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라라비/202008] 노동자로 살아가며 작은 실천으로 답하기 / 서진숙

by 철폐연대 posted Aug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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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이야기

 

노동자로 살아가며 작은 실천으로 답하기

 

서진숙 • 보육노동자, 철폐연대 회원

 

 

 

 

살다보면 ‘왜 그것을 하게 되었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등의 ‘왜?’라는 질문을 받고는 한다. 그럴 때면 선뜻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을 이유로 대며 ‘왜?’에 대해 일목요연한 듯 설명을 해나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명료한 듯 대답을 하고 나면 항상 그 뒤에는 ‘그 외’의 다른 이유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고는 한다. ‘김용균 특조위 보고서 읽기모임’에 참여하게 된 이유도 그렇게 여러 가지 경험들, 생각들, 상황과 조건들이 얽혀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왜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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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28. ‘김용균 보고서 읽기모임’ 1강 “사고는 어떻게 반복되었는가-재해자 과실론과 책임의 공백”을 주제로 강연한 서교인문사회 연구위원 전주희 동지와 참석자들 모습. [출처: 김용균재단]

 

단결과 연대

 

나는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보육교사였고, 2년 남짓 노동조합에서 상근활동을 했고, 한 달 정도 구직활동을 거쳐 다시 보육현장에서 4개월째 일하고 있는 보육노동자다. 보육교사 조직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중간중간 고민이 많았고 한 고비의 고민에 내 나름 소박한 답을 찾게 해주었던 사건이 김용균 청년노동자의 죽음과 그 싸움이었다.

전국에는 4만 개 정도의 어린이집이 있다. 4만 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놀랄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 중 70%정도는 5인 미만 사업장이다. 보육계에서 규모가 엄청 크다며 속칭 ‘어린이집계의 삼성’이라고 부르는 어린이집조차도 실상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15명 안팎이다. 간혹 20명을 넘어가는 곳도 있지만 극히 드물다. 그렇게 작고 영세한 사업장 4만 개가 전국 골목골목에 속속 자리잡고 있다. 그 곳곳에 4만 명의 사용자와 28만 명의 보육노동자가 있다. 이런 이야기는 비단 어린이집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생활공간에 너무나 가까이 있는 사회서비스영역 노동자들이 대부분 엇비슷하다. 사회서비스영역에서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이야기는 노무현 정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년 남짓 어린이집을 포함한 각종 사회복지시설, 요양시설, 센터들이 늘어났고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지원사, 각종 치료사, 사회복지사, 생활지도사와 같은 노동자들도 늘어났다. 작은 사업장, 영세한 사업장 노동자들이 그만큼 생긴 것이다.

작은 사업장은 규모가 작아서 사업장 내에서 상근활동가를 낼 수도 없고 타임오프를 단체협약으로 맺는 일도 극히 드물다. 육아휴직을 하거나 사직서를 써야 상근활동을 할 수 있다. 그만큼의 결의가 필요하고 불안정한 미래가 따라오는 일이다. 그래서 큰 조직을 꿈꿨다. 보육노동자의 주체적인 힘으로 전국적인 조직, 상근활동가를 낼 수 있는 조직, 그렇게 튼튼한 조직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활동했다. 그렇게 몇 년의 활동을 하다가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보육전략조직 활동가들이 전국을 헌신적으로 뛰어다니면서 조합원 수는 조금씩 늘어났다. 조합원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업장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고 또 전국적으로 활동의 영역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이 어지간하게 크지 않고서는 전국 사업장의 문제를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매일 좁은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생활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이 훤하게 서로에게 드러나며, 아주 사소한 결정조차도 원장에게 결재를 받아야 하는 어린이집 구조에서 노자 간의 대립은 다른 것도 아닌 극단적인 괴롭힘이나 갑질로 나타난다. 노동자의 집단적인 힘을 통해 현장의 권력을 노동자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활동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해고에 맞서 투쟁을 벌인 현장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 명의 조합원이 원장의 괴롭힘과 갑질에 대항해 ‘버티기’를 한다. 그 버티기는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노동조합의 투쟁보다 더 일상적이고 고된 투쟁의 과정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버티기’를 정서적으로 지원하고 힘을 실어주는 일이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동안 밤 시간은 언제나 혼자 버티는 조합원과 두어 시간씩, 길게는 새벽까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어떤 갑질을 당했는지 이야기 듣고, 도닥이고, 같이 울고, 버티자고 힘을 북돋는 것이 일이었다.

그것이 작은 조직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고 한계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느 동네 어느 골목에나 있는 어린이집 현장에서 원장의 괴롭힘과 부당한 갑질에 못 이겨 보육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한다.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하거나 싸울 힘을 찾지 못해 우선은 현장에서 버티기로 한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조합원 수가 늘어가는 만큼 그렇게 혼자 버티기 투쟁을 하는 조합원들도 늘어간다. 하지만 끝도 없는 일상에서 투쟁을 하고 있는 조합원들과 그렇게 혼자 버티며 점점이 흩어져 있는 조합원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준비하지도 못했고 또 답을 찾지도 못했다. 작은 사업장, 영세한 사업장 조직화의 한계라고 느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그 한계는 나만이 느끼는 한계는 아닐 것 같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의 한국 노동조합 활동 방식과 노동조합 시스템의 한계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대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온 노동조합, 하나의 사업장을 단위로 조직하는 노동조합. 그런 조직방식과 활동방식이 만들어온 것이 현재 한국 노동조합의 활동이고 운동방식이 아닐까? 작은 사업장, 영세한 사업장, 점점이 흩어져 있는 사업장들의 활동방식과 시스템은 현실 밖에 있거나 상상 밖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이런 상상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큰 조직, 전국조직, 상근활동가를 낼 수 있는 조직과 같이 현재의 노동조합 시스템으로 들어갈 수 있는 큰 조직을 꿈꿨던 것이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암담해하고 있을 즈음 김용균 청년비정규노동자가 스러져갔다. 그리고 추모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대책을 마련하라는 집회에 참여했다. 참담한 죽음을 접한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랬겠지만 그 즈음 집회는 매번 너무 슬펐고, 화가 났고, 미안했고, 무슨 놈의 세상이 이런가 싶기도 했고, 지금까지 무슨 활동을 해온 건가 싶기도 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집회에 참석하면서, 투쟁이 전개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 투쟁을 일궈나가고 있는 활동가들을 보면서 스스로 작은 답을 찾아갔다. 작고 적으니까 모이는 것이고 서로 힘을 보태려고 연대하는 것이다. 왕도는 없다. 그냥 단결과 연대가 기본이고 답이다. 그 기본을 나침반 삼아 활동하되 문제의식은 잃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다듬어갔다.

개인적으로 김용균 청년비정규노동자의 죽음과 투쟁은 우리 운동에서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낸 의미 있는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싸울 힘이 있는 대규모사업장의 투쟁도 아니고, 한 사업장 내에서 이루어진 투쟁도 아니다. 산별노조만의 투쟁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정규직 노동자만의 투쟁도 아니다. 노동조합뿐 아니라 다양한 단위와 주체들이 만들어 낸 공동투쟁이다. 그러면서도 노동자의 투쟁이 현장을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냈고 특별조사위원회 보고서는 다단계하청의 수탈구조와 책임 공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다루었다. 비정규직 문제,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사회적인 문제로 드러냈다. 어찌되었건 김용균이라는 빛에 우리사회는 빚지고 있고, 그 빛이 만들어낸 변화를 이행시키고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남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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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6. 김용균 특조위 보고서를 함께 공부하는 다섯 차례의 강연이 모두 끝나고 참가자들과 소회를 나누는 시간. [출처: 김용균재단]

 

가슴에 남는 말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동법 개악을 반대하는 집회가 있어 참가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건널목에서 김미숙 어머니와 같이 서서 신호를 기다리게 됐다. 어머니야 나를 잘 모르시겠지만 그저 조심히 들어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집회에 노동자들이 많이 안 온 거 같은데 맞냐고 물으시고는 왜 사람들이 안 모일까요? 하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러고는 나는 지금이라도 여기 서서 막 이야기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마이크 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은데 말이에요 라고 하셨다. 그리고 신호가 바뀌고 다시 인사를 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어머니의 짧은 말 속에서 묻어나는 안타까움과 절박함이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작은 실천으로 답하기

 

겨울을 가르던 뜨거운 투쟁과 특조위 보고서는 세상을 바꿀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나는 새로운 어린이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김용균재단 언론팀 자원활동가 모집’ 공지를 보게 됐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활동을 충분히 할 수는 없겠지만 관련 기사를 여기저기 퍼서 나르는 일이라도 하면 되지 싶어 자원활동가를 지원했다. 자원활동가를 하겠다 생각하고 첫 모임에 나갔는데 언론팀 자원활동가는 당장 해야 할 일보다는 먼저 알아야 할 일이 더 많았다. 알아야 할 일들의 시작은 특조위 보고서를 아는 것부터였다. 그래서 ‘김용균 특조위 보고서 읽기 모임’을 신청했고 성실하지는 못했지만 자리를 지켰다.

김용균재단 언론팀 자원활동가를 하게 된 것도, 특조위 보고서 읽기 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도 내가 빚진 것에 대해 작은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투쟁과정을 지켜보면서 답답한 현실에 대해 답을 얻었고, 투쟁의 결과는 많은 변화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문제가 지적되고 합의했다고 곧바로 현장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렇게 합의한 내용을 이행시키고, 현장을 바꾸고, 책임자에게 공정한 처벌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그 일에 작은 실천을 보태는 것으로 내가 진 빚에 대해 답을 하고자 한다.