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308] 아프면 쉴 권리, 유급병가 / 김혜진

by 철폐연대 posted Aug 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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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쓰는 비정규운동

 

 

아프면 쉴 권리, 유급병가

 

 

김혜진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1. 아프면 쉴 권리 : 법정 유급병가가 없는 현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사회에서 ‘아프면 쉴 권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2016년 메르스,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인해 정부는 아플 때 노동자들이 입원하거나 격리되는 동안 유급휴가를 보장하고 그 비용을 지원했다. 이때 만들어진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감염병으로 인한 유급휴가 중에는 해고하지 못하거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국가가 유급휴가 비용을 지급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이미 아플 때 치료받고 쉴 권리의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감염병 상황 외에도 업무와 관련한 부상과 질병(산재)은 요양을 위한 해고금지 조항이 있고, 산재보험을 통해 치료에 필요한 요양급여, 일하지 못한 기간에 대한 휴업급여가 지급된다. 그런데 노동자는 다양한 이유로 아플 수 있다. 산재 인정이 안 되거나 혹은 업무 이외의 사유로 아프면 그 노동자는 생계와 고용 모두가 불안해진다. ‘법정 유급병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아프거나 다쳐도 참고 일하거나 충분히 치료받지 못한 채 일터로 복귀해서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고용을 유지하지 못한 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유급병가는 아파서 치료를 받는 동안 기업이 임금을 지급하고, 그 기간 동안 해고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법정 유급병가가 없고, 일부 기업에서만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으로 보장한다. 고용노동부의 2020년 병가제도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민간과 공공사업장 2,500곳 중에서 병가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사업장은 21.4%였다. 1,000인 이상 사업장은 96.7%, 5인 미만 사업장은 12.9%였다. 병가제도가 있더라도 유급인 경우는 병가 도입 사업장의 63.8%였고, 평균 지급 기간은 25.5일이었다. 공무원과 교원은 감염병에 걸리면 연 60일의 범위에서 유급병가를 받을 수 있고 장기요양이 필요할 때에는 1년 휴직이 가능하다.

 

2. 불안정노동자들은 보장받지 못하는 아프면 쉴 권리

 

작은사업장 노동자들이나 불안정노동자들은 유급병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아래는 사회공공연구원의 이슈페이퍼에서 분석한 자료로서 법적 규정이 없는 유급병가가 불안정노동자들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구분

고용형태

종사상 지위

근로시간

정규직

비정규직

상용직

임시직

일용직

시간제

전일제

유급휴가

76.2

29.6

72.3

28.8

5.2

16.8

64.8

유급병가

59.5

18.7

55.5

18.1

2.7

10.7

49.2

* 자료 : 한국노동패널 21차년도(2018) 자료에서 종단면 개인 가중치 적용.

* 무응답은 대체하지 않은 값임.

* <출처> 이재훈, ‘외국의 유급병가, 상병수당 현황과 한국의 도입 방향’, 사회공공연구원 이슈페이퍼, 2020.2.

 

 

이처럼 불안정노동자들은 아플 때 쉴 권리를 보장받기 어렵다. 유급병가가 없으면 노동자들은 우선 연차를 사용하여 치료를 할 것이다.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연차를 쓰는 것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치료 기간이 길어져서 연차를 넘어서게 되면 개인 사정에 의한 결근으로 처리하여 월급이 깎이는 것을 감수하고 치료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치료 이후에 다시 복귀할 수 있을지, 혹은 복귀를 하더라도 다음 재계약이 유지될지 알 수 없다. 고용불안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법정 연차휴가가 의무적으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마저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택배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자신이 아파서 일을 못 하게 되면, 자신의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을 구해 놓고 쉬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장비를 갖고 일을 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일을 못 하게 되더라도 임대료나 보험료 등은 계속 지출되기 때문에 더 많은 부담을 안게 된다. 특히 불안정노동자들은 노조할 권리가 잘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단체협약으로 유급병가를 시행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법정 유급병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5. 본문사진.jpg

아프면 쉴 권리 기획강좌 3강 “우리는 왜 아파도 쉬지 못하나” 집담회. [출처: 철폐연대]

 

 

3. OECD에서 아프면 쉴 권리의 제도적 보장이 없는 국가는 한국뿐

 

유급병가는 아프면 쉴 권리에 대해 사용자들에게 재정적 책임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유급병가가 적용되기 어려운 자영업자나 불안정노동자들도 아프면 쉴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므로 여러 나라는 아플 때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소득을 보전해 주는 상병수당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상병수당은 조세나 건강보험 등을 재원으로 활용하는 사회보험제도이다. 불안정노동자들에게는 유급병가와 상병수당 둘 다 필요하다. 상병수당을 받는다 하더라도 병가가 보장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회복된 후 일자리를 잃을 수 있으며, 유급병가를 보장받기 어려운 불안정노동자들은 상병수당으로 유급병가를 보완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업무상 질병과 부상을 제외하고는 아픈 책임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아플 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서 건강이 악화되면 의료보험에 부담이 되고, 노동자들이 빈곤해지면 복지재정에 부담이 되며, 노동자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어야 생산성의 손실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세계 184개 국가 가운데, 173개 나라가 이미 유급병가나 상병수당을 도입하고 있다. 상병수당과 유급병가 둘 다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11개국밖에 없다.

 

 

 

국가명

법정 유급병가 없는 국가

7

한국, 일본, 미국(무급), 포르투갈(무급), 캐나다(무급), 아일랜드, 멕시코

상병수당 없는 국가

4

한국, 미국, 스위스, 이스라엘

모두 없는 국가

2

한국, 미국

OECD 가입국의 유급병가 및 상병급여 도입 현황(개국)

* 미국은 유급병가에 대한 법적 의무규정은 없으나 업무 외 상병으로 인한 해고를 막기 위해 연간 12주의 무급병가를 연방법으로 보장하고 있고(가족 및 의료 휴가법: Family and Medical Leave Act of 1993), 주정부 상당수는 자체적으로 법정 유급병가제도를 운영.

* <출처> 이재훈, ‘외국의 유급병가, 상병수당 현황과 한국의 도입 방향’, 사회공공연구원 이슈페이퍼, 2020.2.

 

 

위 표에서 보듯 OECD 국가를 기준으로 하면 법정 유급병가가 없는 국가는 7개 국가이다. 이들 대부분은 상병수당이 있으며, 따라서 상병수당과 유급병가 모두 없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밖에 없다. 게다가 미국은 유급은 아니지만, 아파서 쉴 때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도록 무급병가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주별로 유급병가를 제도화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아프면 쉴 권리가 제도화되지 않은 나라는 OECD 국가 중 사실상 한국밖에 없다.

 

유급병가가 제도화된 나라들은 휴가 초기 5~15일간 급여를 사용자가 계속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에서는 사용자들이 수개월 부담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최대 2년까지 지원된다. 최근 영국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기존 병가 4일 차부터 지급되던 법정 병가급여를 1일 차부터 지급하는 것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4. 유급병가 제도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 상병수당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될지 알 수 없다. 지금 진행되는 시범사업의 경우 보장금액도 낮고, 신청도 까다로우며, 고령자와 이주노동자 등 배제되는 노동자들도 많다. 특히 2차 시범사업에서는 소득 하위 50%를 대상으로 하는 등 상병수당을 보편적으로 적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상병수당제도가 제대로 만들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유급병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어서 노동자들이 해고의 위험 없이, 생계의 걱정 없이 아플 때 쉬고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법정 유급병가는 근로기준법 개정 사항이다. 우선 사용자의 법적·재정적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노동자가 아플 경우 업무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인하기 어려우며, 이 기간에 해고되는 것을 막아서 실업에 대한 사회적 부담을 줄이고,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도록 할 책임이 기업에 있기 때문이다. 유급병가의 기간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현재 시행하고 있는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적어도 한 달의 기간은 보장되어야 하고, 급여는 이전 소득에서 하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업장 규모에 상관 없이 모든 사업장에 적용하도록 해야 하며, 병가를 이유로 한 해고 및 징계를 금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미 근로기준법에 유급병가 규정을 신설하는 법안이 여러 개 발의되어 있지만, 이 법안은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게다가 이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연차유급휴가도 인정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이나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이 법이 적용될 가능성은 현재 매우 낮다. 또한 급여 부담자가 ‘사용자’이기 때문에 실질 사용자인 원청이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프면 쉴 권리’의 보편적 보장을 위해서는 유급병가의 법제화와 더불어 상병수당제도를 제대로 도입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