느껴졌다. 버스에는 유모차, 휠체어, 강아지, 자전거나 퀵보드를 위한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China-Japan-North-South?

 

여행자들끼리도 호스텔 스태프도 박물관이나 공연장에서도,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도 내가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은 “Where are you from?”과 “China? Japan?” 이었다. 두 질문이 끝나고 나서도 Korea라고 묻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내가 “Korea” 라고 대답하면 그 다음 질문은 “North? South?” 였다.

문재인은 몰라도 김정은은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남한보다 더 일찍 북한과 수교를 맺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북한 주민들도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놀라긴 했다. 여행 말미에는 첫 번째 질문을 받으면 그냥 “South Korea” 라고 말했다.

 

 

1 가스실로 가는 길, 오시비엥침 [출처 필자].jpg가스실로 가는 길, 오시비엥침 [출처: 필자]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남겨놓고 기억하는 것들

 

폴란드의 오시비엥침(아우슈비치는 독일식 표현이다.)은 유대인 학살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곳이 아니라도 동유럽 곳곳에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하는 인종) 학살에 대해 추모하고 반성하며 잊지 말자는 조형물과 공간 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파시즘에 맞섰던 투쟁과 민중의 저항에 대해 몇 개의 도시들에 기념관과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기념관 안에는 파시즘에 맞섰던 사회주의 세력들의 저항운동과 지원-연대투쟁도 함께 기록되어 있기도 했다. 그런 곳을 갈 때마다 8.15 해방기, 5.18 광주민중항쟁, 제주 4.3항쟁이 떠올랐다.

내가 다닌 곳들이 구 사회주의 국가들이라 여전히 사회주의 시대의 조형물이나 소비에트와 소련에 대한 기념비가 존재한다는 게 처음에는 신기했다. 소비에트 병사들을 위한 기념비, 소련 병사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오벨리스크, 민중들과 함께하는 소비에트 조각상, 붉은 군대를 기념하는 공원, 노동자 민중이 주인공인 광장의 시계,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감사함을 담아 세웠던 여신상, 남녀 주민과 소비에트 병사들이 기쁨을 나누는 벽화 등등이 도심에 남아 있었다. 남아있는 기념비와 조형물 들을 보니 그들에게는 파시즘에 대한 저항과 사회주의가 이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와 다른 동유럽 사회의 부러운 몇 가지

 

아름다운 경치와 깨끗한 공기와 하늘을 포함하여 부러운 몇 가지가 있었다.

 

쉴 수 있는 공원

동유럽은 도심 어디를 가도 공원이 많았다. 인위적 그늘이 아닌 나무그늘과 밟아도 되는 잔디가 있는 공원이었다. 햇빛 좋은 날 드러눕고, 지인들끼리 게임을 하고, 악기 연주도 하고, 강아지랑 친구랑 원반던지기 놀이를 하고, 가족들과 공연을 즐기는 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물론 이런 공원이 아무리 많아도 일하는 시간이 길면 무용지물이 된다.

 

일찍 문 닫는 마트와 앉아 있는 계산대 노동자

저녁에 먹을거리를 사러 갔는데 이미 문을 닫은 마트, 국경일과 주말이라고 3일을 휴업하는 마트와 가게들. 마트가 일찍 문을 닫을 거라거나, 휴일에 쉬는 개인가게나 마트를 생각하지 못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도심을 몇 바퀴 돌아 겨우 문을 연 작은 가게에서 오래된 바나나와 빵을 사기도 했고, 조각 피자로 두 끼를 때우기도 했다. 관광객이 많은 시내 한가운데 있는 빵집과 가게도 대략 저녁 8시~9시에 문을 닫기 시작했다.

마트 계산대의 노동자는 모두 앉아서 일을 했고 여유가 있었다. 웃어주지는 않지만 동전을 하나씩 꺼내서 계산하고 물건을 담는 이들을 모두 기다려줬다. 특히 나 같은 외국인이 돈을 지불할 때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짜증내거나 화내지 않았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 도대체 무슨 날이냐고 겨우 찾은 가게에 물어볼 정도였지만 부러운 시스템이었다.

 

 

2 베오그라드에서 맞이한 2019 노동절 [출처 필자].jpg베오그라드에서 맞이한 2019 노동절 [출처: 필자]

 

 

노동절의 유래와 역사를 알려주는 도서관

베오그라드에서 노동절을 맞이하고 다음날 다른 도시로 옮겨갔는데 노동절 휴가 기간이라고 이틀간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도서관 전시판에는 노동절의 유래와 의미에 대해 포스터 그림, 신문기사, 책의 일부 내용, 인터내셔널 회의 내용 같은 것들을 붙여놓았고, 그 옆에는 노동절에 대한 책도 같이 전시해 놓았다. 나는 아직까지 한국에서 노동절의 의미와 투쟁을 알려주는 관공서를 본 적이 없다. 이런 도서관부터 만들고 싶다.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그곳엔 문화는 모든 인민이 누려야 할 권리라는 기치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아카펠라 공연부터 다양한 악기를 볼 수 있는 거리공연이 있고 흥겨움에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고 팬터마임 공연도 많았다.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연극이나 오페라 등도 한화로 1만 원이 안 되는 돈으로 볼 수 있었다. 관청에서 여는 공연이 아니라 주민들이, 학교 공터나 성당 앞 공터에서 여는 동네콘서트도 많았다. 모든 사람이 악기 하나 정도는 다 다루는 것 같았다.

 

사람이 먼저

그곳에서는 차들이 멈춰줬다. 신호등이 없는 길, 횡단보도가 없는 곳에서 건너가려고 서 있으면 대부분의 차들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사람이 서 있으면 차가 멈추고 사람이 먼저 지나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는 다른 동유럽 도시와 달리 차가 사람을 위해 무조건 먼저 멈추지 않는다는 안내 문구까지 써놓은 관광지도를 받았다. 난 여행 마지막까지 그렇게 멈추는 차의 운전자들에게 묵례를 하며 감사함을 표시했다.

 

우리와 다른 집회 문화, 박스종이로 만든 피켓

나는 올해 노동절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맞이했다. 베오그라드에서 노동절 집회가 열린 곳은 국회 근처 삼성광고판이 있는 건물 광장이었다. 그 즈음 주말마다 세르비아 반정부시위가 벌어져서 안전을 기하라는 외교부 공지가 있었다. 그날의 연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인터내셔널가는 같이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5월 21일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바츨라프광장(광화문광장과 비슷하다)에서는 극우정치인이자 재벌정치인인 바비스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가 있었다. 작년 말부터 계속되고 있는 집회였다(집회는 6월 14일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 며칠 후 지구환경을 위한 집회가 프라하 천문시계광장 근처에서 열렸고 글로벌 가구기업인 이케아 반대가 외쳐졌다(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카르파티아 산맥의 자연림들이 불법적으로 매매되고 벌목되는 과정이 있었고 이케아도 주범기업 중 하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앉지 않았다. 힘들면 개인적으로 앉을 뿐이었다. 그리고 집회 주최단위가 준비한 건 무대와 집회 내용을 알리는 현수막과 A4용지에 인쇄한 흑백구호 손피켓, 배지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부러웠던 건 집회 참가자들이 각자 피켓과 현수막을 만들어서 참가했다는 점이다. 잡지나 신문에서 그림을 오려 붙인 피켓, 자신의 주장을 직접 쓴 피켓, 풍자 그림으로 꾸며진 피켓 등 다양했고 대부분 박스를 뜯어서 만들어왔다. 현수막도 직접 만든 것들이 많았다. 자발적으로 집회에 오고, 모두의 요구를 나의 요구로 재창조해서 표현한 촛불집회를 보는 거 같았다.

 

 

3 프라하, 지구환경을 위한 집회 [출처 필자].jpg

프라하, 지구환경을 위한 집회 [출처: 필자]

 

 

다음 여행을 다시 꿈꾸며

 

 

많은 것이 새롭고 풍경도 너무 좋고 부러운 점도 있었지만, 동유럽에 절도와 관광객 사기가 많다는 경험담을 보면서도 그걸 내가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잔돈을 안 주고는 줬다고 우기는 철도청 직원과 싸우기도 하고(한화로 50원이지만 액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마트에서 물건값을 두 번 지불하도록 계산하는 사기도 당했고, 샤워하러 간 사이 지갑을 통째로 도난당해서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고민에 빠지기도 했고, 불편한 시외 대중교통체계와 운영방식에 한탄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고, 경찰서도 가보고 한국대사관도 처음 찾아가봤다. 세르비아를 제외하면 유럽연합 회원국이라 국경 넘기는 좀 수월했지만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유로를 사용하지 않고 각국의 자기 화폐를 사용하고 있어서 7개의 화폐를 사용하느라 계산할 때마다 실수를 남발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다음 여행을 또 꿈꾼다. 그냥 쳐다만 봐도 예쁘고 행복하다 싶은 풍경과 건물과 장면 들은 많은 사진으로 남겨놨다. 메시지를 전하는 그래피티를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대학 근처에서, 다리를 건너다가, 골목에서 만나는 정치적 메시지를 보면 저절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여행을 더 재밌고 알차게 할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혼성 도미토리가 편하고 게다가 나는 여행 기간 내내 거의 외식을 하지 않고 빵을 주식으로 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해외입맛’임을 확인했다.

제일 아쉬운 건 말하고 싶은데 말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구글 번역기가 나의 외국어 실력보다는 나았지만 한계는 많았다. 레닌조선소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파시즘 저항운동을 기록한 전시물을 볼 때, 트램을 같이 탄 시민이 나에게 한국 정부에 대해 물어볼 때, 소비에트 병사를 위한 기념비 앞에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소비에트 병사였다고 말하며 그곳을 알고 온 나에게 고맙다고 하는 유가족을 만났을 때, 유럽연합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집회에 갔을 때……. 아, 그때는 정말 한국 영어교육을 탓하게 됐다. 정말 정말 말을 하고 싶었다. 지금 나는 빨리 더 나은 앱이 나오길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

 

 

4 어느 동네 페스티벌에서 [출처 필자].jpg어느 동네 페스티벌에서 [출처: 필자]

 

 

마지막으로, 내가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떠난 지 보름 뒤에 소식을 묻는 동지들을 통해 선박사고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체코에 있어서 사고 소식을 보지 못했지만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안전벨트 자체가 없는 버스를 자주 타면서 걱정했던 일이기도 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