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308] 나에게는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 / 정로빈

by 철폐연대 posted Aug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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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나에게는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

 

 

정로빈 • 철폐연대 회원, 노동당 당원

 

 

 

내가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다. 친구들과 일자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런 기술도 자격증도 없는 우리가 원하는 일자리는 별다른 지원요건을 요구하지 않고, 개강하기 전 방학에만 단기로 잠시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쯤 쿠팡 물류센터가 인천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지어진 인천4센터는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알맞은 일터였다. 그렇게 입학하기 전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나가지 않는 기간에는 쿠팡으로 일을 하러 나갔다.

 

방학 때만 일을 하다 보니 가장 더울 때와 가장 추울 때 일을 하게 되었다. 물류센터 1층에는 하역을 위한 도크가 뚫려 있기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한다. 그래서 다들 여름이면 1층에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다른 층은 여름에 너무 더워 상품을 적재하는 랙 사이로 다시 들어가는 게 꼭 무슨 갱도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반대로 겨울이 되면 다들 1층을 기피했다. 바깥 영하의 온도에서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층에서 일할 때면 장갑을 두 개씩 끼고, 장갑 사이와 신발 안에 핫팩을 넣고 일을 했다. 그마저도 추위를 피할 수 없어 가끔가다 한 번씩 화장실에 가서 손발에 핫팩을 감싸 제대로 녹여야 했다.

 

회사가 일용직한테는 정해진 공정, 정해진 층, 정해진 업무 없이 아무 일이나 시켰다. 강도 높은 일이나 극단적인 온도도 힘들었지만, 견디기 힘든 것은 나 같은 일용직에 대한 계약직들과 관리자들의 폭언과 일상적인 명령조 어투였다. 관리자들이야 ‘원래 저런 놈이니 회사에 붙어 있겠지.’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계약직들이 일용직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면 누가 조장한 것도 아닌데 우리끼리 고용형태로 급을 나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 좋았다.

 

출근하고 퇴근하기 전까지 현장에 있던 그 모든 시간 동안에는 내가 노동당 당원이건 사회주의 운동에 뜻을 두었건 다 무용한 일이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써 달라고 매달리는 처지였다. 처음 다니고 첫해만 해도 ‘나중에 이런 데를 조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해 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긴 안 돼.’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 감아 버린 곳이었다.

 

그런 쿠팡 물류센터에 노동조합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궁금했다. 어떤 사람들일까. 현장 노동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내가 일하던 인천4센터 앞에서 집회를 한다고 해서 갔다.

 

정말 익숙한 건물 앞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 쿠팡물류센터지회’ 깃발이 있었다. 노조 깃발은 수없이 많이 봤는데도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너무도 익숙한 투쟁가, 어느 집회에서나 숱하게 외쳤던 구호였다. 그날은 뭔가 달랐다. 돈을 벌게 되고 나서부터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했던 곳에서 외치는 구호는, 분명 뭔가 달랐다. 그건 나의 이야기였고, 내 일터의 이야기이자, 내 친구들의 이야기였다. 학교 다니면서 나는 내가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고 내 현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쿠팡 물류센터가 내 현장이었다.

 

 

8. 본문사진.jpg

2021.06.07. 쿠팡물류센터 노동조합 출범 기자회견. [출처: 쿠팡물류센터지회]

 

 

마침 각각 사회주의 노선 강화와 사회주의 대중화를 모색하던 두 당이 합친 시기였다. 노조에서도 인천센터 간부들이 해고되어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노조활동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도 졸업을 한 시점이었다. 쿠팡 물류센터 현장에 들어가서 함께 노동조합 활동을 해 볼 생각 없냐는 제안이 들어 왔다. 하고 싶었다. 이미 저번 집회에 참석한 뒤, 다른 곳이 아니라 내가 땀 흘려 일한 곳, 쿠팡 물류센터에서 사람들을 조직하고 투쟁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함께하겠다고 답했다.

 

먼저 일용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순진하게 아무 준비 없이 계약직으로 지원했다가 신분이 탄로 났기 때문이다. 구글에 내 이름을 치면 내 활동 증거들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계약직으로 입사 지원을 하였다(지금은 다 내려 달라고 했다). 정말 웬만하면 입사할 수 있는 계약직 지원에서 떨어지더니, 바로 면접 다음 날부터 일용직으로도 채용되지 않았다. 인사팀이 계약직 지원자에 대해 검증을 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사실 그때 이만저만 상심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들어가고 싶었다. 이 시기에 이 길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혹시 몰라 인천 안에 있는 쿠팡 물류센터 중 각기 다른 센터, 각기 다른 공정, 각기 다른 출근조에 지원을 해 봐도 채용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쿠팡 현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는 길은 포기해야 했다.

 

활동 목적을 물류센터 조직사업으로 넓히기로 했다. 다음 타깃은 마켓컬리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냉동창고는 일당 5,000원 더 준다길래 지원했던 게 화근이었다. 냉동창고 근무 환경에 대한 설명도, 방한복과 방한화 지급도 없었다. 손과 발이 얼어붙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데, 다들 계속 일하는 걸 보고 ‘여긴 원래 그런가 보다.’ 했다. 현장에 들어오기로 했으니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일했다.

 

“추운 이유는 일을 느리게 해서 그런 거니, 물량을 빨리빨리 빼면 춥지 않다”는 관리자의 말이 기억난다. 다음 날 발의 피부가 심하게 상하여 응급실에 갔다. 2도 동상이란다. 공상처리 제안을 거절하고 산재신청을 했다. 그 뒤로는 채용되지 않았다. 경과가 길었지만, 결국 현장에 들어가서 물류센터 노동자들을 조직한다는 길을 접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물류센터 조직사업에서 역할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물류센터 조직사업은 공공운수노조의 전략조직사업이었고, 전략조직팀에서 물류센터 조직사업을 담당할 신규활동가를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동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주어진 기회에 대해 고민한 결과, 물류센터 조직사업에서 노조 상근활동가로 역할을 다하자고 결정했다.

 

노조 채용 과정은 여러모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시간제한이 있는 서술형 필기시험도 있었다. 사회주의자나 당원으로서 노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는데, 면접에서는 반대로 노조가 정당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 당적을 두고 당이 먼저냐, 노조가 먼저냐는 질문도 있었다. 솔직한 답을 드릴 수는 없었다.

 

노조는 당과 여러모로 달랐다. 동지라는 호칭이 아니라 직책으로 부르고, 상급자라는 말을 사용한다.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관점도 달랐다. 노조 일정은 어찌 되었든 단체교섭 중심이고, 공공운수노조 특성상 여러모로 공공기관 정규직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현장에 대한 관점이다. 전에는 주변에서 “현장도 모르면서 뭘 한다고”라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 오니 주변에서 “굳이 현장을 알아야 하느냐”라는 말을 듣는다. 그래도 무사히 공공운수노조 물류센터전략조직사업 담당자로 배치되었다.

 

“난 활동가가 아니라 노동자로 살 거야.”

 

몇 달 전까지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하고 다녔던 말이다. 활동가와 노동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나는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사는 것이 내가 갈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주 가깝진 않겠지만, 그리 멀지도 않아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전에라도 스스로 생계형 활동가라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거나, 조합원들이 힘들게 일해서 내는 조합비가 활동비가 아닌 임금으로 여겨진다면 언제든 상근을 그만두고 현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노조 상근자로서 아직 배울 것이 많다. 그래도 어떤 것은 배우거나 바꾸지 않겠다는 몇 가지 다짐을 했다. 관료화되지 말 것. 현장지향성을 잃지 말 것. 무엇보다 잠깐 떠나온 것뿐이니,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