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1905] 586일 파업의 그늘을 딛고 새로운 시작, ‘상상인증권지부’ / 김호열

by 철폐연대 posted May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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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에서 지역에서 철폐연대 동지들은

 

586일 파업의 그늘을 딛고 새로운 시작, ‘상상인증권지부’

김호열 (사무금융노조 상상인증권지부(구 골든브릿지투자증권지부) 지부장, 철폐연대 회원)

 

 

지난 3월 29일 오전 10시 충정로 골든브릿지빌딩 강당에서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의 주주총회가 열렸다. 작년 2월 (주)상상인이 (주)골든브릿지와 (주)골든브릿지투자증권 경영권의 양수도계약을 맺은 지 1년여 만에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의 경영권을 공식적으로 인수하는 주주총회였다.

이날 총회에서 이상준 회장이 선임한 경영진들이 이사회에서 물러나고 상상인 측에서 선임한 경영진들이 취임하였으며, 회사명을 (주)골든브릿지투자증권에서 (주)상상인증권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골든브릿지 이상준 회장이 우리 회사를 인수한지 13년 6개월, 우리가 파업투쟁을 벌인 지 7년 만에 이상준 회장과의 결별이 이루어졌다.

 

기나긴 파업과 파업 이후 고난의 시간이 너무나 길어서 그런지, 마지막 1년 경영권 매각 과정의 반전과 우여곡절이 많아서인지 덤덤할 뿐 나는 감흥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인수자인 (주)상상인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적어서 불확실성이 주는 막연한 불안감마저 더해졌다.

그러나 ‘탈(脫)이상준’, ‘탈(脫)골든브릿지’는 기나긴 파업투쟁의 진정한 종결이자 승리라고 이야기해주는 조합원 동지들과 금융업종에서 이상준보다 더 나쁜 자본을 만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불안을 덜어주는 동지들을 보며 다소간의 기쁨과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파업 때부터 모회사인 골든브릿지와 그 대주주 이상준은 사채에까지 의존하는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렸고, 많은 조합원들과 이해관계자들은 우리 회사의 매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해왔다. 실제 증권시장엔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의 매각설이 파다했고 언론에도 매물로 늘 언급된 데다, 회사도 몇몇 인수의향자를 접촉한 정황이 있어 짧은 시간 안에 매각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기대에 지치고 지쳐 매각가능성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기로 작심하고 오래지 않아 매각이 현실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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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6. 골든브릿지투자증권지부 파업투쟁 500일 문화제 [출처: 참세상]

 

파업으로는 국내 최장기였던 586일의 파업 투쟁은, 그 기간 다른 모든 어려움을 제쳐두더라도, 평범한 가장이거나 생계 노동자들인 조합원들이 그 긴 시간 동안 무임금의 대책 없는 생활고 속에서 불확실성과 불안과 분노에 맞서야 했다는 것만으로도 고통 그 자체였다. 온전한 승리로 파업을 마무리하지 못한 탓에, 파업 이후에도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합원에 대한 부당노동행위로 자행된 대규모 부당전보, 부당대기발령, 부당징계, 실적을 빙자한 갑질과 인권 유린에 조합원들은 주체 못할 분노로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겪었다. 소송만 수십 건에 달했고 뇌출혈 등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쓰러져간 조합원들이 속출했다. 파업 종료 시 깎인 임금 탓에 조합원들의 생활고는 여전했고 파업 당시 무임금으로 인한 빚더미에 허덕였다.

일부 조합원은 생계를 위해 투잡으로 심야노동을 하기도 했고, 생계를 위한 투잡 생활이 사측에 인지되어 징계 위협을 받기도 했다. 반면에 부당노동행위를 버티다 못해 퇴사한 조합원이 발생하는 경우 관리자와 임원들은 거액의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회사 매각의 막바지엔 유상감자 등으로 회사를 망친 임원들이 거액의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도덕적 해이까지 판쳤다.

 

조합원에게 직접 부당노동행위와 인권 유린의 가해 행위를 자행했던 자들은 처음엔 이상준이 데려온 변절한 운동권 출신 용병들이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변절한 조합원이나 동료, 선후배 들이 가해자의 자리를 채워나갔고 조합원들의 참담한 분노는 더 가혹한 고통으로 나타났다. 식민지 시대가 속절없이 길어지면서 변절하는 자들이 늘고, 변절자들의 적극적 친일 행위와 동족 탄압과 착취가 난무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파업 이후 맺은 단체협약을 재차 해지하고 지부장인 나와 부지부장에게도 업무복귀명령과 부당전보를 자행하고 1시간 단위로 행적과 업무 보고를 요구하고 모욕을 일삼았다. 저항할 때마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날아오는 징계경고장에 맞서 관리자와 설전을 벌이고 고소·고발을 주고받았을 정도이니 평조합원들에 대한 탄압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그 관리자는 파업 당시 열성적으로 투쟁한 조합원이었고, 파업 중 몸짓패 ‘몸치탈출’에도 참여하였던 자였으나 변절 후 임원이 되어 조합원들에게 칼을 겨누고 난도질하였다.

이상준 회장은 모멸감과 고통을 주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조합원들의 신상과 약점을 잘 아는 변절자들과 동료, 선후배를 가해자로 활용한 것이다.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거침없었고 배신자와 부역자들을 적극 활용해 정교하게 조합원들을 해고로 몰아갔다.

 

새로운 대주주 (주)상상인은 인수계약을 맺기 전 최장기 파업투쟁의 전력이 있고, 회사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던 노동조합 때문에 인수를 망설였고, 다른 증권사 매물을 저울질하였다. 그러던 차에 경영권행사에 제약이 되었던 ‘노사공동경영약정서’를 해지할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타진해왔다.

우리는 딜레마에 빠졌다. 노사갈등으로 형식만 남은 상태였지만, 노사공동경영약정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자본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와 이상준 회장과의 결별 없이는 이미 망가진 회사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대주주 변경의 절박함 사이의 고민이었다.

수차례의 운영위원회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했고, 약정의 당사자인 우리사주조합원들의 결정에 따르자는 취지에서 우리사주조합원 총회를 개최하였다. 노조원이 다수인 우리사주조합원 총회는 85%의 찬성으로 이번 인수계약에 한하여 노사공동경영약정을 해지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사실상 (주)상상인으로의 인수와 이상준 회장과의 결별을 선택하였다.

 

우리사주조합원 총회의 결정으로 이상준과의 결별은 기정사실이 되는 줄 알았지만 이후의 과정은 반전과 곡절의 연속이었다. 내외부의 매각 반대세력이 적극 움직였고, 허가권자인 금융감독원도 검증되지 않은 자본인 (주)상상인의 증권업 진출에 회의적이었다. 여기에 일부 언론과 보수야당 정치세력까지 가세하여 금융감독원의 허가를 막고 나섰다. 금융감독원의 허가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1년 가까이 지연되면서 매각은 다시 불투명해지기 시작하였다. 금융감독원의 불승인으로 매각 불발 시 회사 청산과 정리해고, 추가적 유상감자 등을 감행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러던 중 (주)상상인은 금융감독원의 인허가 심사 전망이 불투명해지자 작년 말에 전격적으로 인수 포기를 공식 선언하고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에 통지까지 하였다.

 

대주주 변경을 확신하고 기대해왔던 조합원들과 회사와 비조합원들까지 다시 격랑에 휩쓸렸다. (주)상상인으로의 대주주 변경은 조합원 총회의 결의였기에, 그리고 대주주 변경 없이는 조합원들도 견디기 힘든 상황에다 회사는 더 이상 지속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나는 본격적으로 상상인과 접촉했고, 인수포기 의사를 철회하도록 설득해야만 했다. 인수 절차가 낙관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에 상상인과의 몇 차례 면담을 통해 조합원과 비조합원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의사,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가 그룹의 모토라는 것, 회사 정상화를 위해 노동조합과 적극적으로 대화하겠다는 의사를 직접 들은 바 있었기에, 그것이 온전히 실천될지는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골든브릿지보다는 낫겠다는 느낌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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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감독원 앞 노조 피케팅 [출처: 필자]

 

(주)상상인의 인수포기 의사가 철회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대 금융감독원 투쟁에 나섰다. 기자회견과 한겨울의 집회, 그리고 운영위원들 중심의 피케팅이 이어졌고, 금융감독원장과의 면담을 통해 (주)상상인의 인수를 승인하겠다는 입장을 받기에 이르렀다.

대주주 변경이 공식 확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새로이 경영권을 인수한 (주)상상인의 대표이사가 노동조합 사무실을 방문하였고 회사의 정상화와 성장,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로 가기 위한 비전을 설명하였다. 신임 대표이사가 노동조합 사무실을 방문하여 인사하는 것이 증권업계에서는 일상화된 관행이지만, 골든브릿지투자증권에서는 놀랍고도 상징적인 변화였다.

 

아직 대주주가 변경된 지 보름 남짓 지난 상황이어서 가시적인 변화는 없다. 조합원들을 지배하는 불안과 분노가 잠시 멈춘 것과 조합원 수가 늘어 과반수 노조의 지위를 회복했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라 할 수 있겠다.

워낙 오랜 시간 자본의 거짓말과 탄압에 맞서 싸워왔기에 어떤 좋은 말과 비전도 솔직히, 마음을 놓게 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마음을 편히 하기엔 상당한 치유와 망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마음을 편히 가질 기회가, 기대와 달리 전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안을 줄이는 그나마 나은 길은, 선한 자본에의 기대가 아니라, 단결과 투쟁을 실천할 의지와 준비가 늘 돼 있는 조합원과 노동조합뿐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새로운 대주주와 전체 직원 간의 감담회가 있었다. 새로운 대주주는 비전과 방침을 제시했고, 직원들은 그 비전에 공감했고 진정성도 느껴진다는 평이었다. 나는 회사의 정상화에 대한 희망과, 아직은 낯선 대주주와 경영자에 대한 긴장감이 교차하였다.

다음주에는 조합원 총회가 개최된다. 공교롭게도 총회일이 파업투쟁 이후 7년째 매년 조합원들이 모여서 기념해 온 파업출정식 일자와 인접해 잡혔다. 우리는 무엇을 공유하고 결의하게 될까…….

 

 

추신 앞으로의 운명을 아직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4월 하순 조합원 총회를 통해 사무금융노조 증권업종본부 ‘상상인증권지부’로 이름이 바뀔 우리 골든브릿지투자증권지부가 최장 기간의 파업투쟁을 거쳐 지금까지 투쟁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연대자들과 활동가들의 힘이 컸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