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12] 소성리를 보여주고 싶어요 / 손소희

by 철폐연대 posted Dec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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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소성리를 보여주고 싶어요.

 

손소희 • 철폐연대 회원

 

 

 

나는 지금 사드반대 성주 주민으로 살고 있다. 사드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소성리에서 한반도를 전쟁연습장으로 만들지 말라며, 사드배치 절대 안 된다고 외치고, 나의 최소한의 생존활동을 위해 농촌사회의 일용직 노동자로 일한다. 페이스북은 내가 사는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었고,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내게 들려주는 작은 매개체였었다.

어느 날 밀양 송전탑 건설공사를 반대해왔던 도곡마을 주민인 김말해 할머니의 부고 소식이 올라왔다. 나도 언젠가 얼굴을 한 번 뵌 적 있었던 분이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김말해 할머니를 회상하는 글과 사진을 올렸고, 밀양의 싸움은 다시 회자되는 듯 보였다. 그 중에 아주 짧은 영상이 한 편, 두 편 올라와서 내 눈길을 끌었다. 김말해 할머니의 방에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찍은, 세상에 선보이지 못했던 서랍 속의 영상인 듯 보였다. 어떤 건 작품이라 느껴질 만큼 구성도 좋고, 화면도 아름다웠다. 송전탑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과 주민들을 막아선 경찰들 사이 실랑이 속에도 젊은 것들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전해지는 구수한 사투리와 온정이 느껴지는 몸짓이 영상 속에서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소성리도 사드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4년 동안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사드장비나 공사장비가 들어갈 때면 경찰병력 수천 명이 마을을 짓밟았다. 우리도 가만히 당하지 않고 쇠붙이 격자에 몸을 넣고 그물을 둘러싸서 경찰이 끌어내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저항했다. 소성리 팔순 할머니들이 앞장서서 시간을 벌어주고, 할머니 뒤에 줄을 선 우리 젊은 주민들과 전국에서 달려온 평화지킴이들이 자신을 던졌다.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군사장비의 이동을 위해 마을길을 열어주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싸웠다. 그럴 때면 경찰 폭력에 우리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지난 5월 28일부터 29일 무박 2일에 걸쳐서 군대와 경찰이 합동으로 소성리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듯이 업그레이드 된 사드장비를 소성리로 추가 반입했다. 경찰병력이 8,000명은 족히 되어 보였지만, 언론에서 4,000명이라고 알렸다. 100여 명의 주민들과 평화지킴이들은 경찰병력에 저항해보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경찰병력은 밤새 통행을 차단하고 주민들을 고착시켜 밤새도록 감금했다. 해가 밝아 출근을 해야 할 사람도 길을 열어주지 않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생리적인 현상을 억압당해 고통 받았다. 급기야 한 여성은 도로 한복판에서 담요를 둘러싸고 볼 일을 봐야 하는 수치와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밀양의 모습도 소성리의 모습도 닮아 있었다. 김말해 할머니 영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우리의 투쟁을 영상으로 담고 싶었다. 그냥 핸드폰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가 사라지는 영상 말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기록으로서 영상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8 살아가는 이야기01.jpg

소성리에서 최고의 열매가 되고 싶었다. 정직하고 부지런한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열매를 맺고 싶었다. 비록 금 가고 색 바랜 열매라도 맛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면서 소성리의 열매를 고집했다.

나는 내가 아름답다는 것도 안다. 소성리에서 주는 사랑을 먹으면서 아름다운 열매가 되어가고 있다. 최고의 열매가 되려면 내가 더 많이 나를 사랑해야겠다는 걸 깨닫는 요즈음이다.

나와 나의 이웃들, 동지들, 사랑합니다. [출처: 글_페이스북 ‘열매’ / 사진_고미]

 

간절한 마음이 내게 용기를 불어넣었나 보다. 김말해 할머니의 살아생전 찍은 영상을 올린 분은 페이스북 친구이긴 하지만, 일면식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사이이고 막연하게 그가 영상촬영을 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왠지 내가 도움을 청하면 도와줄지도 모르겠다는 한심한 생각을 했다.

 

나는 그에게 쪽지를 보냈다. 영상에 관한 도움을 받고 싶다고 전했다. 정말 막연했다. 그는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이 친절하게 내게 반응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싸우는 사람의 위치가 아닌 기록하는 사람으로 영상을 남기고 싶다고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영상은 글쓰기와 완전 다른 것이어서 당신이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는 나를 돕겠다고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대구영상미디어센터에서 카메라를 장기 대여할 수 있게 애써주었고, 성주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 카메라 작동법을 가르쳐 주고, 내가 촬영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었다. 그는 밀양에서 ‘즐거운 나의 집101’ 다큐영화를 연출한 련 감독이다.

순식간에 내 손에 카메라가 쥐어졌고 그날 밤 나는 소성리 마을회관으로 달려갔다. 밤마다 소성리 할머니들과 사드철회성주대책위 위원장님이 회관 마당에 모여서 야간시위를 한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가가자 모두 호기심 어린 눈빛과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이제 감독 데뷔하나?” 하며 내게 농담을 걸었다. 나는 한 술 더 떠서 베를린 영화제 갈 거라고 떠벌였다. 카메라 돌려줄 때까지 열심히 찍어야 하니까 내게 잘 협조해달라고 당부하자, 할머니들은 모두 알았다며 예쁘게만 찍으라고 웃어준다.

 

나의 영상촬영이 시작되었다. 급히 카메라가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성주경찰서의 폭력 만행에 항의하며 경찰서로 쳐들어간 사건이 있었고, 돌발상황이 발생했었다. 성주경찰서는 평소 부녀회장님을 내사하던 중에 좋은 건수를 건졌다는 듯이 특수공무집행방해로 소성리 부녀회장님을 피의자 신분으로 만들었다. 경찰서로 출석을 앞두고 있었다.

 

소성리 부녀회장님이 경찰서로 출석하는 날, 아침 일찍 부녀회장님 댁을 찾아갔다. 집을 나서는 장면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이동하는 차안에서 인터뷰도 하고, 경찰서에서 변호사를 만나 상담하는 장면도 빠짐없이 찍으려고 내 발은 분주했다. 부녀회장님이 조사받으러 들어가는 지능수사과 문이 닫힐 때까지 카메라로 촬영을 하자 형사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우리 측 변호사는 “소성리TV에서 촬영 나왔습니다”며 재치 있는 대답도 해주었다.

 

내가 열심히 촬영하면 련 감독이 멋진 영상을 만들어줄 거라 기대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촬영했다. 위에서 찍고, 아래서 찍고, 옆에서 찍고, 가까이서 찍고, 멀리서 찍고, 내가 봐도 얌전하게 지긋이 찍는 법이 없다. 요랬다 저랬다 변덕이 죽 끓듯이 끓었다. 련 감독은 고기를 잡아주지 않고,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었다. 영상편집 기술을 과외로 가르쳐주었다. 몇 가지 기술을 배우고 소성리 부녀회장님 경찰서 출석하는 영상 편집을 시작했다. 짜깁기한 영상을 련 감독에게 보여줬더니 황금가위손으로 잘라내고 들어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혼자 힘으로 할 실력은 못 되어서 련 감독의 도움을 받아 처음 영상편집을 해냈다. 편집기술 이것저것 사용하면서 영상을 만들어보니까 괜히 신기하고 신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상을 쳐다보고, 잘라내고, 붙여댔다. 휴대폰에서 공간만 차지하고 있던 영상들을 꺼내서 수술을 했다.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질 때마다 잘하든 못하든 내가 만들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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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7. 사드기지 정문에서 사드 가고 평화 오라 노래를 불렀다. 우렁차고 당당한 내 목소리에 내가 반해서 황홀한 순간. 나 소프라노 가수 된 줄. 날마다 노래 불러야지.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출처: 글_페이스북 ‘열매’ / 사진_사드철회 상황실]

 

한참을 재미나게 촬영하고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렸다.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졌다.

소성리 할머니의 노래패 <민들레합창단>에 부탁해서 사드기지 정문 앞에서 노래공연을 했고, 나는 실컷 촬영을 했는데, 편집의 벽 앞에서 꼼짝을 못하고 서있었다. 그냥 노래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리의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니니까. 내 실력은 일천해서 내 생각대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드로 맺은 동지애로 끈끈한 우리의 투쟁과 슬픔, 기쁨의 날들을, 우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졌다.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련 감독에게 내 마음을 수줍게 고백했다. 소성리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나는 할 자신이 없고, 당신이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그는 내가 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다면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곁에서 도와주겠다는 약속도 해주었지만, 나는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몇 번의 ‘삼고초려’ 끝에 련 감독은 나와 공동 연출하는 것을 조건삼아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일단 련 감독이 수락했으니 첫 단추는 잘 꿰맨 셈이다. 그리고 소성리 수요집회와 김천촛불이 재개되자 소성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을주민들과 얼굴을 익히고 자주 만나면서 거리를 좁히고 있다.

 

소성리로 ‘알박기’ 한 사드철거 투쟁 5년을 맞이한다. 때론 치열하게 싸웠다. 때론 고독한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시간을 버텨내는 것도 투쟁이더라. 버텨낼 수 있는 재간이 없으면 떠나고 멀어지더라. 나는 붙잡고 싶었다. 그 시간을 붙잡아 둘 수 없어 영화로 기록하고 싶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나는 동지를 만났다는 것에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우리도 견뎌내고 버텨내면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 되지 않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